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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 ‘절’ 그리고 그림 속에서 ‘나’ 버려김영택 펜화가 (72ㆍ한국펜화가협회 회장)
김영택 화백은 불교건축물을 그리면서 인간 김영택의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수십만번 정교하게 그려야 완성되는 그의 그림처럼 오계를 지키고자하는 불자로서의 마음가짐도 철저해진 것이다. 타이트하게 올려진 타이슬링 만큼 펜화와 불자로서의 삶에대한 그의 완고한 철학이 느껴진다.

어린시절 지폐도 그린 손재주

유럽여행서 본 펜화에 매료

50때 디자이너 접고 펜화가 전향

20년 독학으로 새로운 펜화 개척

독보적인 ‘김영택 원근법’ 개발

 

전국 돌며 불교건축 화폭에 담아

20여 년 동안 총 300여 점 그려

150여 점이 불교건축물

〈펜화로 읽는 한국문화유산〉 출간

“우리 건축 아름다움 알릴 것”

 

그림 한 장 한 장이 또 하나의 문화유산

50만 번의 손이 가야 완성되는 그림이 있다. 마치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그림은 붓 대신 0.1mm 내외의 가는 펜촉과 먹물만으로 그린 ‘펜화’다. 세밀한 펜촉의 한 획 한 획으로 그린 그림이다. 디지털 화상이 구현하는 ‘화소’와는 또 다른, 인간의 ‘화소’가 그린 그림이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300여 점. 한국 펜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불교건축물을 비롯한 한국 전통건축물과 세계 건축물의 아름다움까지 펜화를 통해 알리고 있는 김영택 화백이 그 주인공이다.

 

새로운 미술을 열다

봉암사 일주문, 통도사 금강계단, 부석사 무량수전…. 천년 고찰들이 한 폭의 수묵화로 갤러리 벽을 채우고 있다. 먹물로만 그렸으니 분명 수묵화일 것이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수묵화와는 다른 수묵화다. 붓 대신 펜촉으로 그린 펜화다.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먹물펜의 굵고 가는 선과 사진의 망점처럼 점에 가까운 선과 선들이 모여 법당의 기와를 그려내고 처마의 공포와 일주문, 마당의 석탑을 그려낸다. 천년 절집과 정자, 서원 등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이 흑백의 펜 끝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2004년 6월 인사동 학고재 갤러리. 김영택의 펜화 초대전이 열렸다. 펜화 자체가 드문 전시였으며, 김 화백의 첫 전시였다. 전 작품 매진, 도록 556권 매진, 엽서와 포스터까지 매진. 김영택의 첫 전시는 한국 화랑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쏟아냈다. 내로라하는 작가도 전시에서 그림 한 장 팔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여전히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김영택의 그림 100여 점은 모두 팔렸다. 김영택의 펜화는 그렇게 미술의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다. 김 화백이 펜화를 시작한 지 10년 만이었다.

 

김영택 화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를 졸업했다. 1972년부터 제일기획, 대한항공, 나라기획 등 광고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쳐 1977년 종합 디자인 회사인 홍인디자인그룹을 설립했다. 세종대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1993년 국제상표센터가 선정하는 ‘디자인 엠배서더’에 선정됐다. 이후 펜화가로 전향하여 20년 넘게 펜화를 그리고 있다. 총 300여 점의 작품을 그렸으며 10여 회의 초대전을 열었다. 저서로는 〈펜화로 읽는 한국 문화유산〉,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 등이 있다.

지폐도 ‘그림’이었던 아이

김 화백은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였다. 미술을 좋아했던 김 화백이었으나 다른 미술학도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평범한 그림 보다는 세밀하게 그려야 하는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생이던 김 화백은 어느 날, 펜과 잉크 그리고 물감으로 지폐 한 장을 완성했다. 뒷면이 없는 지폐였지만 주변 사람들은 김 화백이 그린 지폐에 깜빡 속았다. 그 일로 김 화백은 부친으로부터 엄한 꾸중을 듣기까지 했다. 하지만 중학생 김영택이 그린 지폐는 돈이 아니었다. ‘그림’이었다. 그는 그렇게 깊이 관찰하고 세밀하게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아마도 전생부터 이어진 것 아닌가 싶어요.(웃음) 지나온 생 어딘가에 지금의 김영택이 이미 있었고, 그 때 이루지 못한 것을 여러 생에 걸쳐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20년 넘게 펜화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종종 했죠.”

김 화백은 한 획 한 획 사경하듯 화폭에 선을 그려 넣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렇다. 김 화백의 그림 한 점이 완성되기까지는 평균 50만 개의 선을 그려야 한다. 그것도 돋보기를 놓고 보아야 할 정도로 작고 섬세한 선들을 그려야 한다.

