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 요거뿐이지 거기에 또 뭐가 붙습니까?

이어지지 않음이 없이 이어지는 까닭에

네가 있고 내가 있느니라.

이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니라.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해서

질문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종선감』 에 이르기를 선(禪)은 불심(佛心)이라 했고 교(敎)는 불화(佛話)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가섭 존자에게 세 곳에서 전심한 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하는데 첫째, 염화미소(拈華微笑) 둘째, 다자탑 전분반좌(多子塔 前分半座) 셋째는, 곽시쌍부(槨示雙趺)가 있습니다. 한마음 도리에 비추어 가르침을 듣고자 합니다.

답변 첫째, 염화미소라고 하는 것은 네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법을 전하신 겁니다. 그 법이 둘이 아닌 까닭이죠. 둘째, 석존이 가섭에게 반 자리를 내 준 것은 바로 한도량의 한자리다 이겁니다. 반 자리를 내 주신 것도 한자리다 이겁니다. 한자리면서도, 거기 붙어 돌아가는 것은 한자리면서도 “네가 있고 내가 있구나.” 하는 그 도리에서 이 세상만사가 다 거기 붙어 돌아갑니다. 세 번째, 석존께서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보이신 뜻은 바로 한 땅의 한 발이다 이 소립니다. 그 뜻으로 생각한다면 깨달은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도 중생이나 부처가 한마음임을 돌려 깨달으면 이 도리를 알 것입니다.

여러분한테 그것을 가르치려고 방편으로 보여 주신 겁니다. 실지로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조금도 각자 자기를 의심하지 말고 자기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 불성을 믿어라 이겁니다. 자연스럽게 믿어야지 거기다가 뭘 물어보고 자시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그런 걸 원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진실로 믿는다면 하늘이 깨져서 무너진다 하더라도 여여하게,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오늘까지 여여하게 아마 일하러 나갈 겁니다. 요새 외국에 가니깐 이런 소리가 많이 들렸습니다. 지금 지구가 망가질 일이 생기고 뭐, 생명이 다 위태할 일이 생기고 몇 년 후에는 무슨 뭐가 어떻다고 그러던가요? 나 듣고도 잊어버렸죠. 여러분, 말씀해 보세요. 뭐, 종말이 온다고요? 그런데 그것은 여러분이 노예로 사니깐 종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모르고 산다면 종말이지만,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안다면 둘이 아닌 까닭에 종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물이 있다 하더라도, 흙만 있다 하더라도 종말은 아닙니다. 그것도 생각이 없는 게 아니고 생명 없는 게 아니고, 그것도 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 존재가 생명이 없고 불 존재가 생명이 없다면 우리 생명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고 있겠습니까?

지수화풍으로 된 이 몸뚱이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흩어졌으면 우리 인간이 보이지 않겠지만 이게 한데 뭉쳤으니깐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라고 존중한 겁니다. 그런데 그 부처라고 존칭하는 여러분이 지금 지수화풍을 갈래갈래 갈라놓고 먹습니다. 그러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한 치라도 불성이 없다고 하며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까 질문하신 것 가운데 이 세상만사 살림살이가 다 나옵니다. 석존께서 다자탑(多子塔)의 반쪽을 내줘서 같이 앉은 자리라는 그 뜻이 말입니다. “이어지지 않음이 없이 이어지는 까닭에 네가 있고 내가 있느니라. 이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니라.” 하는 그 뜻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공념이 머리에 항상 떠올라요

질문 저는 정신이 안정되지가 않아서 혹 지도를 좀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몇 말씀 드릴까 합니다. 열이 항상 위로 상기되기에 몇 년 전 연초에 침을 맞았다가 역기(逆氣)가 돼 가지고 아직까지도 아주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시력이 차차 떨어지고, 또 집중력과 포착력이 없어지면서 기억력도 없어지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몇 달 전부터 한마음선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계속 큰스님의 가르침 받들어 관(觀)하고 관하고 했는데도 공념이 머리에 항상 떠오르고 이 공념 자체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 관하는 법을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선생님은 항상 주인공 찾기를 이름만 찾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많이 찾고 있어도요, 그 맷돌에 물건을 넣지 않고 굴리는 거와 같죠. 그러니까 이 깊은 마음속에 진짜로 믿는 것은요 잘된다, 낫는다, 못 낫는다 이걸 떠나서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대로 자기 주인공이 자기를 이끌어 가는 겁니다. 자기를 형성시켰고요. 그러니까 진짜로 그냥 죽으나 사나 믿는 거죠. 낫기 위해서 믿는 것도 아니고 잘되기 위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통신이 되질 않죠.

