13. 파밀 고원

그대는 서쪽 이역이 먼 것을 한탄하고
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애달파한다
길은 거칠고 산에는 눈이 쌓였으며
험한 골짜기엔 도적도 많다
새도 놀라 뽀족 솟은 바위 끝에서 나르고
사람은 좁은 통나무 다리 건너기를 어려워한다
평생 눈물 흘리는 일은 없었으나
오늘은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구나

평생 눈물을 흘리지 않고 살았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727년 신라의 혜초 스님이 읊은 노래이다. 그것도 파밀 고원을 넘어 토화라라는 곳에서 중국 사신을 만나 지은 오언시이다. 얼마나 험한 길이면 새조차 놀라 바위 끝에서 날아갈까. 게다가 산적까지 출몰하여 괴롭히고 있으니, 문자 그대로 험로가 아닐 수 없다.

혜초 스님은 인도 구법여행을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인도 갈 때는 해로를 선택했으나 귀로는 카라코럼 하이웨이의 육로를 선택했다. 그래서 파밀 고원을 넘어야 했다. 이런 내용은 그의 기행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담겨 있다. 이 문헌을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는 혜초의 존재도 몰랐고, 또 그가 신라의 구법승인지도 몰랐다. 20세기 전반의 학문적 성과의 하나로 우리는 ‘혜초’라는 민족적 보배를 안게 되었다.

험로 중의 험로 파밀 고원
신라 혜초는 이를 넘어서
부처님 法을 해동에 전했네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
파밀 정복하며 용맹함 알려
서방에 종이 기술 전하기도

“차디찬 눈이 얼음까지 끌어 모으고/ 찬바람이 갈라져라 매섭게 부는구나/ 망망대해는 얼어 붙어 단을 갈아놓은 듯/ 강물은 제멋대로 벼랑을 갉아 먹는구나/ 요문엔 폭포수마저 얼어 끊기고/ 우물 테두리는 도사린 뱀처럼 얼었구나/ 불을 벗 삼아 층층 오르며 노래한다마는/ 과연 저 파밀 고원을 넘을 수 있을 수 있을는지.”

시꺼멓게 우뚝 솟은 바위 산, 그 끝마다 뾰족뾰족 칼날을 세워 험악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 사이사이의 골짜기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입체감을 더해 준다. 혜초가 노래한 현장감이 돋보이는 풍경이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밀 고원, 굽이굽이, 오르락내리락, 출렁거리다 보면 만나게 되는 험한 고개 파밀, 거기를 총령(?嶺)이라 부르기도 했다. 얼마나 높고, 험하면, ‘세계의 지붕’이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자락, 동서 교류의 길목, 비록 ‘하이웨이’라고 명명했지만 죽음의 길임에는 틀림없으리라. 이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하기야 뒤에 오는 나그네는 해골을 이정표 삼아 길을 찾는다 했다. 해발 4000m의 고지. 여름이 되면 이 높이까지 눈이 녹는다. 그래서 초지가 형성되어 사람들이 살 수 있다. 양 같은 동물을 방목할 수 있는 해발의 높이이다. 그래서 티베트의 라사 혹은 라닥의 레 같은 고산 도시가 이뤄질 수 있었다.

해발 4000m, 엄청난 고산이다. 서울 남산의 높이가 겨우 500m 수준에서 맴돌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협곡을 넘고, 만년설의 고산을 넘고, 또 카라카리 호수 같은 거대한 호수를 넘고, 강을 건너, 인도의 간다라 지역과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연결하는 길. 그 카라코럼 하이웨이의 중국 쪽에 파밀 고원이 있다.
동서 교류의 교통로이기 때문에 파밀은 전략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중국의 많은 구법승들이 이 길을 따라 인도로 갔다. 물론 종교 이외 교역이나 외교 등 다양한 목적으로 이 길을 넘기도 했다.

8세기 무렵 파밀 지역은 고원국가 소발율국(小勃律國)이 있었다.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의 전략지구였다.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던 토번(티베트) 국가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당의 문성공주를 티베트로 시집보내야 할 정도로 국력이 우월했던 토번. 그 토번은 737년부터 소발율국을 지배했다.

이들 양국은 왕실간의 결혼정책 등으로 우의를 다지고 있었다. 당의 입장에서 소발률국 점령은 지상 과제였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고산지대였다. 하지만 당의 입장에서는 소발율국을 지배해야 서역을 지배하게 되고, 이는 동서 교통로의 확보를 의미했다. 그래서 당나라는 고선지 장군을 현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고구려 유민의 아들 고선지가 중국의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시킨 역사상의 인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727년 신라의 혜초가 걸었던 파밀을 20년 뒤에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가 걷게 된 것이다. 혜초는 소륵에서 쿠차까지 1개월 가량 걸렸다.

