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등불은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꺼지지 않는 불이니라!

 

발심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

질문 스님께서는 생활이 그대로 참선이고 도(道)라고 하셨는데, 굳이 일상생활을 떠나서 수련회나 신행회 모임을 통해서 발심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수련회 일정에 보면 대부분 촛불재가 있던데 공부를 한 사람이 켜는 초와 초심자가 켜는 초가 어떻게 다른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우리가 왜 부처님 법을 배우려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부처님 법이기 이전에 진리란 말입니다, 진리! 진리를 참구하는 겁니다. 진리 그 자체가 부처님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각자 자기를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죠. 각자 자기완성을 위해서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뭐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우리는 자기완성 하는 것을 급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까지 진화돼서 올라왔으니까, 부처님의 그 뜻과 우리의 진리를 여러 가지로 생각할 때에, 그 가운데서 이제는 더 볼 나위 없이 먼저 나를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진짜 그 마음의 불을 켜서 내 몸과 같은 초가

녹고 녹아서 다 녹게 되면 어떻게 되죠?

불도 없고 초도 없죠? 그 도리를 알면 바로 깨친 겁니다.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서 자기완성을 하면 모든 것이 겁나지 않는 겁니다. 먹고 사는 거라든가, 안 되고 되는 거라든가, 하늘이 무너진다든가,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는 겁니다. 하나도 걱정이 없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이 해 보시면 알 겁니다. 자기완성을 하게 되면 그렇게 좋은 겁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죠.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도 모두 뒷받침을 잘 해 주지 못하고, 또 자기의 근본을 아주 등한시하는 사람들이 지금 불법을 배운다고 하기 때문에, 그리고 기복으로만 항상 빌고 다니기 때문에, 도대체 자기를 벗어날 길은 천야만야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옛날에도 그랬지마는 선지식들이 일 년에 한 번씩이든 그렇게 육법공양을 했습니다.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과거의 선지식들이 모두들 너무 애를 쓰신 것 같아요. 그랬건만 그 뜻을 행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못 받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촛불을 켜 놓을 때 어떠한 심정으로 촛불을 켜야 하는지 그것조차도 잘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항상 내가 그러죠. “주인공에다가, 오직 한군데다가 몰입을 해서 놓아라. 잘된 거든 잘못된 거든 모든 거를 감사하게, 거기에서만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거기다 전부 놔라. 일거수일투족 다 놔라.” 이랬죠. 그것이 바로 저 촛불 켜는 거와 같습니다. 촛불을 켜 놓으면 초는 녹죠? 여러분, 다 잘 아시죠? 녹는다는 것은 바로 이 업덩어리 몸체 속에 들어 있는 그 모든 인과성, 유전성, 업보성, 영계성 또는 세균성 이 다섯 가지의 문제를 다 몸으로 녹이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놓지 않으면 녹지를 않아요. 절대로 끊어서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해서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칼로 베어서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그렇게 해서 촛불을 켜 놓을 때는, 진짜 그 마음의 불을 켜서 내 몸과 같은 초가 녹고 녹아서 다 녹게 되면 어떻게 되죠? 불도 없고 초도 없죠? 그 도리를 알면 바로 깨친 겁니다. 초도 없고 불도 없다, 그 가운데 뭐가 있느냐. 예전에는 “할!” 하기도 하고, 주장자로다가 “부처가 어디 있습니까?” 하면 골통을 치고, 또는 “부처가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 법은 어떤 겁니까?” 해도 손가락 하나를 들었고, “인도에서 달마 스님이 동쪽으로 온 뜻은 뭡니까?” 해도 “저 뜰 앞의 잣나무다.” 하고 이렇게 그냥…. 그 방편상의 말들을 말로 다 할 수는 없지만 생사를 전부 파괴할 수 있는, 바로 함이 없는 말씀이거든요. 똥둑간에 가다가 질문하면 “똥 친 막대기다.” 이렇게 대답을 하시고…, 이거는 뭐, 말할 수 없이 그 일화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누가 아느냐는 얘깁니다. 남전 스님이 이르지 않는다고 왜 고양이를 죽였을까? 조주 스님이 왜 머리 위에다 신발을 얹어 가지고 나갔을까? 이런 등등 말입니다. 이 도리를 알면은 그건 정말 부처 아닌 부처가 돼서 그 마음이 일체 보살이 돼서 허공에 꽉 찰 겁니다, 아마.