그러니까 진짜 이 콩씨는 콩과 콩싹이 어느 거 하나가 없어도 안 되죠. 콩이 콩싹을 만들지 않으면 콩싹에 콩이 보이지 않고요. 그러니깐 콩싹이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싹이 없죠. 그러니까 둘이 아니에요. 그런데 주인공을 자꾸 둘로 보시고 그저 주인공이 나를 좀 어떻게 해 줬으면 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믿으면 통신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작용이 됩니까? 벌써 이게 통신이 돼야 심성의학이 되죠. 통신이 돼야 대뇌로 해서 중뇌에서 책정을 해서 사대로 통신이 돼야 이게 작용을 해 주게 돼 있습니다. 그만큼 신념이 두텁고, 그만큼 진실하고, 그만큼 믿어야만 되는 거죠.

여러분이 지금 몸을 가지고 움죽거리지만 여러분의 생명의 근본이 없다면 어떻게 움죽거리고 삽니까? 여러분이 그냥 송장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생명의 근본, 영원한 근본을 믿지 않고 자기가 뭐가 되려고만 하니 이게 됩니까? 그러니 되려고 하지 마시고요. 저 나무가 하는 소리가 “뿌리야, 뿌리야. 너 뿌리로 인해서 내가 살고 있는데 네가 네 싹을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려라. 누렇게 지금 떠 있다.” 허허허. “살리려면 살리고 죽이려면 죽여!” 하고 뿌리에게 말을 했더랍니다. 그러니까 뿌리가 하는 소리가 “그래, 나를 너 알고 있었니?” 하면서 “그러면 내 수분과 철분 모든 거를 올려보내마.” 그러니까는 아, 그러냐고 좋아서 하더니만 그렇게 싹이 푸르러지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이게 모두가, 저런 꽃나무고 나무고 식물이 말 안 하는 것 같죠? 말 꼭 합니다. 오히려 진지한 말들을 하죠. 여러분은 쓸데없는 말들을 많이 하시지마는 진지한 말들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꽃이 돼서 꽃 한 송이 줘서 참 마음이 기쁘다면 하(下) 중생들이, 즉 우리가 부처님 믿는 짝이죠. ‘꽃공양을 올려서 내가 인간이 될 수만 있다면….’ 하고 말입니다. 그러고 서로서로 대담을 하면서 서로서로 이 나무에 가서 놀다가 저 나무로 가고, 저 나무에 가서 놀다 이 나무로 가고, 이렇게 서로 연결이 되고요. 이렇게 좋은데 나무들도 때에 따라서는 흙이 가려서, 무명이 가렸다고 하죠. 인간으로선 무명이 가렸다고 하죠. 그런데 나무들로 봐서는 흙이 가린 거죠. 흙이 가려서 자기 뿌리를 자기가 못 봐서 자기 뿌리하고 연관성이 없는 거죠.

그런데 사람도 역시 자기 뿌리를 무명이 가려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모두 이 나무들도 예전에 외국 가면서도 보고 그러면은, 눈이 내리고 바람이 세고 그렇게 해서 그 앙당한 가지들만 남은 나무들을 보면요, 내가 이렇게 빙긋이 웃고 그 나무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 너희들은 참 족하도록 정말 인내가 있구나! 다시 봄이 올 때를 기다리면서 앙당한 가지를 떨며 기다리는 그 인내, 너도 참 아름다웁구나!” 그러면서 히죽이 웃고 돌아서지만 그 차가운 들에 바람은 쌩쌩 불고 옷깃 여밀 것도 없는 그런 앙당한 가지도 ‘그저 내년 봄이 오면은 여밀 옷깃이 생기겠지. 그리고 따뜻한 봄이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기다리는 거 아닙니까.

