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아미타불 칭명염불의 시조 담란 대사

“수행하기 쉬운 길(易行門)이란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써 청정한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부처님의 원력을 입어 곧 저 청정한 국토에 왕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원력에 의지하여 대승의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간다. ‘정정’이란 곧 이 아비발치(不退轉地)를 말한다. 비유하면 물 위에서 배를 타면 즐거움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무량수경우바제사는 한 마디로 대승의 극치이며 뒤로 물러나지 않고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것이다.”  - 〈왕생론주(往生論註)〉

 

성불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 ‘이행문’
지난 회에서는 정토종의 초조인 혜원(慧遠, 334~416) 대사의 구도기를 소개하였다. 이번에는 정토종 조사 계보에는 빠져있지만, 정토종이 하나의 종파로 형성되는 데 기초를 다진 분으로, ‘아미타불 칭명염불’의 시조로 불리는 담란(曇鸞, 476~542) 대사의 정토사상과 행장을 알아볼까 한다.

위의 글 〈왕생론주〉 ‘서문’에서 보이듯 용수 보살의 이행문(易行門)설과 난행문(難行門)설에 기초하여 보다 쉬운 방법으로 중생을 정토, 즉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염불수행의 길을 본격적으로 안내한 선지식이 바로 담란 대사이다.

담란 대사는 천친(세친) 보살이 〈무량수경〉의 본 뜻에 맞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극락왕생의 원(願)을 세워 지은 게송인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왕생론)에 주석을 붙인 〈왕생론주〉를 통해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듯 하다.

“성불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 근본 원력)에 의지하여 업을 지닌 채 윤회계를 벗어난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지에 올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는 염불수행이다.”

오대산 영험한 이적 보고 출가
양무제 “담란은 육신보살” 칭송
정토법문 사회 확산에 기여

아미타불 원력의 배 타고 피안에 당도한다
그렇다면, 쉬운 길(불력수행)과 어려운 길(자력수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담란 대사는 〈왕생론주〉 서문에서 “보살이 불퇴전의 경지를 구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면서,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를 설명하고 있다.

“난행도는 오탁의 세상에, 그리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때에 불퇴전지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첫째, 외도(外道)이니 보살의 법을 어지럽게 한다. 둘째, 성문(聲聞)이니 자신의 이익으로 대자비를 장애한다. 셋째, 무원악인(無願惡人)이니 다른 사람의 수승한 덕을 깨뜨린다. 넷째, 전도선과(顚到善果)이니 청정한 선행을 능히 파괴한다. 다섯째, 유시자력(唯是自力)이니 타력에 의지함이 없다. 이는 비유하자면 마치 육지에서 걸어가면 힘든 것과 같다.”

우리가 부처님 탄생지인 네팔의 룸비니로 가려할 때, 자력수행의 난행도가 걷거나 헤엄쳐서 가는 것이라면, 불력(佛力)수행인 이행도는 빠른 배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이행도는 말하자면, 단지 부처님을 믿는 인연(信佛因緣)으로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문득 저 청정토에 능히 왕생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여 곧 대승 불퇴전의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왕생론주〉

염불하는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룬다
대승불교의 아버지이자 선종을 비롯한 8종(宗)의 ‘할아버지 스승(祖師)’인 용수 보살이 〈십주비바사론〉에서 성불에 이르는 어려운 길과 쉬운 길을 이처럼 극명하게 설명했음에도, 구도자들은 왜 여전히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일까. 더구나 온갖 장애와 유혹이 더욱 치성한 오늘날 이 오탁악세에서 쉬운 길을 외면하는 것일까.

한국불교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정토법문을 ‘하근기나 하는 쉬운 수행’ 정도로 여기는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듯 하다. 하지만 불자들은 대승의 할아버지이자 선종의 제12ㆍ14대조사인 마명ㆍ용수 보살이 왜 정토법문을 선양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종에서는 극소수의 도인들만이 확철대오하여 생사해탈하지만, 정토종에서는 시장의 할머니, 상인, 노예와 심지어는 살생을 업으로 하는 백정이나 반려동물들까지 윤회계를 벗어나 정토에 왕생한 사실이 〈왕생록〉이나 〈동물왕생불국기〉 등에 무수히 등장하는 것이다.

담란 대사를 비롯한 정토의 스승들이 〈관무량수경〉에서 주로 인용하는 “아미타부처님을 염하는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是心是佛), 염불하는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룬다(是心作佛)”는 법문을 깊이 참구하여 성불의 지름길을 찾아보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팔만 대장경을 샅샅이 읽은 후 가장 빠른 성불의 길이 정토법문에 있음을 확인했다는 담란 대사 역시, 난행도를 걷다가 이행도로 전향해 생사해탈한 선지식임을 상기해 보자.

