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

신지견 지음|새움 펴냄|1만 3천원

선시와 선문답, 첨단 물리학을 동원한 재해석

서산의 속내를 꿰뚫는 소설가의 유려한 해설

경계 없는 상상과 투철한 문헌 고증 ‘돋보여’

 

세상에는 마음을 적시는 아포리즘(aphorism)이 허다하다. 말하는 이의 체험이 깊을수록 아포리즘은 간결해지고, 보는 이들은 강력하게 감화된다. 그런데 체험의 깊이를 말할 때, 2500년 불교의 선적(禪的) 경지를 빼놓을 수 없다. 몰아(沒我)와 망언(忘言)의 경지서 나온, 일상의 언어를 훌쩍 뛰어넘은 언설(言說)들, 절제된 그러나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말, 말, 말…. 어쩌면 불합리한 일이지만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틈을 비집고 나온 선적(禪的) 언어들은 세월을 넘어 쌓이고 쌓이면서, 생소한 경지를 열어젖힌다.

깊은 숲, 고적한 산사(山寺)로부터 발원한 그 선적 언어들 가운데 주옥이라 할 82개 문장을, 멀리 조선 중기의 선사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이 뽑았다. 82개의 원문에 시(송)와 산문(주해·평)으로 해설을 달았고, 그게 선사들이 애독, 애송하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이다. 평안도 묘향산에 오래 기거해 서산(西山)으로도 불리는 휴정은 유·불·선에 능하고, 선(禪)과 교(敎)에 두루 능통한 이였다. 그는 또 어떤 말이 사람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지 잘 아는, 텍스트에 대한 예민한 감식가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축적된 팔만 경전의 바다에서 그가 건져 올린 원문들, 그리고 그가 시와 산문으로 붙인 해설이 현대인의 마음까지 관통하는 궁극의 아포리즘이 되는 이유이다.

〈선가귀감〉 번역은 처음이 아니다. 고전인 만큼 스님들과 불교 연구자들의 번역이 제법 여럿이다. 그러나 이번 〈선가귀감〉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번역과 차별화된다. 선(禪)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소설가가 원전의 묘미를 살리는 한편으로, 서산의 속마음을 꿰뚫는 유려한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역해자인 신지견은 대하소설 〈천년의 전쟁〉 작가다. 현재 1, 2권이 나온 〈천년의 전쟁〉은 서산의 사유와 깨달음 그리고 행적을 대담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집필을 위해 〈전등록〉과 〈선문염송〉 등 선불교의 경전을 헤맸으며, 조선 선승들의 발걸음을 좇아 전국의 산하를 유랑하듯 답사했다. 불교계는 이 소설이 나오자 “선불교의 역사적 흐름을 그 어떤 불교 이론서보다 심도 있게 그려냈다”고 평했다. 서산과 〈선가귀감〉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통찰을 가진 작가의 번역과 해설인 것이다.

첨단 물리학과 심리학에 대한 역해자의 식견도 괄목할 만하다. 새롭게 번역, 해설된 〈선가귀감〉을 통해 역해자는 아인슈타인, 융 등 걸출한 현대 학자들의 견해를 녹여냈다. 동서와 고금을 넘나드는 해설을 통해 깊은 산속의 경전인 〈선가귀감〉은 현대인의 마음속을 종횡무진할 동력을 얻는다.

〈선가귀감〉을 관통하는 사유는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서산은 또 “말없이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이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이 교”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선가귀감〉 후반부에는 임제종·조동종·운문종·위앙종·법안종 등 선종 각 종파의 법맥과 가풍이 일목요연히 정리돼 있다. 〈선가귀감〉은 이처럼 불교의 핵심을 찌르는 특유의 간략과 압축으로 오랫동안 선 수행의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역해자의 경계 없는 상상과 투철한 문헌 고증은 〈선가귀감〉의 그 같은 본령을 더욱 확실히 부각시킨다. 생소할 수도 있는 불교적 언어를, 현대인들이 쓰는 일상의 언어로 전달해준다. 역해자 신지견은 “번역과 해설 모두 교과서적인 것보다는 쉽게 읽히는 내용으로 바꾸어보려 했다”며 “그 방향이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내용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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