그렇지만 촛불을 물질로 볼 때는 이게 작고 크고가 있죠. 그러나 마음을 깨닫고 불을 켠다면 이것은 등이 아니죠. 등이 아니에요. 이것은 비바람이 쳐도 꺼지지 않는 불이죠. 그냥 등불은 비바람이 치면 꺼지는 불이지만, 마음의 불이라는 건, 불씨라는 건 온통 천둥 번개를 쳐도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마음의 불과, 그냥 등불이 있는 걸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불이라고 이렇게 말씀도 안 하시고 “이 등불은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꺼지지 않는 불이니라.” 하고요.

우리 신도님들 중에도 마음의 불이 켜져서 지금도 훨훨 밝히고 계신 분들이 여러 분이 계신데요, 아주 좋습니다, 정말. 그렇지만 촛불을 켜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 없다 이러는 게 아닙니다. 여기도 다 미생물이 있고, 날아다니는 게 우리 눈에는 안 보여도 다 있습니다. 그것들도 다 내 인연으로 인해서 있는 겁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내가 없다면 없는 거지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 하나 켜 놓는 데 얼마만큼 자기의 앞뒤가 깨끗해지는지 모릅니다. 과거의 조상들이나 미래의 자식들, 이런 것을 깨끗하게 정리해 줄 수 있는 촛불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의 촛불을 마음으로 그렇게 켜셔야 되겠죠. 그리고 자기 주인공은 꼭 잊지 마시고요. 세세생생에 내려온 주인공이고 지금도 주인공이고 미래에도 주인공이니까요. 주인공 죽는 법 봤어요?

그리고 우리가 수련회 동안 촛불을 켜는 과정을 통해서, 촛불을 보고 내 마음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고, 내 마음의 촛불을 켜 들고 정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불과 보이지 않는 불이 둘이 아닌 까닭에, 우리가 마음의 촛불은 항상 켜고 다니는데, 내가 어떠한 의식으로 인해서 마음의 불을 좀 꺼뜨리고 간다 이럴 때는 캄캄합니다, 마음의 불을 껐을 때는. 그럴 때 남이 촛불을 켠 걸 보면 바로 또 촛불을 켜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밝게 살 수 있는 거니까 켜는 것도 좋고, 안 켜는 것도 안 켜는 것이 아니죠. 하여튼 내 마음의 불만은 절대로 꺼뜨리지 마십시오.

 

애욕이 왜 나오고 어떻게 녹이는지

질문 제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제 나름대로 늘 생각을 했던 것으로 제 마음 안에서 애욕이 왜 나오고 어떻게 녹여야 되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만약에 애욕이 있는 당신이 없다면 어떻게 애욕이 있겠습니까? 당신 자체가 없는데, 네?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게 당신이 앉아 있는 겁니까? 더불어 같이 앉아 있는 거지. 그런데 어떻게 상대가 있습니까? 자기가 없잖아요. 자기가 내세울 게 없는데 어떻게 애욕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 생각이 난다 하더라도 그거는 피어난 꽃들의 움죽거림에 연관을 시키면 그거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함이 없이 했고 가고 옴이 없고.

그래서 가고 옴이 없이 여기도 올라왔는데, 누가 올라왔어요? 발자취도 짊어진 게 없고 또 몸속의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같이 했기 때문에 올라온 거지, 댁이 껍데기가 어디서 생겨서 올라왔어요? 알고 본다면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거지 자기 혼자 한 게 하나도 없어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다 자기 혼자만이 보는 게 없고, 그래서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더불어 같이, 자기가 심부름을 해서 더불어 같이 돈을 번 거지 내 거라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것은 모두가 같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 그게 더불어 한 거지, 왜 자기 혼자만 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돈 나갈 데 안 나갈 데 다 나가 버리고 말죠.