참된 장생불사법은 정토법문에 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인 서기 476년, 산시성(山西省) 안문(雁門)에서 태어난 담란 대사는 어려서 고향 근처인 오대산의 영험한 이적을 보고 발심 출가하여 반야학의 4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중론(中論)〉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대지도론(大智度論)〉과 그밖에 불성에 관한 여러 학설을 공부했다.

대사는 뒤에 〈대집경(大集經)〉을 독송하며 깊은 뜻을 살펴 주석을 하고 있었는데, 작업을 절반쯤 했을 때 그만 감기 증세의 병에 걸려 의원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그 의원이 도교의 방술(方術)을 권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위급하여 하루저녁처럼 무상(無常)합니다. 내가 듣자니 신선술을 배우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신선술을 먼저 배운 뒤 불교를 숭상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담란 대사는 강남으로 유명한 도사인 도은거(陶隱居)를 찾아가 〈선경(仙經)〉열 권을 받아가지고 기뻐하며 돌아오는 길에, 낙양에서 보리유지(菩提留支) 삼장 법사를 만났다.

담란 대사가 물었다. “불법 중에도 이 〈선경〉을 뛰어넘는 장생불사법이 있습니까?”

보리유지 법사가 대답했다. “북방에도 장생불사법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한들 잠시 죽지 않더라도 결국에 윤회하게 되는데, 뭐 그리 귀한 법인가? 참된 장생불사법은 우리 불교라네.”

양무제 “담란 법사는 육신보살이다” 찬탄

보리유지 법사는 정토삼부경의 하나인 〈관무량수경〉을 주면서 “여기에 의지하면 삼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고, 육도를 윤회하지 않아서 텅 비어 쉬게 되며, 화복과 성패가 없는 것을 수명으로 한다. 강변의 모래 만큼의 겁(劫)으로도 무한한 수명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우리 부처님의 장생법”이라고 말했다.

이에 담란 대사는 크게 기뻐서 〈선경〉을 불태운 다음 정토에 전념하여 〈예정토〉 12수를 짓고, 〈안양집〉 두 권을 저술했다. 위(魏)나라 왕이 담란 대사를 높이 받들어 ‘신란(神鸞)’이라는 법호를 하사했으며, 칙명으로 병주의 대암사(大巖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염불수행으로 득력한 담란 대사에게는 신비한 이적(異蹟)이 많았다고 전한다. 남조(南朝)의 양무제(梁武帝)를 만난 뒤 북쪽으로 돌아가자 양무제는 수시로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담란 법사는 육신보살이다”라고 찬탄했다고 전한다.

극락정토에서 온 용수보살 친견하고 왕생

대사는 만년에 분주의 현중사(玄中寺)에서 주석했다. 또한 개산의 북쪽으로 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염불수행을 했으며, 동위(東魏)의 흥화4년(542)에 평주의 요산사(遙山寺)에서 67세의 나이로 왕생하였다.

어느날 저녁, 성스러운 인도 승려가 나타나서 “나는 용수(龍樹)라네. 오랫동안 정토에 머물다가 그대의 뜻이 나와 같기에 만나러 왔다”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일러주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한번 떨어진 나뭇잎은 다시 가지에 붙지 못하고/ 다발을 묶지도 않은 수수를 창고 안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며/ 날아가는 흰 갈매기는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나니/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쫓아갈 수도 없는 것이며/ 현재는 또한 이제 어느 곳에 있으리오.”

담란 대사는 때가 되었음을 알고 대중을 모아놓고 당부했다.

“인생이란 괴롭고 괴로움이 그칠 날이 없다. 지옥의 여러 고통을 두렵게 생각하고, 구품정업(九品淨業)을 닦도록 하라.”

제자들이 소리 높여 염불하자 대사는 서쪽을 향해 예배하고 입적하였다. 절에 머물던 모든 사람들은 꽃으로 장식한 깃발들이 서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고, 하늘의 음악이 오랫동안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고 〈속고승전〉 등에 전한다.

대승의 염불심 살아나야 불교중흥 가능

정토종 초조 혜원 대사의 사후 150여년 뒤에 활동한 담란 대사는 정토법문을 사회전반에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염하는 관행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는 일본 정토진종의 개조 신란(親鸞)을 들 수 있다.

정토종이 중국과 일본에서 선종과 쌍벽을 이루며 발전해온 반면, 신라ㆍ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염불수행이 극도로 폄하되고 정토관련 서적마저 흔치 않은 오늘날. 대승불교의 위대한 선지식들이 고구정녕 선양했던 정토법문을 참구하여 누구나 노는 입에 염불하는 시절이 올 때, 비로소 불자들의 신심이 살아나 한국불교의 중흥을 기약할 수 있으리라.

대문 밖이 저승이니, 불자님들은 언제 어느 때나 ‘나무아미타불’을 염하여 생사해탈의 든든한 양식(資糧)을 삼으시길 간절히 기원드린다. 나무아미타불!


사진 : 정과사에 모셔진 담란대사의 육신사리(肉身舍利ㆍ등신불)를 묘사한 삽화.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