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 내가 살 세상을 그려 본다면, 내가 그 세상의 어떤 곳, 어떤 위상을 가지고 살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살고픈 세상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아니 꼭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나갈 세상은 어떤 세상이어야 할까? 우리 국민들이 이러한 물음들을 던질 줄 알아야 우리의 이상적인 미래를 이루는 힘이 형성될 수 있다.

‘갑질’ 강자가 약자에게 행한 횡포
약자가 불평·비굴 머무는 것 ‘을질’
‘갑·을질’ 만연하면 사회엔 희망 無

대형 프랜차이즈 등 만연한 갑질들
사회·경제 정의 추락하고 있는 증거
한 아파트 경비실 에어컨 설치 미담
아직 한국사회엔 희망있음 보여줘

너와 내가 있어 세상이 움직인다는
상생의 철학을 바탕으로 살아가자

전혀 그러한 의식이 없이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만 생각이 머물러,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불평과 원망만을 늘어놓고, 유리하고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마치 자기가 누리는 것이 하늘이 부여한 것인 양 나댄다면?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끝없이 양극화로 치닫는 비극적인 미래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전체적인 반성이 없이 자기만을 생각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연출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갑을관계에서의 갑질, 을질이다. 을질이라는 말이 성립하느냐고 묻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큰 그림을 지향하지 못하고 자기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다면 역시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무조건 불평과 분노에만 휩싸여 있다던가, 자존감을 잃고 비굴한 태도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을 을질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그렇지만 사회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강자의 횡포이기 쉽다. 많은 경우에 약자는 힘이 없기에 큰 문제를 일으키기 힘들고, 강자의 횡포에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자가 소외되지 않고 관심과 보호 속에 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러한 이상을 향해 나가고 있는 것인가? 우려가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들이 요즈음 들어 많이 보도되고 있다. 프랜차이즈 갑질 사태만 하더라도 과연 이 사회에 경제적 정의가 어디까지 실추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따듯한 소식도 있다. 얼마 전 서울 석관동 코오롱아파트의 70대 주민이 아파트 경비초소에 에어컨 5대를 기부한 일, 작은 일이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크다. 최근 돌아가신 부인을 기리며, “힘든 시간을 함께 해준 경비원 동생들이 고마워서”라는 정말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갑과 을이 아니다. 경비원 동생들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단지 그분 한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아파트의 용역계약서는 쌍방을 갑, 을이 아닌 동(同), 행(幸)으로 기재한다고 한다. 그런 전체적인 바탕 위에 그분의 따듯한 마음이 꽃핀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지향하는 원동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성태용 前건국대 철학과 교수

신분계급과 서열을 완전히 벗어난 사회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모든 것은 지배하는 사회야말로 가장 극악한 사회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런 사회는 바로 갑질이 만연하고, 을 또한 앞에서 말한 을질에 머물러 함께 사는 사회를 그려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위치에 있던, 각각이 모두 사회의 공동 목표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깨져 모든 것을 서열화하며, 유리한 위상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자기들이 천부적인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하면? 그것이 극악한 갑질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을질(?)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러한 양극화의 종말은 뚝 부러져나가는 역사인 것이다. 그러한 역사야말로 너에게도 나에게도 비극이다.

당신과 나는 귀천이 없이 각각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며, 어느 누구도 없으면 우리 세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상생의 철학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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