우리도 역시 일분일초 후도 미래니까 미래로 전진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거짓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죠. 거짓 없이 해야 하지만 이쪽에 가서 이렇게 말하고 저쪽에 가서 저렇게 거짓말을 해서 아주 잘 화합하게 만들어 주는 건 거짓이 아닙니다. 그건 융통성이고 지혜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진실히 믿으시고요. 지금도 얘기했지만 앙당한 가지는 뿌리를 믿고 봄이 올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 거와 같이 선생님도 뿌리를 믿고 기다리시면서 ‘너만이 봄이 오게 할 수 있고, 너만이 푸르르게 살게 할 수 있고, 너만이 이런 질병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거지 딴 사람이 할 수는 없다.’ 하고,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될 것입니다.

 

체가 없는 마음에 어떻게 습이 붙는지

질문 스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찰나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습이 붙을 자리도, 업이 붙을 자리도 없다고 하시고 또 우리 중생은 몇억 겁을 거치면서 습이 쌓이고 쌓여 가지고 그 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다고 그러셨는데 체가 없는 마음에 어떻게 습이 붙어 가지고 이생에 와서 중생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지요. 그것을 잘 모르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또 하나는 큰 깨침을 얻으셨다는 어른들께서도 끝까지 그 습이 남아 가지고 가끔은 부지불식간에 그 습의 행동이 나타나는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는지요.

답변 첫째는, 무조건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하는 거다.’ 하고서 관하는 거고 둘째는, 가정살이 돌아가는 것 전부 ‘그놈이 하는 거니까.’ 하고 관하는 거죠. 그놈이 하는 건데 뭐가 그렇게 답답하고 그렇습니까, 네? 이거 보세요. 내가 말하는 건 잘되고 못되고 그걸 떠나서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답답한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잘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잘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그것이 다 내 속에서 나오는 건데 진짜 우주간 법계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일체제불이 한 골수에 들어서 한자리를 할 수 있다면….” 그 소리 한 겁니다. 내일 죽는다, 이따 죽는다, 우리 식구가 다 멸망한다 이러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결사적인, 나를 버린 그 마음이 정통으로만 들어간다면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뭐가 답답합니까? 그게 다 욕심입니다. 그렇게 생각 안 됩니까?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늠름하게 넘어가면서 진짜 칼을 악으로다 뺄 때는 그냥…. 이거 보세요. 악으로 사는 사람은 진짜 칼을 썩 뺐을 때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됩니다. 그러나 살리는 칼을 썩 뺐을 때는 수많은 중생들을 다 살릴 수 있고 한 나라를 세울 수가 있고, 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전체를 다 한 칼로다가 부릴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답답합니까? 내일 죽으면 어떻고 이따 죽으면 어떻고 식구가 다 죽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안 그렇습니까?

아니, 내가 그 말을 하는데 너무 잔인하고 너무 안됐다고 생각합니까? 아휴 참! 이 세상 이 길, 그냥 걸을 뿐이에요. 우리가 그냥 살 뿐이에요. 왜 사나? 내가 어디서부터 이렇게 와 가지고 지금 무엇을 하고 가는지 알아야 답답하지 않다 이 소립니다. 야! 이거 뭐, 캠핑 와서 잠시 있는데, 내가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 우주간 법계에 다 통신이 되는구나. 이럴지언대 내가 뭘 그렇게 걱정하랴.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요. 소 한 마리를 잡는다 해도 걱정이 없고, 소 한 마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고, 이 세상이 다 없어진대도 걱정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릴 수가 있는 거지, 아니, 그놈의 거 하나하나 걱정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건지고 살릴 수 있습니까? 가정도 그래요. 이판사판이에요. 허허허. 두 가지뿐이야. 죽느냐 사느냐 요거뿐이지 거기에 또 뭐가 붙습니까?