하여튼요, 천주교 자리든 만주교 자리든, 하하하, 불교 도량 자리든 한도량이고, 한 지구의 생물들이에요. 그러니까 하여튼 원천적인 근본을 우리가 보고 마음을, 지혜를 내야지 소소한 거, 이 다섯 손가락이 있으면 이 손가락 하나를 보고 손가락이라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죠. 그런데 지금 얘기한 것대로 여러분이 그게 무슨 희한한 기적이다 이런 게 아니라 인간이란 다 자동컴퓨터와 자동적인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다 주어져 있는데 자기가 쓸 줄을 몰라서 못 쓰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바람도 그렇게, 비도 그렇게, 모두 마음으로 쓰는 건 그렇게 쉬운데, 그러게, 내 얘기하지 않았나요? 모두 직결이 돼 있고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세상 돌아가는 이 수레바퀴하고도 더불어 같이 가설이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내면 즉시 빛보다 더 빨리 전달이 된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냥 모든 걸 묘법이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그대로 정상이에요, 그게. 우리가 마음으로는 이 구정물을 깨끗한 물로 바꿀 수가 있지만 이 물체로는 (법상 위의 물컵을 가리키시며) 그렇게 우리가 그냥 바꾸어 놓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물이라 하면은 물하고도 통하니까 마음으로는 얼른 그게 바꿔지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마음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깐 제대로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길 수도 없고, 맡기지 못하니깐 방황하게 되고 방황하니깐 일이 잘 안되고 이러는 거뿐이죠. 그러니까 알아서들 하세요.

 

공부의 어떤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

질문 사량심이 앞서다 보니까 평소 때 관하면서 맡겨 들어갈 때 과연 이게 공부가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회의가 생깁니다. 그래서 가끔 꿈으로라도 어떻게 공부하는 과정이 나타나는 것인지 안 그러면…, 저는 가슴을 향해서 눈을 내리깔고 사무실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가끔 어떤 사안이 없어도 관을 해 봅니다. 그럴 때 가슴이 아련히 아려져 오는 그런 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공부를 하는 중의 어떤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인지 안 그러면 괜한 생각을 두고 있는 것인지 한번 여쭤 보고 싶습니다.

답변 우리가 가슴이 아련해짐을 느끼고 이러는 것도 그것이 있다는 증거의 과정이죠. 그런데 확실치 못한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그것이 확실치 못하다고 없다고 미심쩍게 생각진 마세요.

그런 점도 있죠. 옛날에 나는 그렇게 서로 상응하면서도,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때가 스무 살 정도? 그러니까 6·25 나기 전이니까. 야! 참 신기한데 말이야, 내 깐에는 뭐 절에서 스님네들한테 많이 들은 것도 아니고 경을 본 것도 아니고 이러니까, ‘야, 당신이 있다면 내 손을 들어서 확실하게 있다는 걸 증명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닌 걸로 하자.’ 이렇게 하고선 딱 앉았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웬걸요. 꼼짝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선, 그래도 나는요, 믿지 않거나 그런 게 아니고 ‘허! 명령이 되는 모양이지?’ 이렇게 하곤 고만뒀어요. 그랬는데 막 이렇게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냥 별안간에 이 팔이 말입니다, 그냥 공중제비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때에 따라서는 내가 한문 글씨를 모르던 때인데, 지금은 뭐, 아나요? 하하하, 국문도 잘 몰라요. 절 도량에서 그전에는 불을 많이 때서 숯을 썼거든요. 숯 하나를 집어 들면 이게 내 손이 아니에요. 모두가 이게 내 몸도 아니고, 내 손도 아니고, 내 눈도 아니고, 내 귀도 아니고 전부 아니에요. 이렇게 해 보니깐요. 그래서 그때서야 ‘아하! 들 것도 없고 안 들 것도 없고 몽땅이구나, 몽땅이야!’ 그러고 웃은 예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못 믿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몸뚱이 하나가, 즉 내가 있기 때문에 그가 있는 거를 아셔야 돼요. 내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근본이 있지 내가 없는데 어떻게 마음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부착이 돼서, 지금 속에 정맥 동맥이 같이 돌아가듯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뿌리와 나무가 둘이 아니게 그냥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무가 뿌리를 못 믿습니까? 그와 같은 거죠.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하다 보면 웃음이 나서도 웃을 거고, 화가 나서도 화를 낼 것이고 이렇게 만드시란 얘깁니다. 허! 너무 기가 막혀서 이제 이쪽은 저쪽이 없는 줄 알고 막 그냥 생각을 하고 웃기다가 보면 거기서 껄껄껄껄대고 웃는단 말입니다. 거기서 웃는 게 바로 자기가 웃는 겁니다, 예.