파밀의 절경을 보면서,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서, 고구려의 후예를 가슴에 품어야 하니, 묘한 느낌의 나그네 길이다. 탐험가 오렐 스테인(Aurel Stein)은 그의 기행문(1907)에서 고선지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상황은 중국 정부가 길기트 계곡에서 가지고 있던 실지 회복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는 것으로 되었다. 소발율국을 공격하려고 중국의 사진(四鎭)절도사에 의해 시도되었던 세 차례 원정에서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의 조서에 의해 747년 안서(安西)부도호 코리아 출신의 고선지 장군에게 위임된 네 번째 원정은 성공 그 자체였다. 이번 원정의 군사 행동은 그 결과의 역사적 중요성으로 보나, 또 이 지역의 고대 지형학 관점에서 잠시 언급할 가치가 있다.”

세 명의 절도사가 소발율국 점령을 실패한 이후 고선지 장군에 의한 성공. 스타인은 고선지 원정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고선지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감동했다. 일찍이 국내 그 어느 누구도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때, 유럽의 탐험가는 고선지를 ‘발견’했다. 고선지는 당 현종의 명령으로 군마를 제공한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출정했다. 그는 총사령관 역할의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였다. 베크위스(Christopher Beckwith)는 〈구당서(舊唐書)〉를 토대로 하여 고선지의 행로를 이렇게 정리했다.

“그들은 15일 만에 쿠차에서 악수(발환성)에 도착했고, 그리고 10여 일만에 구스틱(악비덕)까지, 10여 일만에 카쉬가르(소륵)까지, 20여 일만에 총령(파미르 고원)의 요새(총령수착)까지, 20여 일만에 파미르 계곡(파밀천)까지, 그리고 테레만(특륵만천)까지, 그런데 테레만이 바로 오식닉국인데 20여 일만에 도착했다. 물론 그 원정 일정에서 언급된 지점에서 여러 날 머무르기도 했다.”〈Tang China and the Arabs〉

고선지의 파밀 정복의 행로가 자세하게 정리되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쿠차에서 고산의 카라코럼 하이웨이의 험로를 군마 병정 1만 명을 이끌고 간 대원정의 길. 이렇게 하여 올라간 파밀, 거기서 본격적으로 만나는 타쉬쿠르칸, 돌궐어로 석보(石堡)라는 의미이다. 혜초 스님보다 약 1세기 앞서 파밀을 지나 간 현장법사는 그의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을 불법이 융성하나 소승불교가 유행한다고 적었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시꺼먼 산. 그 주름진 산세는 더러 만년설을 이고 있고, 또 기묘한 형태를 자랑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절경이다. 타쉬쿠르칸의 거리를 거닌다. 나는 석두성의 폐허 위에 올라가 본다. 역사는 과거로 돌아갔고, 폐허의 잔해만 남아 바람을 맞고 있다.

석두성 제일 높은 곳에 올라 저 멀리 연운보(連雲堡) 쪽을 바라본다. 바로 고선지 장군이 점령했던 전략지구이다. 세계의 전쟁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되는 행군의 현장이다. 그 주위의 굴곡진 산 능선들, 자연은 위대할 따름이다. 과거의 전쟁은 바람에 휩쓸려가고 아름다운 풍광만 남아 있다. 성터에서 눈길을 아래로 주니 초원이다. 드넓은 벌판을 가득 채운 초원,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고마운 땅이리라.

고선지는 누구인가. 중국인이 아니면서, 그러니까 고구려 이민족 출신이면서, 서역 정벌의 현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장군. 747년 당 현종의 명령에 따라 토번 정벌의 사령관 고선지. 10만 명의 토번군이 주둔하고 있던 연운보를 불과 1만 명의 군사로 점령했던 전략가. 고선지의 소발율국 점령은 서방 72개국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는 전과(戰果)를 얻었다. 고선지의 성공은 그 자신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鎭節度使)라는 직함으로 승진하게도 했다. 이는 서역의 최고 직책으로 고선지의 위력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파밀에서의 성공은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대하게 했다. 그래서 고선지는 사마르칸트까지 영역을 넓혔다. 당의 서역 경영은 아랍세계의 견제를 이루었다. 하지만 고선지의 영광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종말로 접어들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 고선지 장군의 휘하 병사들에 의해 종이 만드는 제지술이 서방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종이’ 만드는 기술은 유럽지역을 놀라게 했고,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자체 제조가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보다 1000년가량 늦은 종이의 역사이다. 종이는 문명발달사의 상징적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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