어떤 스님이 날더러 이렇게 말하더군요. “스님, 이 토굴의 문에 못 좀 박아 주십시오.” 그러니까, 난 그런 것도 모르고요, 생각을 안 했으니까 “못 좀 박아 주십시오.” 그래서 “못은 왜?” 그러니까 “들어간 뒤에 바깥에서 못을 박아서 못 나오면, 죽지 않으면 얻을 거 아닙니까? 죽지 않으면 얻고 얻지 못하면 죽고, 이거 둘뿐 아닙니까?” 이거야.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면요, 정말 아주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고 너그럽게 두루 할 수 있고, 항상 싱그레 웃고, 남이 갓 미쳤다고 할 정도로 싱그레 웃고 길을 지나갈 수 있고, 소 둥구리를 봐도 싱그레 웃을 수 있어요. ‘저거 가엾다, 저거 죽으러 가지.’ 뭐, 이런 생각조차 없습니다. 왜? 아주 곧바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소 만 마리를, 아니 어떤 거든지 만 마리가 모두 죽었다 그럴 때 그것을 빗물 방울로 친다면 한 골짜기에 다 모였다 해도 한 골짜기에서 한 바다로 들어가는 물일 뿐이지, 한 그릇이지 그게 두 그릇입니까?

여러분의 그 마음은 체가 없고 무량해. 그래서 무량심이에요. 일심(一心)이자 무량심이고 무량심이자 그 묘법이라. 무심도법(無心道法)은 그렇게 무량해서, 지금 수만 마리가 죽으러 간다 하는데 불쌍해서 염불을 해 주고 그런다면 그건 벌써 공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수십, 수백 마리가 죽으러 가는데 무슨 염불이 필요합니까? 염불하다 보면 벌써 다 늦는데, 하하하. 그러니까 그 순간에 그냥 모조리 이 한 그릇 자기 마음에다 탁, 거기다가 만 마리고 천 마리고 넣으면 그냥 자기 한 그릇이 돼 버리고 말아요, 네? 그러니 그대로 그냥 인간으로 환토가 되는 거죠. 자기가 돼 버리는 거죠. 그렇게 자기만 만들어 놓는다면 자동적으로 그냥 나가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돼도 그냥 아무렇게나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속을 거쳐서 나가는 인간은 나와서도 정말 사람 노릇을 하고 이 세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지략과 아량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해서

질문 저는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제가 선원에 나온 지는 한 오 년이 지났는데 어떠한 일에 대해 매일같이 관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아주 한 번에 맡기고 관하고 놓고 잊어버렸습니다. 아주 일 년 치 이 년 치를 한꺼번에 관한 셈이죠. 그래도 역시 그대롭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고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순리를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어찌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 바라고 입만 벌리고 있겠습니까? 한마음 내 주십시오.

답변 과거 미래 현재를 같이 붙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금 하루 24시간을 살아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과거까지 붙들고 미래까지 붙들고 현재까지 붙들고 관을 합니까? 지금 현재에 닥치는 대로 마다하지 말고 관하고, 가는 거 잡지 말고 관하라는 거죠. 뒷발자취 얘기를 자주 하지만, 과거는 이미 가 버린 겁니다. 그리고 걸어가지 않았으니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요. 현재는 그냥 걷고 있는 대로 찰나찰나 화(化)해서 나투면서 돌아가니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어느 떡 파는 노파가 덕산 스님에게 과거심(過去心), 미래심(未來心), 현재심(現在心) 어떠한 마음에서 떡을 먹으려느냐고 물었다죠? 그런데 과거심도 아니요, 미래심도 아닙니다. 현재심에 점심을 먹은 거죠. 그러니까 점심이라는 그 뜻은 그냥 점심밥 먹듯 먹는 점심이 아니라 (법상을 두세 번 가볍게 쳐 보이시면서) 점! 점심입니다. 점을 찍었다는 얘기죠. 그래서 그냥 그 마음에서 떡을 먹겠다 이런 것은, 떡이라는 건 언제나 둥근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점심에 떡을 먹겠다' 이런 거는 우주 전체를, 삼세계(三世界)의 삼천대천세계를 다 그냥 집어먹겠다 하는 소리나 똑같습니다. 그걸로 그렇게 표현을 한 거죠. 어떠한 마음에서 떡을 먹겠느냐 했는데 그거를 맞추지 못해서 또 물으러 갔죠. 금강경을 잔뜩 짊어지고요. 길게 말하기가 싫어서 지금 이럽니다. 그러니까 그 글자라는 거는 이론적으로 말만 했지 법이 적용이 되질 않습니다.