그러니까 색경을 봐도 자기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고 자기 참이 보일 때 바로 둘이 아니게 볼 수 있는 거죠. 옛날에는 무쇠로다가 면경을 만들어서 그 면경을 자꾸 들여다보면서 했다고 하는데 그럴 필요도 없죠. 바로 진짜로, 진짜로 믿고 들어가셔야 됩니다. 아리송하면 안 되죠. 잘하든 못하든 그냥 진짜로 믿고 ‘생활하는 내 몸뚱이 전체가 다 그놈이 하는 짓이로구나. 생활하는 자체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고 과거에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나가는구나. 머리카락 하나도 내 게 아니로구나.’ 하고 ‘응, 바로 네 울력에 내가 이렇게 울력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하는 일도 걸림이 없이 잘될 겁니다.

그런데 모두 여러분이 100% 내가 사는 거 따로 있고 믿는 거 따로 있게끔 하거든요. 참 이상해, 그거 보면. 그러니 자기가 자기 부처인 줄 모르죠.

그러니까 진짜로 자기를 의심하지 말고 이 몸속에 있는 생명의 의식들과 더불어 한마음으로써, 한마음의 그 선장이 바로 자기의 마음이라는 거를 아십시오. 이 몸속에 있는 생명들이 바로 배를 타고 허허바다에 지금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의 마음이 선장이 돼서 바로 안으로, 배 안으로, ‘야, 배 뒤집힐까 봐 무섭다. 가만히 좀 있어! 여기를 벗어날 때까지 좀 가만히 있어. 좀 조용하게 있어. 배 뒤집히면 너도 나도 다 죽어.’ 하고 안으로 다스려야지, 바깥으로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해 봤던들 소용이 없거든요. 아니, 생각들을 해 봐요. 안 그런가? 내 몸속에 지금 중생들이 잔뜩 배에 탔고 내가 지금 배가 돼서 가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선장이 돼 가지고 지금 자꾸 끌고 가는데 그냥 허허바다예요.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게 허허바다를 지금 헤매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니, 너도 나도 다 죽자고 안에서 악업 선업들이 그냥 요동을 칩니다. 악업이 나올 때는 마음이 금방 좋았다가도 요렇게 삐뚤어져서 그냥 이런 게 치밀고 어떤 건이라도 별거 아닌데도 화가 나요, 화가 나게 되는 거니까. 또 어떤 건은 웬만큼 화날 거라도 아, 슬기롭게 넘어간단 말입니다. 그리고 잘 돼서 이렇게 하는 때도 있고. 바로 잘돼 나갈 때는 ‘아, 너희들 참 감사하구나. 이렇게 이 배를, 노를 젓고 가는 데도 절대 손색이 없게 하니 참 감사하구나!’ 하고 거기다 놓고, 또 여기서 막 우왕좌왕할 때는 ‘야, 가만히 있어. 우왕좌왕하는 것도 너니까 가만히 있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서 다스리는 것이 바로 관(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시에 이렇게 저렇게 했던 것도 꿈에 나타나서 채찍질을 해서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꿈도 생시고 생시도 꿈입니다, 지금. 예전에도 자주 탤런트 얘기 했죠. 이 탤런트들도 꿈과 같이 탤런트들 그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죠? 우리 지금 사는 것도 탤런트들이 연극하는 거와 같죠. 지금 연극하는 배우들이에요, 우리가. 허허허. 그러니까 꿈에는 이 몸을 벗어나서 마음이 가르침이요, 또 몸과 마음이 한데 합쳐서 가르침이요, 그러니까 생시나 꿈이나 같이 공부입니다, 이게. 꿈 따로 보고 생시 따로 보지 마십시오.

 

