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기행- 간다라 미술의 결정판 고행상

무엇을 위한 고행인가. 스스로 걸어들어 간 고통의 길. 지옥체험과 같은 길, 아니 생애의 막장과 같은 나날들. 처절한 고행의 길이다. 싯달타 태자는 왕궁을 나와 초원을 걸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행색은 초라해졌다. 출가 수행승의 모습은 최악의 행색이었다. 옷조차 풀이나 걸레로 만들어 입었다. 무덤 곁에 버려진 천으로 몸을 감싸기도 했다. 무방비 상태로 무더위와 추위도 견뎌내야 했다.

피골상접한 모습한 고행상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 전해
불교문화권 고행상 부재는
무슨 이유인지 질문 던진다


무엇 때문에 그랬던가.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기 위함이다. 미동도 하지 않는 자세. 깊은 사유의 세계에 들어앉은 선정(禪定)은 소나기가 내려도 움직이지 않게 했다. 심지어 모기가 물어뜯어도 쫓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행, 바로 고행이었다. 먹는 것도 멀리했다. 하루에 과일 한 개 정도. 아니, 팥이나 콩 혹은 쌀이나 보리 한 알씩만 먹었다. 하루에 한 번만 먹다가, 이틀에 한 번, 드디어 보름에 한 번만 먹었다. 몸은 극도로 메말라 갔다.

“살갗은 익지 않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았으며, 수족은 갈대와 같았고, 드러난 갈비뼈는 부서진 헌 집의 서까래와 같았으며, 척추는 대나무 마디와 같았다.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지고,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말라 떨어졌다. 해골이 드러나고, 눈이 깊이 꺼졌으며, 일어서려면 머리를 땅에 박고 넘어졌다. 그러나 오직 눈만은 깊은 우물 속의 별과 같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방광대장엄경〉 中

피골상접, 그 이상 무슨 단어가 필요할까. 몸은 말라비틀어진 오이 같았다.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다. 해골, 바로 앉아 있는 해골 같았다. 고행중의 모습. 정각(正覺) 이전의 처참한 모습이다. 나는 이와 같은 처절한 상태의 ‘붓다’를 보았다. 한마디로 전율의 현장이었다. 세계 도처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런 경험은 없었다. 어디에서 이와 같은 ‘전율’을 얻었는가. 그 감동의 현장은 바로 라호르 뮤지엄이다.

오늘날 파키스탄으로 국명을 내걸고 있지만, 원래 간다라 지역이었다. 라호르 뮤지엄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뮤지엄으로 빅토리아 여왕 통치 50주년 기념으로 건립했다(1894년). 이 미술관은 간다라 전성기의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다. 소장품 200여 점은 간다라 불교미술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2~3세기 무렵의 불상이나 보살상, 그리고 본생담을 담은 부조 작품 등. 라호르 뮤지엄의 소장품 가운데 대표작은 바로 ‘고행상’이다. 아니, 간다라 미술 가운데 최고 절정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고행상 때문에 라호르 뮤지엄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갈 때마다 감동은 재현되었다.

‘간다라 미술의 최고 걸작’이 바로 붓다의 고행상이라는 점, 흥미롭다. 깨달음을 얻기 직전 단식 수행의 모습이다. 이 지역의 시크리 출토품이다. 인도 본토는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보기 어려운 고행상이다. 사실적 표현력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는 걸작이다. 인체를 소재로 한 작품 가운데 이렇듯 처절한 상태를, 그것도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은 많지 않을 듯하다. 한마디로 핍진한 상태, 고행의 참뜻을 듬뿍 담았다. 깨달음의 길로 가는 과정의 고통을 실감나게 전달해 주고 있다. 아, 고행상!

라호르 뮤지엄의 대표 소장품 ‘고행상’.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행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고행상은 원형 두광 아래 정좌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깡마른 몸, 그렇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결가부좌한 정면상이다. 뼈만 남은 팔은 앞으로 모아 선정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깨 역시 메말라 뼈가 들어나 있다. 눈길을 강하게 끄는 것은 앙상하게 들어난 갈비뼈이다. 밭고랑처럼 줄이 간 앞가슴의 깊은 흔적들. 그뿐만이 아니다. 갈비뼈 위에 표현된 힘줄, 대단하다. 앙상한 가죽과 힘줄 그리고 뼈, 이들의 조합은 무슨 해부학 교과서를 보는 것 같다. 이 걸작의 작가는 해부학 관련의 수준 높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정확한 비례와 사실적 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몸의 표현은 그렇다 치자. 정말 눈길을 오랫동안 잡아끄는 곳은 얼굴 표현이다.