나는 어떤 때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제가 어릴 때는 식구들이 전부 뿔뿔이 헤어져서 남의 집으로 전전긍긍했기 때문에 학교 공부를 못 했습니다. 여러분처럼 부모가 자식을 공부시키면서 호화롭진 못하나마 밥이라도 먹고 공부라도 시킬 정도로 이렇게 자랐다면은 모르겠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남의 집 일하러 돌다 보니 일자무식이었습니다. 그래도 내 주인 자체, 이 껍데기 아닌 내가 있었기 때문에 이만치 살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삼세(三世)를 같이 쥐고 그렇게 쩔쩔매지 마시고요, 그냥 일심(一心)으로서, 일심도 공(空)해서 찰나찰나 닥치는 대로 놔 버리시고 가세요. 그래야 가볍습니다.

 

현재심으로 가득 차 공한 까닭이니라

질문 금강경의 사구게 중의 삼세심 불가득을 대행 큰스님께서는 “과거심도 현재심, 미래심도 현재심, 현재심도 현재심으로 가득 차 공한 까닭이니라.”라고 뜻풀이를 하셨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그러니까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금강경이나 그런 경들은 전부 무의 법을 말했어요. 무의 법에서 말하고 유의 법에서 말하고 한데 합쳐서 현실로 내놓은 것이 법화경이에요. 또 금강경이나 화엄경을 종합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반야심경입니다. 글자 수는 적지만 편집할 때 딱 간추려서 해 놓은 거죠, 중요한 것만. 그러니까 반야심경을 읽을 때에도 뜻을 잘 알고 보면 거기에는 금강경도 들어 있고 법화경도 들어 있고 화엄경도 들어 있고 다 들어 있어요. 또 아까 천수경을 뜻으로, 우리말로 풀어 놓은 거를 읽었죠? 그것이 전부 설법입니다.

그러니 ‘나를 깨닫게 해 주소서.’ 하는 것도 바깥으로 하지 마세요. 바깥에 누가 있습니까? 그 자리는 천(天)·지(地)·인(人)하고 연결돼 있으니깐요. 천·지·인이 따로 있다고 보지 마세요. 전부 한데 있죠. 그것에서 알게 되면은 대천세계(大千世界)를 알게 됩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대천 연화장불(大千蓮華藏佛)과 연결돼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다 벗어나게 되면은 여러분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일을 해도 되고, 미래로 돌아가서 일을 해도 되고 이렇게 삼세(三世)를 굴릴 수 있다 이런 겁니다. 여러분, 그걸 거짓말로 알지 마세요.

만약에 여러분이 “아휴, 스님! 이런 게 이렇게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은 어떤 때는 과거로 돌아가야 되거든요. 삼 년 과거로 돌아가는 수도 있고, 삼십, 삼백 년 과거로 돌아가는 수도 있어요. 그런데 과거는 수명이 길고 현실은 수명이 짧습니다. 과거는 오백 년이라고 해도 되고 십만 년이라고 해도 되지만, 오백 년이다 하면 여기는 한 달도 될 수 있고 일 년도 될 수 있어요. 보통 수명이 일 년이다 하면은 과거는 오백 년이라고 해도 되죠. 또 거기서 일 년이다 하면은 여기는 하루밖에 안 돼요. 또 하루라 하면 여긴 한 찰나밖에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한 찰나도 한 찰나가 없으니까 한 찰나라는 건 아예 그냥 없는 거를 말하고, 없기 때문에 한 찰나다 이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걸음 떼어놓으시는 데 한 찰나에 떼어놓으시죠?

그래서 과거도 떼어놓은 발자취는 이미 지나갔으니 없고, 미래도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다고 하는 겁니다. 공부 시작하는 분들한테 그렇게 말을 해 드립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현실도 없다 하는 것은, 이 공부는 과거고 현실이고 미래고 마음대로 운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없다고 그랬습니다. 삼세심(三世心)이 일심(一心)이요, 일심이 삼세심이니라. 그래서 사천세계(四千世界)가 바로 원심(圓心)이야, 원심! (주먹을 쥐어 보이시고) 그래 그것을 다 포용하면은 원심력을 얻어서 전체 구정토를 왕래하고, 그 별성과 더불어 같이 운행하고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그러한 위치가 되면은 바로 그것을 불(佛)이라고 해도 좋고 자유인이라고 해도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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