생멸과 불생불멸 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 ‘한마음’이나 ‘불성(佛性)’ 또는 ‘공(空)’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할 때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 등 여러 가지 말이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불생불멸이라고 할 것 같으면 상대적으로 생멸(生滅), 즉 생멸하는 것과 생멸하는 세계가 따라붙게 됩니다. 생멸하는 것과 불생불멸 하는 것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불생불멸은 어느 누구도 부정은 못할 것입니다. 살고 죽는 일이나 어떠한 물건이든지 부서지고 변하고 없어지고 생하고 하는 것은 누구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증불감’이라고 했겠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얘기죠. 그런데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생멸이다’ 하는 것이 ‘생(生)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멸(滅)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런 말을 했죠. 두 친구가 살았는데, 한 친구는 출가를 하고 한 친구는 속세에서 살고 있는데 속세에서 사는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스님이 된 친구를 불러다가 “우리 어머니 좋은 데로 가시게 천도나 좀 해 주시오.” 했더니 그 스님이 하는 말이 “오지 않았더라면 갈 곳도 없을 것을….” 했더랍니다. “오지 않았더라면 갈 곳도 없을 것을….” 했단 말입니다. 그 한마디 하곤 그냥 나가 버렸단 말입니다. 그냥 그대로 그 말 한마디가 법(法)이 돼서 생멸이 둘이 아니게, 끄달리지 않게 해 드린 거죠. 그런 능력이 부실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도 없고….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물질이 있어야만이 생멸이 있는 거지, 물질이 없는 데서는 생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야 나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나를 보고! 그래서 나를 보면 멸이 있는가? 멸도 없고 생도 없다 이겁니다. 그럼 무엇이 남느냐? 그것은 이게 (주먹을 쥐어 머리 위로 들어 보이시며) 하나가 남겠지요. 남는 게 없는 것이 바로 남는 것이죠.

 

꼭 출가수행을 해야만 하는지

질문 저도 사실 마음 밝히는 공부를 참 하고 싶은데 스님처럼 꼭 출가수행을 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자꾸 들어서 그걸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음, 그거는 대답하기가 곤란하잖아요. 그건 자유로 하는 건데, 하하하…. 내가 느낀 거 두 가지를 얘기하겠는데 머리 깎고 입산을 한다면 모르는 사람들이 “저이는 스님이야. 그러니까 스님한테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 이러지만, 출가하지 않고 공부하는 이는 그냥 스님하고 똑같이 다 실천할 수 있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넓게 할 수가 없으니까 머리를 깎는 거지요.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말입니다. 안 보이는 데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자유예요. 스님이 되고 안 되는 건 자유고, 공부하는 거는 스님이 됐든 안 됐든 똑같아요. 이거는 솔직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냥. 아니, 그 도리도 모르고 스님이 된다면 스님은 돼서 뭘 합니까? 껍데기 스님이 돼야 소용없어요, 아무리 천만 명이 된대도. 그러니까 결심하고 스님이 되는 거, 이거 보통 사람들 아닙니다. 허허허….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스님 안 돼요. 스님 되는 것도 보통이 아닙니다. 부모 형제 다 버리고 모든 것을 다 속단해 버리고 이 무명초, 천차만별로 어지러운 모든 걸 깎아 버리고, ‘나는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도리를 알겠다’고 다짐하고 들어오는 거, 이거 보통 아니죠.

그런데 공부를 한다니까 말인데, 어떤 분야든지, 만약에 의학을 해서 아픈 사람을 건진다 하더라도 이 도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물질 또는 학술로 배워도 마음으로 50%의 보이지 않는 데서 나오는 걸 체험해서 터득하지 못한다면 자기가 그걸 커버하고 나갈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의당히 이거는 배우고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확고하지를 못하고 만약에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이렇게 생각을 해 보고 있는 중이라면 진짜 생각을 해서 단호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이 들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나는 시간 뭐,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시집을 간다, 장가를 든다고 하는데, 그런 일에 정신을 빼앗기는 사람이라면 공부도 못할 거 괜히 스님이 돼서 뭘 하느냐. 가정이라도 잘 지켜야지. 이 공부는 모든 사람을 건질 수 있는 그런 것이고, 앉아서도 이 세상을 다 주름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승려가 안 돼도 말이죠.

그러나 이 스님네들은 여기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마음이 돼 줍니다. 한마음이 돼 준단 말이에요. 단호히 결정을 내렸을 때는 우리의 마음이 두 마음이 아니라 전체를 그냥 다 끌어들여서 한마음이 돼요. 한 기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되려면 스님이 돼서 이 세계를 누비면서 이 마음법을 전파해도 좋지요. 우리 생명의 근본과, 말하고 체험하고 이러는 게 불교니까. 그러니까 풀 한 포기라도 제도하려면 스님이 되고요. 그런데 살림하는 사람들은 풀 한 포기까진 생각을 안 해요. 또 죽은 사람들까지도 생각을 안 하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죠, 살기 바쁘니까.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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