변상도를 그려내는 사경과 다를 바 없다. 적게 걸려도 꼬박 보름 낮밤으로 그려야 한다. 답사하고 조사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더하면 많게는 6개월도 걸린다. 정성과 끈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을 힘들어 하지 않고 20년 넘게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할만도 하다. 숙연과 숙업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폐도 그림으로 보았던 아이. 그 아이는 훗날 한국 펜화의 명인이 된다.

 

펜화를 만나다

홍익대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한 김 화백은 1972년부터 제일기획, 대한항공, 나라기획 등 광고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쳐 1977년 종합 디자인 회사인 홍인디자인그룹을 설립한다. 17년 간 국내 40여 기업의 CIP 시스템을 개발했다.

김 화백은 제품 디자인을 비롯하여 건축디자인 분야에서까지 명성을 얻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가 된다. 김 화백은 1993년 ITC(국제상표센터)에서 선정한 ‘디자인 엠배서더’에 선정된다. 전 세계 유명 디자이너 54명이 선정되었는데, 한국인으로서는 김영택 화백이 유일했다. 그렇게 김 화백은 디자이너로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디자인 엠배서더로 선정된 김 화백은 1994년 벨기에 오스탕드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 로고 디자인 비엔날레’에 초대를 받는다. 비엔날레에 참석하기 위해 들렀던 프랑스에서 김 화백은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펜화를 만난 것이다. 루브르박물관과 세느강가 고서점에서 보게 된 펜화에 김 화백은 완전히 매료됐다.

“그 때 결심했죠.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았던 거죠.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문화재를 펜화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화백의 나이 50이었다. 잘 나가던 디자이너 김영택은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접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걷기로 결심한다.

 

5계 지키는 생활로 신행생활

50만 번 선 그려야 그림 한 점

“그림 그리다보면 ‘나’ 없어져”

무색무취, 무아 화법으로 수행

“전생에 통도사 화승이었을 것”

 

“디자이너로서 절정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나의 것이 없었어요. 나의 세계가 없었어요. 그 때 펜화를 만난 거죠.”

펜화로 전환한 김 화백은 펜화가로서도 세계에 우뚝 서고 싶었다. 유럽의 펜화를 넘어서고 싶었다. 하지만 스승이 없었다. 김 화백은 스스로 기법을 만들었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도구와 재료를 구했다. 김 화백은 디자인 회사를 부업처럼 경영하며 주말이 되면 배낭을 메고 전국의 건축문화재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주말 이틀 동안 현장에서 작품 한 점을 완성하고 저녁차로 올라오곤 했다. 김 화백은 점점 펜화에 빠져들었고,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는 수렁으로 빠져갔다. 경영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고 채권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훗날 생각해보니 그 어려웠던 시절이 펜화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아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깊은 산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어요.”

 

연세대에서 강연하는 김화백의 모습.

“당신은 전생에 불모(佛母)”

2002년, 김 화백이 펜화를 시작한 지도 벌써 7년이 되었을 때였다. 여전히 김 화백은 전국을 돌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양산 통도사에 들렀을 때였다.

통도사를 둘러본 김 화백은 통도사를 전부 그리고 싶어졌다. 뜻이 있으면 길도 있었다. 김 화백의 그림으로 통도사 캘린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날부터 김 화백은 1년 반을 통도사에서 살게 된다.

“저녁 때 범종소리와 법고 소리가 들려오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코끝이 뜨거워졌어요. 종소리와 북소리를 기억하며 이튿날 아침 그림을 그렸어요.”

2003년 통도사 캘린더는 그렇게 김 화백의 펜화로 만들어졌다. 캘린더는 그야말로 ‘히트’였다. 여기저기서 캘린더를 더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통도사는 다음 해 캘린더도 김 화백에게 맡겼다. 다음 캘린더의 그림은 영산전 팔상도였다.

“영산전 팔상도를 보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대중 스님 한 분이 오셔서 팔상도를 가리키며 ‘그거 당신이 그렸던 거요.’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스님의 말씀으로는 제가 전생에 통도사 화승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팔상도를 제가 그렸다는 겁니다.”

통도사 영산전의 팔상도는 1775년 유성 스님의 그렸다. 유성 스님은 조선 3대 불모 중의 한 분이다. 스님의 말대로라면 김 화백은 전생에 유성 스님이었던 것이다. 스님의 이야기가 어떤 근거에서 왔는지,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앞서 김 화백이 말했던 전생의 근거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김 화백은 통도사에 머물면서, 통도사를 그리면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저의 그림은 통도사 이전 그림과 이후의 그림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통도사를 그리면서 기법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죠. 발전한 거죠. 통도사 그림부터 저의 그림은 훨씬 세밀해집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화백은 현장에서만 그림을 그렸다. 해가 지면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절집의 저녁은 일찍 시작되었고, 김 화백은 밤엔 할 일이 없었다. 김 화백은 그 시간이 아까웠다. 밤에도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김 화백은 다음 날부터 그려야 할 대상을 사진으로 찍고 그 사진을 보면서 밤에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영택의 펜화는 이때부터 많은 변화를 하게 된다. 작업의 시간이 늘어남으로 해서 그림이 더 세밀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그림은 더욱 깊어졌으며, 실내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림의 크기가 커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잉크 대신 변하지 않는 먹물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펜화가 김영택이라는 이름을 불가(佛家)에 알린 것이다. 그렇게 불가에 이름을 적게 된 김 화백은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김영택으로서도 많은 변화를 하게 된다. 아니 변화라기보다는 다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때까지의 생활도 그랬으나 김 화백은 좀 더 빳빳한 생활을 하기로 새롭게 다짐한다. 전생의 이야기도 그렇고 절에 살면서 삶에 대한 생각을 더욱 진지하게 된 것이다. 김 화백은 지금도 오계를 철저히 지키며 살기 위해 노력한다.

