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성인의 명맥(命脈), 역대 조사들의 대기(大機), 뼈를 바꾸어 놓는 신령스런 처방(處方), 정신을 기르는 오묘한 술법(術法)이여!”

보조(普照) 선사가 쓴 〈벽암록(碧巖錄)〉 서문 첫 부분에 나오는 이 말은 벽암록을 편찬의 저본이 된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지은 설두 중현 (雪竇重顯:980~1052) 선사와 〈벽암록〉을 지은 원오 극근(圓悟克勤:1063~1135) 선사를 찬탄한 말이다.

종문(宗門) 제1서로 평가된 〈벽암록〉은 특이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원래 이 책은 〈경덕전등록〉의 1700공안과 〈조주어록〉, 〈운문광록〉 등에서 100칙을 선택하여 그에 대한 송(頌)을 붙인 〈송고백칙〉을 원오 극근 선사가 각 칙(則)에 대한 짧은 서론 형식의 수시(垂示), 본칙과 송에 대한 해설 형식의 평창(評唱), 그리고 본칙의 각 구절과 원오 선사가 붙인 송의 각 구절을 평가하는 형식으로 붙인 착어(着語) 등 세 가지를 부가하여 1125년에 완성된 책이었다.

‘벽암’이라는 말은 원오 선사가 협산(夾山)의 영천원(靈泉院)에서 평창을 지을 당시 방장실에 걸려 있던 벽암이란 편액에서 따 붙인 것이다. 이 두 글자는 협산의 개산조인 협산선회(夾山善會)가 남긴 오도송 구절에서 차용한 말이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봉우리 뒤로 돌아가고, 새는 꽃을 물어다 푸른 바위 앞에 떨어뜨리네. (猿抱兒歸靑?;後 鳥啣花落碧巖前)”의 뒷구 벽암이란 말을 따서 책 이름을 삼은 것이다.

그런데 원오 선사의 제자인 대혜종고(大慧宗?:1089~1163) 선사가 당시의 학인들 중 이 책을 통해 선화(禪話)만 익혀 알음아리를 늘리기만 하고 실제적인 수행을 게을리 하는 자가 많은 폐단을 보고,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인 선의 종지를 다시 천명하기 위하여 어느 날 대중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리하여 이 책은 200여 년 동안 총림에서 자취를 감추어 사라졌었다.

그러다가 원나라 때에 와서 장명원이란 거사가 여러 절에 비장되어 있던 것을 다시 모아 1300년 전후에 〈벽암록〉을 중간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이 책이 세상에 널리 유통하게 되었다.

이 책은 특히 간화선풍을 드날린 임제종에서 특별히 중시 되어 간화선 수행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묵조선풍을 유지한 조동종의 〈종용록(從容錄)〉 더불어 쌍벽을 이룬 대표적이 선서(禪書)였다. 매 권마다 10칙씩 10권으로 엮었다. 한 칙의 내용을 소개하면 제 3칙에 ‘일면불 월면불’ 이야기가 있다.

 

마조 스님께서 노환으로 몸이 편치 않았다. 원주가 걱정이 되어 스님을 찾아뵙고 여쭈었다.

“스님 요즈음 몸이 어떠십니까?”

스님이 답하기를 “해도 부처고 달도 부처니라.(日面佛 月面佛)”

이 짧은 물음과 대답을 두고 〈평창〉에서는 이어 말했다.

“만약 마조 스님께서 본분사(本分事)의 위치에서 원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불법이 빛을 발할 수 있으리오. 이 공안(公案)이 뜻하는 바를 알았다면 붉은 하늘(丹宵)에 혼자 거닐 수 있겠지만 만약 이 공안의 떨어지는 곳(落處)을 모른다면 그렁저렁 마른 나무 바위 앞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만약 본분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모름지기 농부의 소를 몰고 달아나고, 배고픈 사람이 밥을 빼앗아 먹는 수단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마조 스님의 사람 가르치는 방법을 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조 스님이 원주를 잘 제접(提接)했다’하나 또한 아무 관계가 없다. 다만 대중들이 잘못 알고 자기주장을 내세워 눈을 부릅뜨고 말하되 ‘이 가운데 있으니 왼쪽 눈은 일면(日面)이요, 오른쪽 눈은 월면(月面)이다’하니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 당나귀 띠 해가 돌아와도 꿈에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조스님이 이렇게 말한 진의는 어디에 있을까? 원숭이가 물속의 달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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