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는 참으로 억울할 것이다. 벌레는 작고 기어 다니는 동물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벌레의 한문 발음 충(蟲)이 접미어로 사용되어 상대방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맘충, 급식충, 한남충, 노인충 등 사람을 벌레로 만들어 비하하고 있다. 한때 된장녀, 김치녀 등 우리가 자랑하는 전통 음식까지 동원하여 대한민국 여성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어느 정치가는 바퀴벌레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상대를 비난하기도 한다. 벌레도 밞으면 꿈틀댄다고 하는데 벌레는 환장할 노릇이다.

인간의 단백질 보충을 위해 벌레의 주류인 곤충을 대량 사육하여 살 처분까지 한다고 하니 이름 더럽히는 수모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아, 기억난다. 우리 엄마들이 속 썩이고 말 안 듣는 자식을 ‘밥충’이라고 야단치는 것을 . 그러나 이 밥충은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안타까움의 용어이지 결코 ‘급식충’이 아니다. 싫어하고 미워하고 조롱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사바세계에서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혐오 신조어 벌레 ‘충(蟲)’
익명의 SNS가 등장 무대
한국사회 병리 대표사례

계층·집단 매도로 변질
자극화되는 타자 혐오는
도덕적 가치관 붕괴 상징

도덕과 사회정의 수립이
정화의 유일한 길일 터

그런데 왜 충(蟲)이란 접미어에 요란을 떠는 것인가? 충의 횡행 현상은 우리 한국사회의 병리 현상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한국사회의 오염된 지하수가 지표면에 균열이 생기면서 땅위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충(蟲)의 등장 무대는 SNS이다. 이곳은 익명의 공간이다. 익명의 공간은 나를 감추고 남을 공격하기 좋은 장소다. 또한 이 공간은 집단을 만들기 쉽다. 따라서 싫은 대상이나 집단에 ‘떼공격’을 하기 쉽다. 이러한 익명의 집단 속에서 개인이 지닌 체면과 도덕성은 무디어 가고 그래서 편하기도 하다. 바로 인터넷 공간이 오염된 지하수를 여과없이 분출시키게 만든 것이다.

충(蟲)이란 접미어의 첫 등장 배경은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음식점, 공연장 등 공공장소에 애들을 데리고 나온 일부 젊은 엄마들의 철없는 행동(개념 없는 행동이라 표현된다), 지하철 등에서 보는 일부 노인들의 추태는 주변을 불편하게 하고 화나게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일부 개인에 대한 미움을 일반화하여 한 계층이나 잡단을 매도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동시에 타자를 혐오하는 용어는 점점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진화된다.

혐오의 자극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계속 용어는 험악해진다. 그래야 관심을 끌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황폐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 한국사회의 제일 큰 병리적 현상은 ‘정신적 가치의 물화(物化)’현상과 ‘공동체 의식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배금주의, 물질주의가 팽배하고 현세적 쾌락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공동체의식이 균열되고 사회 계층의 양극화 현상과 집단이기주의는 횡행하고 있다.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

혐오의 시대를 벗어나는 근원적인 길은 우리 땅 밑을 흐르는 지하수를 맑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오염된 지하수가 지표면으로 분출될 때 이를 정화할 수 있는 필터링 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결국 개인의 도덕적 가치관과 사회구조의 정의성에서 길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일찍이 붓다께서는 연기법의 지혜와 자비의 두 수레바퀴로 큰 마차를 이미 만들어 주셨는데, 어인 일인가. 이 마차를 몰고 갈 수 있는 사람은 다 어디에 있는가?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마(Gregor Sama)처럼 우리 모두가 벌레가 된 것 같으니 이를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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