“오계만 지키고 살아도 훌륭한 삶입니다. 하지만 오계만 지키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죠.”

 

김화백의 작품은 국빈 선물로도 사용됐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사진 왼쪽)이 펑리위안 여사에게 김화백의 작품을 전달하고 있다.

무색무취, 무아의 화법은 수행

김영택 펜화의 반향은 ‘센세이션’이었다. 그리고 현재 진행형이다. 6개월에 걸쳐 완성한 황룡사구층대탑을 보면 입을 다물 수 없다. 30배 확대경 없이는 그릴 수 없는 0.03mm의 선들로 그려진 황룡사구층목탑은 그 옛날 지폐를 그림으로 그렸던 아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아이는 이제 펜으로 절을 짓고 궁을 짓고 정자를 짓는다. 김영택, 그가 생각하는 그림이란 어떤 것일까.

“내 자신이 무색무취일 때 진정 다른 사물의 본래 모습을 화폭에 담을 수 있죠. 김영택이 바라본 사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죠. 김영택이라는 ‘나’를 철저히 버려야 가능한 일이죠.”

그런 김영택의 그림에는 김영택만의 화법이 있다. ‘김영택 원근법’이 그것이다.

“펜화를 그리면서 사진이나 서양화의 원근법과 인간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인간의 시각 특성에 맞추어 김영택만의 도법을 만들었죠.”

김영택 원근법을 볼 수 있는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은 ‘해남 미황사’다. 대웅전의 배경인 달마산을 15%쯤 확대하고, 달마산의 특징인 입석들을 강조했다.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현장에서 받았던 감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외에도 금강산 신계사, 진천 보탑사 등 많은 작품이 김영택 원근법에 의해 그려졌다.

김 화백은 서구에서도 맥이 끊긴 펜화의 전통을 한국적 펜화로 재창조했다. 그림 한 장을 그리기 위해 50만 번에서 70만 번의 선을 그린다. 1mm 안에 5번의 선을 그리는 극도의 세밀함이 요구되는 그림이다. 가는 펜으로 정성스럽게 그려낸 그의 그림은 사진처럼 정교하면서도 그림이 지닌 미학의 차원을 새롭게 끌어올렸다. 그렇게 정성과 끈기로 그려야 하는 작업을 김 화백이 쉼 없이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림 그리는 일 자체를 신행이고 수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보다 더 좋은 수행이 어디 있을까요. 대웅전의 기와와 꽃살문, 마당의 석탑, 공포의 단청, 처마 끝의 풍경. 그 셀 수 없는 선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리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없어지죠. 수행이 따로 없죠.”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 알리고 싶어”

“저의 펜화를 통해 우리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김 화백은 얼마 전 〈펜화로 읽는 한국문화유산〉을 출간했다. 그가 20년 넘게 전국을 돌며 그려온 그림 중 96점을 담았다. 모두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그린 그림들이다. 김 화백의 서원처럼 흑백의 펜화는 사진이나 다른 그림에서 느낄 수 없는 느낌으로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김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소실되고 퇴색된 부분을 자료를 통해 복원해서 그림을 완성한다. 이런 부분이 사진이나 다른 그림에서 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김영택의 그림 한 장 한 장은 문화유산을 기록한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김 화백은 3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 중 150여 점이 불교건축물이다. 김 화백의 그림을 보면 우선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 마음이 끌린다. 그 수고와 결실에 마음이 출렁인다. 다시 세운 황룡사구층대탑, 1920년대 쌍봉사, 한국 건축의 백미 부석사 무량수전, 우리 불교의 소중한 유산을 정성스럽게 그려낸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법당의 기와 한 장이 소중한 불사인 것을 생각한다면 김 화백이 그린 그 셀 수 없는 기와들을 무어라 해야 할까. 김 화백은 통도사 스님으로부터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자신이 불모였음을 믿기로 했다고 한다. 전생에 못 다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오늘도 화가 김영택은 산사로 향한다.

 

김영택 펜화가의 대표작들

① 금강산 보덕암
② 달마산 미황사
③ 불국사 다보탑(난간복원)
④ 통도사 대웅전

 

박도일 수필가  noduc@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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