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혜란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불교평론 열린논단… 무종교 시대 오는가

개인 종교성 재구성될 뿐
무종교 시대 되진 않았다
불교인구 확대 위해서는
경직된 공동체 변화 필요

이른바 ‘탈종교화 시대’다. 제도권 종교들은 신자 수 감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불교계는 통계청 인구센서스에서 10년 전보다 약 300만 명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 쇄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에 계간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5월 18일 개최한 열린논단서 ‘무종교 시대는 오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발표한 우혜란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의 글의 일부를 정리해 싣는다. 정리=윤호섭 기자

우혜란 연구원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석사)와 독일 마부르그 필립스 대학교 종교학과(박사)를 졸업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동시대 종교현상으로서 유동적 종교(Fluid Religion)에 대한 논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종교현상’ ‘New Age in South Korea’ ‘젠더화된 카리스마’ ‘현 한국사회에서 합동천도재의 복합적 기능에 대하여’ 등이 있고, 공저로 〈종교, 미디어, 감각〉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사회의 종교를 묻는다〉 〈Religion in Focus〉가 있다.

제도종교가 처한 위기
“종교가 없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자신을 표현하는 한국의 소위 ‘무종교인들(religious nones)’은 다양한 종교적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조직에 속하지 않는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들, 중충적(multiple) 신앙을 가진 사람들, 종교적 소극주의자,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등.

이들의 공통점은 특정 종교조직에 속하지 않으며, 특정 종교 의례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조직 가입여부나 의례의 빈도수와 같은 단순 지표로 이들은 하나의 범주로 묶고, 이들을 비/반종교적이라고 쉽게 판단내리는 것은 인간의 복합적인 종교성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와 한국의 조사결과는 이들의 상당수가 ‘종교적’ 관심사를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동시대인들은 종교의 권위적/위계질서적인 조직이나 절대적인 교리의 가르침을 벗어나 보다 개인적이고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삶을 영위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무엇보다 동시대 종교지형의 특징은 ‘종교인’과 ‘무/비종교인’으로 단순하게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한쪽에 특정 제도종교에 속하고 충실하게 주어진 종교적 의무를 실천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제도종교는 물론이고 초자연적 세계관 일체를 거부하는 집단이 있으며, 이 둘 사이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다양한 종교적인 색채의 개개인들로 구성된 거대한 중간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종교가 사라지는 소위 ‘무종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사회적 형태와 개인의 종교성/영성이 다양한 방법으로 재구성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무종교’라는 말은 작금에 흔히 회자되는 ‘무종교인’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부터 출발한 것처럼 보이며, 이는 실체를 결여한 공허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무종교’가 ‘종교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믿음, 신념과 같이 미래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이미 오랜 기간 관찰되었던 것과 같이 제도화된 종교는 무엇보다 급격한 신도 감소로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다시 말해, ‘종교’는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제도종교는 적어도 서구 일부 국가에서는 현재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점점 더 비제도화된 종교성, 즉 제도종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종교성/영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 종교’로 나아가려는 불교
현 한국의 불교계는 2016년 말 통계청이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하나로 종교인구 집계결과를 발표하면서 큰 충격에 빠진 것 같다. 그것은 최대의 신자 수를 자랑하던 불교계가 불교인구의 가파른 감소로 인해 10년 전 1058만8000명에서 7.3% 줄어든 761만9000명으로 집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충격을 보탠 것은 개신교인이 10년 전보다 1.5% 증가해 967만6000명이 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종교집단이 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불교인구는 처음으로 개신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종교집단이 되었다.

이에 반해 ‘종교없음’ 인구는 2005년 전체 인구의 47.1%에서 2015년 56.1%인 2749만9000명으로 집계되면서 처음으로 ‘종교있음’ 인구를 추월했다. 한국 불교계는 불교신자의 수와 ‘종교없음’ 인구 내지 ‘무종교인’의 수를 부정적인 상관관계로 보는 듯하다. 즉 이탈한 불교신자들의 상당 부분이 ‘무종교인’ 인구로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경험적 조사는 없으나 논리적인 추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불교계는 이러한 집계결과가 나오게 된 통계청 조사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사회에서 종교인구와 불교인구의 빠른 감소, 즉 한국사회의 ‘탈종교’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광범위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동시대 한국 불교인구의 급속한 감소는 한국 불교가 지난 10년간 꾸준히 그 외연을 넓혀왔던 것을 고려하면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템플스테이로 2002년 FIFA 월드컵 때부터 시작된 해당 사업은 2016년에는 템플스테이 운영 사찰이 120곳으로 증가하였다. (현재는 정체기를 맞고 있지만) 이러한 템플스테이의 확산에는 정부가 국내외 관광 활성화와 문화자원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템플스테이를 문화관광상품으로 높이 평가하여 해당 사업에 지속적인 국고지원을 한 것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도 누구나 동참할 수 있는 것으로는 선묵 혜자 스님이 이끄는 ‘108산사 순례기도회’, 사찰이 주관하는 크고 작은 (명상)수련 모임 등이 있다. 필자는 다른 논문에서 이러한 전통종교의 변화는 제도종교가 자신의 경계 짓기 내지 폐쇄성을 극복하고 보다 ‘열린 종교’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는 해당 종교가 대사회적 영향력을 높이고 보다 넓은 층의 ‘잠재적’ 신도/고객을 확보하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여기서 ‘열린 종교’와 관련하여 현재 불교계가 추진하고 있는 거대 프로젝트인 ‘마음치유’ 사업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국 불교계는 불교신자는 물론이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마음치유와 상담을 위해 전통적인 불교명상에 서구의 심리치료요법이나 상담기법을 접목한 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개발·보급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 불교계가 서구에서 개발된 불교의 명상기법과 심리치료요법을 결합한 ‘마음챙김(Mindfulness)’이 서구사회에서 명상 센터는 물론이고 심리치료/상담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높은 호응을 얻고 있는 것에 크게 고무된 것도 한 몫을 한다.

