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교수, ‘용성 사상의 재인식’ 세미나서 분석

[현대불교= 신성민 기자] 백용성 스님〈사진〉은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참선만일결사(이하 만일결사)’를 추진해 간화선풍 진작을 도모했다. 스님의 만일결사는 근대기 선지식이 만일이라는 오랜 기간 결사를 주창했다는 데 많은 시대적 의미를 갖지만, 학술적으로 조명되지 못했다. 또한, 결사 참여 수좌의 개요 등이 파악되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발간된 〈백용성 대종사 총사〉는 용성 스님의 심층적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특히 7권인 ‘신발굴 자료’편에는 동국대 총장 보광 스님이 제공한 만일결사 방함록이 수록돼 관련 연구의 폭을 넓혔다.

1925~27년 만일결사 방함록
총서 신발굴 자료 통해 조명
초기엔 전국 수좌 36명 참여
내·외부환경 영향 동력 감소해
“용성 만일결사, 禪律兼行 바탕”

4월 7일 평택 명법사와 대각사상연구원이 개최한 ‘백용성 사상의 재인식’ 학술세미나에서는 새로 발굴된 만일결사 방함록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한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 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김 교수는 당시 불교잡지 〈불교〉 14, 15호의 선전문을 통해 만일결사의 목적, 운영 등을 조명하고 결사의 근간에는 선과 계율을 겸행(兼行)하는 지향점이 있음을 분석했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총서에 공개된 만일결사 방함록을 분석해 결사의 규모와 진행 과정을 추론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첫 시작인 1925년 동안거 방함록에는 조실 백용성, 수좌 설석우(동화사)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설석우는 금강산권 불교에서 수행한 중견 수좌로 1955년 9월 조계종단 종정에 추대됐다. 총 동참인원은 36명으로 애초 공고했던 30명보다 조금 초과해 안거에 들어갔다. 외호 대중까지 전부 합치면 55명이 참여했다. 

1926년 3월에는 첫 수행처인 망월사에서 천성산 내원암으로 이전한다. 이어진 1926년 하안거에는 57명에서 55명으로 줄긴 했지만, 별 차이는 없었다. 다만, 독경 소임이 새로 추가된 것은 특이할 만한 점이다.

하지만, 1926년 동안거에서는 총 인원은 25명으로 축소됐고, 수행자는 14명에 불과했다. 1927년 하안거도 상황은 비슷했다. 총 대중은 27명이었고, 수행자는 17명만이 동참했다.

그렇다면 만일결사는 왜 3년 이상을 진행되지 못했을까? 김 교수는 망월사에서 내원암으로 수행처가 6개월만에 변화, 엄중한 규율의 결사를 당시 수행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웠던 풍토 등을 요인으로 제기했다.

실제, 용성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보낸 서한에 보면 결사를 시작한 이후 1만원(현재 5억원)의 거금을 소진했고, 현재 수좌들이 결사의 규칙과 자신의 지휘를 따르지 않음을 개탄하고 있다.

김 교수는 △결사회의 재정 악화 △수좌들의 나태한 수행 자세 △불교 개혁·불사 중첩 등 용성 스님이 결사에 주력하지 못했던 현실을 지적하며 “용성 스님의 중첩된 불사도 문제지만, 나태한 수좌들이 더 문제였다”면서 “결사회에 동참한 수행자가 의지 박약, 규칙 방치 등을 보여준 것은 결사라고 볼 수 없는 모순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럼에도 용성 스님의 만일 결사는 치열한 선 결사·엄중한 규칙·선율겸행이라는 독특한 지향 등 의의가 상당하다”며 “이는 결사 추진자인 용성 스님의 불교·선·계율 사상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행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날 세미나에서는 도문 스님(조계종 원료의원, 죽림정사 조실)의 기조발제를 시작으로 △〈백용성 대종사 총서〉 발간 경위 및 성격(이재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등의 주제 발표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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