갸름하게 마른 얼굴, 오똑 솟은 코와 기다란 귀, 꽉 다문 조그만 입, 그리고 턱수염과 커다란 육계의 헤어 스타일, 너무나 인상적인 모습이다. 얼굴 표현에서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곳은 바로 눈이다. 깊이 패여 동공이 쑥 들어간 것 같은, 계란 같은 모습으로 깊게 함몰된 것 같은, 눈의 의미는 크다. 고행의 끝자락에 몸은 부실해도, 눈만큼은 살아 있다고 했다. 아니, 우물 속의 별과 같이 빛난다고 했다. 살아 있는 눈. 별처럼 빛나는 눈. 비록 몸은 메말라 부서질지라도 눈동자는 살아 빛을 뿜고 있다.

라호르의 고행상은 감동, 바로 그 자체이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간다라 시대의 작가는 어떻게 이와 같은 사실적 표현의 걸작을 만들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해부학적 기초실력은 기본이었고, 예술적 작가기량 역시 기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모델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간다라 시기만 해도 ‘고행상’ 같은 모델 즉 수행승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작가는 고행하는 수행승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고, 또 관찰한 내용을 작품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미술품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고행상은 리얼리즘의 승리와 같은 느낌을 준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왜 고행을 선택했을까. 고행 끝에 얻은 결과, 그것은 고행만이 정답은 아니었다는 것. 붓다는 두 개의 극단을 경계했다.

 “이 세상에는 출가수행자가 받들어서는 안 되는 두 개의 극단이 있다. 그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그 하나는 관능이 이끄는 대로 애욕의 기쁨에 탐닉해 욕망과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찬탄하는 것이며 출가인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익한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괴롭히는 것에 열중해 고행에만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심신이 모두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는 목적과 수단을 전도한 출가자가 하는 것이며 출가인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모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스스로의 이익을 얻지 못하고 남에게도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나는 이 두 가지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찾았다. 이 중도는 모든 것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 수 있는 통찰력과 직관이므로 지혜를 낳아 범부의 눈을 뜨게 하고 이를 통해 중도의 마음의 평화와 진리의 체험과 크나큰 깨달음으로 열반을 성취케 하리라.”  〈불본행집경〉中

금기해야 할 두 개의 극단. 그것은 욕망과 쾌락이고, 육체 학대의 고행이다.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얻어야 한다. 통찰력으로 평화와 진리를 얻어 깨달음의 세계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고행상은 모범답안인가. 고행상은 극단의 한 상징이 아닌가. 결국 고행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고행상의 상징성이나 철학성을 따져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교문화권에서 고행상을 쉽게 볼 수 없을까, 이런 의문을 떨쳐 낼 수 없다. 물론 학자들은 고행상을 간다라 창안의 독자적 사례로 보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도 본토는 물론 중국이나 한국에서 고행상을 보기 어렵다고 결론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왜 한반도에서는 고행상을 볼 수 없을까.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불상들. 여기서 불상이라고 부르는 통칭은 넓은 의미의 불교적 조형물을 의미한다. 물론 불상이라 하면 여래와 보살을 지칭한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불상이라 한다면, 나한이나 사천왕을 비롯한 여러 권속들을 포함한다. 그건 그렇고, 한반도에서는 왜 고행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깨달음 이후의 여래에 집착했을까. 고행의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는 영역인데, 왜 그랬을까. 여래와 보살은 열반의 세계를 넘나드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평화의 세계를 의미한다.

문제는 열반과 거리가 먼 바닥 수준의 존재들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계속 수행해야 하는 어둠 속의 존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통의 존재들. 고통으로 가득 차 있어 아직 인간적 풍모를 잔뜩 지니고 있는 존재들. 왜 이런 단계의 존재들을 형상화하려 하지 않았을까. 고행상이 없는 나라. 한반도에서 고행상을 볼 수 없음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우리 미술의 전통에서 리얼리즘의 부진함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현실의 진솔한 표현은 매우 협소했다. 하기야 현실생활 자체가 고통인데, 굳이 예술작품에서까지 고통의 현장을 담아야 하는가, 이의제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현실’에서 살아간다.

아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 있다. 고해(苦海)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해의 진실된 현장을 충실하게 표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부분에 대하여 소극적 태도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본다. 과연 현실주의 예술의 부재는 한국의 ‘전통’일까. 라호르 뮤지엄에서 나는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고행의 참뜻은 무엇인가. 왜 한반도에는 고행상이 없을까. 고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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