“불교상담은 머지않아 불교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될 것이며, 불교상담의 전문화와 대중화가 한국불교 미래의 큰 축을 담당할 것”이라는 불교상담개발원장 도현 스님의 2014년 발언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근래 한국 불교계가 ‘마음치유’와 ‘상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투자를 확대하는 것이 단지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대중을 치유한다는 목적을 넘어, 선교 내지 포교의 지평을 넓히고, 한국사회에서 현재 커다란 수요가 존재하는 ‘마음힐링’ 시장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역량을 새롭게 창출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국 불교계는 마음치유와 상담을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받아들이면서 2000년부터 관련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즉 관련 프로그램의 지속적인 개발과 효과적 적용/보급 그리고 지도/상담인력의 양성과 자격증 발급 등을 위해 다수의 교육기관, 연구소, 학회 등이 설립된 것이다.

불교, 선택의 기로에 서다
윤승용은 불교평론의 다른 지면에서 “불교는 승려 중심의 사회·문화적 종교이자 세속과의 경계(境界)의식이 별로 없는 공동체 종교이다. 하여 신앙의 정체성이나 조직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외부의 환경변화에 그만큼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교리나 신앙의 유연한 해석 그리고 대사회적 경계를 낮춤으로써 한국 불교가 위에서 언급한 거대 사업들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로써 해당 종교는 자신의 영향력을 고유의 종교영역을 넘어 사회 주변으로 보다 용이하게 전이 내지 확산시킬 수 있으며, 동시에 내부의 조직과 외부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광범위한 수요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종교는 대사회적 경계를 낮춤으로써 자신의 문화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는 동시에 바로 그 같은 이유로 강하게 결속된 신도층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템플스테이와 같이 일반에게 널리 확산된, 대외적으로 성공적인 사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가 자신의 신도를 빠르게 잃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한국 불교계는 템플스테이나 ‘마음치유’와 같은 프로그램을 정체된 교세를 회복시켜 줄 하나의 현대적 포교방법으로 간주하여 이를 통해 잠재적 불교신자를 확보하고자 하나,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은 일종의 소비자이며 구매자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이들은 자신의 필요성과 시간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이에 부합되는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대신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언제나 필요에 따라 여러 불교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소비할 수 있다면, 이들이 굳이 위계질서로 엮인 권위적인 불교공동체의 일원이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 불교의 모순이 극명하게 들어난다. 즉 한국 불교는 대사회적인 경계는 매우 낮아 경계의 주변 영역에서는 자유로운 이동과 상대적으로 평등적 관계가 가능하나, 내부로 들어오면 (남성)성직자 중심의 매우 권위적이고 경직된 수행공동체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일련의 선행 조사연구가 보여주듯이 종교인구 조사에서 ‘종교없음’ 내지 ‘무종교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모두 종교 냉담자들이 아니며 오히려 이들의 상당 부분은 종교적 성향/관심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자원’으로, 불교인구로 흡수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상당수는 부도덕하거나 권위적인 성직자 혹은 경직된 종교조직 때문에 종교를 이탈하였거나, 아예 처음부터 종교조직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로서, 현 한국불교의 경직된 수행공동체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이들을 신도로 확보하는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불교는 기로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계속 외연을 확장하여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영향력 있는 종교문화로서 그 존재가치를 확보하든가, 아니면 재가신도들이 자신의 역량과 역할을 활발히 펼칠 수 있는 공적 공간으로써 불교 수행공동체를 개혁하여 지속적인 신도의 유입을 유도할 것인지.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두 길을 동시에 가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으며,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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