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 오스틴이 쓴 장편소설 〈오만과 편견〉은 세계적인 고전으로, 사회 계급에 대한 차별과 이를 극복하는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오만(傲慢)이 건방지고 거만한 행동을 말한다면 편견(偏見)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특정 인종이나 계급, 직업군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각입니다.

중국이 개항한 후 서방 열강이 사실상 상하이를 점령했는데, 당시 영국 영사관 앞에 만들어진 공원 입구에는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구는 당시 반포된 공고의 후속조치인데, 백인을 모시는 중국 하인은 예외로 규정했다는군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우화
편견·오만 경책하는 메시지
正見하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그런데 얼마 전 서울 이태원의 유명 식당에서 특정 국가 국민들의 출입을 금지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 식당 입구를 관리하던 보안요원들은 인도·파키스탄·카자흐스탄·사우디아라비아·몽골·이집트 사람의 입장을 제한했다고 하는데, 인종에 대한 편견이 낳은 부끄러운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 하겠습니다.

편견은 중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번뇌의 한 종류입니다. 특정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다보면 그 집단이나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편견을 인식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찌 보면 부처님의 수많은 가르침들은 모두 편견을 깨고, 정견의 눈을 뜨게 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우화입니다.

장님과 코끼리
옛날 어느 한 나라 왕이 칙명을 내려 나라 안의 모든 장님을 모이게 했습니다. 수많은 장님이 모이자 왕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코끼리의 생김새를 아느냐?” 여러 장님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코끼리의 생김새를 알지 못합니다.”

왕은 다시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코끼리를 모른다니, 지금이라도 코끼리의 형상이 어떠한지 알고 싶지 않느냐?”

여러 장님들은 다 같이 대답했습니다. “왕의 은혜로 코끼리의 생김새를 알 수 있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왕은 코끼리 조련사를 시켜서 우리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몰고 오게 했습니다. 조련사는 여러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만져보게 한 뒤에 왕에게 사실대로 아뢰게 했습니다. 장님들은 한동안 제각기 코끼리의 이곳저곳을 만졌습니다.

잠시 뒤 왕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코끼리의 생김새를 알았느냐?”

장님들은 차례대로 코끼리의 생김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코를 만져 본 이는 왕에게 코끼리의 모양은 마치 동아줄 같다고 말했고, 어금니를 만져 본 이는 코끼리의 모양이 말뚝 같다고 말했으며, 귀를 만져 본 이는 코끼리의 모양이 곡식을 고르는 키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 머리를 만져 본 이는 코끼리가 항아리 같다고 말했고, 목을 만져 본 이는 코끼리의 모양이 집의 대들보 같다고 말했고, 등을 만져 본 이는 코끼리가 용마루와 같다고도 했습니다. 갈비를 만져 본 이는 코끼리의 모양이 대자리 같다고 했고, 넓적다리를 만져 본 이는 코끼리의 모양이 절구 같다고, 꼬리를 만져 본 이는 코끼리가 빗자루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장님들은 각자 자신들이 만져본 게 옳다고 주장하며 말씨름했고, 상대를 헐뜯으며 다투었습니다. 왕은 장님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했습니다.
-〈세기경용조품(世紀經龍鳥品)〉 중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장님들이 말한 이 모든 것이 코끼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온전한 대답도 아니듯이, 너희들의 이야기도 불법(佛法)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한 대답이라 할 수는 없다”며 진리에 대해 함부로 속단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셨습니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군맹무상(群盲撫象)’ 이야기는 자신이 아는 조그만 부분을 가지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냥 고집하는 좁은 소견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꾸짖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불법이다’, ‘저것이 불법이다’는 식의 논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코끼리를 더듬은 장님의 평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또 무언가를 조금 안다고 마치 그것이 전부를 아는 냥 착각하고 자만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해 〈법구경〉에서는 ‘장님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체하며 교만하게 굴면 마치 장님이 촛불을 잡고 주변을 비추지만 정작 자신은 밝히지 못하는 것과 같음을 비유합니다.

정견(正見)과 부정견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견(正見)의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정견은 팔정도의 하나로 ‘바른 견해’라고 해석하는데, 모든 현상이 생하고 멸하는 우주의 법칙[緣起]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에 대한 지혜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성제는 사랑과 우정을 주제로 한 지난 5회분 원고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시 정의하면 고(苦)는 괴로움(생·노·병·사·원증회고·애별리고·구부득고·오온성고)이며, 집(集)은 괴로움의 원인을 성찰하는 일입니다. 멸(滅)은 고통 없는 해탈이며, 도(道)는 니르바나로 가는 길(八正道-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말합니다. 이 사성제를 직시하면 세상의 편견을 깨고 정견의 지혜를 갖출 수 있습니다.

정견의 반대는 부정견인데, 편견도 부정견(不正見)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에 어긋나는 잘못된 견해’라는 뜻의 부정견은 악견(惡見)과 같은 말로 ‘잘못된 견해’ 또는 ‘삿된 견해’라는 뜻의 사견(邪見)과도 같은 뜻입니다.

수행자가 부정견에 유의해야 한다면, 중생들은 편견을 조심해야 합니다. 편견은 나쁜 행위를 하게 만들어 악업(惡業)을 짓게 합니다. 하지만 부처가 아닌 중생이 항상 바른 견해를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 편견의 벽을 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면서 ‘지금의 생각이 편견(부정견)은 아닌가?’하는 의문과 점검을 습관화해나간다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세상이 만들어지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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