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 자체가 무한의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오늘 모건힐에서 한자리를 한 것은 어느 종교에 국한됨이 없이 서로가 화합해서 이 진리를 탐구하면서 생활 속에서 자기를 돌아볼 수 있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고, 자기부터 있기 때문에 세상이 벌어졌다는 거를 좀 더 음미해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갖게 하고 이러기 위해서 한자리를 했습니다.

주인공이라는 뜻은 한 새도 없고 안 한 새도 없이

그냥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진화력을,

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견으로 쓰지를 않고 항상 소견으로써 좁게 쓰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의 모든 생명체들이 자기가 지금 어디를 가는지, 어떻게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 이 속의 모든 생명들이, 의식들이 다 한마음으로 통신이 돼서 같이 한마음으로 돌아가야만 내 몸도 건강체요, 바깥에 있는 모든 살림살이도 건강하게 해 나갈 수 있는, 또 좌절이 없는, 즉 말하자면 아주 당당한 내 마음으로 가정과 사회와 국가, 모든 면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견으로만, 자기가 요렇게 마음으로 틀을 짜 놓고 거기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그러한 마음 소견을 가지고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탁 틔워서 지견으로써, 한마음으로써 대우주의 근본이 내 근본과 더불어 직결돼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우리가 폭넓게 알아내면 좋겠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직결돼 있으니까 모든 이 마음 자체가 그렇게 무한의 능력을 가졌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견으로 쓰기 때문에 자기의 그 능력을 발휘 못하고, 또 이 50%의 유(有)의 세상, 무(無)의 세상 50%를 한데 계합시켜서 자유스럽게 쓰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탓이지 우리 가르치는 사람의 탓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으로만 나가도 아니 되고, 소견으로만 써도 아니 되고, 또는 무의 세상의 공에 빠져서도 아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우리 마음이 좀 더 폭넓은 지혜로써 지견을 쓴다면 그렇게 나갈 수 있겠죠. 그런데 아까 내가 말했듯이, 우리 몸속에 있는 그 의식 자체가 악업 선업이 뭉쳐서 우리 인간이 됐는데, 그것들이 모두가 내 마음의 지배를 받아야만 되겠죠. 그런데 내 마음이 악으로 쓴다거나 선으로 쓴다거나 그런다면 그대로, 악으로 생각하면 여기서 악으로 같이 해 주고 선으로 쓴다면 선으로 같이 해 줍니다. 그러니 그걸 모르는 거죠.

그럼 우리가 지구 벌레라고 합시다. 우리 몸속에 들어 있는 벌레와 같이, 이 몸을 지구로 삼고 사는 내 생명들과 같이 우리도 지구의 벌레로서, 지구의 주인으로서 이렇게 산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금 지구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오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항상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고 서로 이렇게 하기 때문에 지구도, 즉 말하자면 수명을 오래도록 둘 수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 않으냐 이런 문제도 없을 수 없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이 몸도 그렇습니다. 지구와 같이 안에서 파워가 일어나고 싸우고 이런다면 이 몸뚱이가 벌써 망가집니다, 세포가 굳어지고. 벌써 콩팥에서 걸러 주는 데 지장이 있어지고, 그럼 붓고, 또 간이 나빠지고 위가 나빠지고, 어디는 안 나빠집니까? 나빠지면 거기가 잘못됐다고 해서 고치면 또 딴 데가 벌어지고…. 그럼 몸뚱이가 뭐가 되겠습니까? 우리 집이 망가지죠? 이 몸뚱이는 우리의 집이라고 봅니다. 집이 망가진다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무효죠. 아무리 우리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현 세상에, 차원에 따라서 이 세상에 다시 바꿈질을 해서 진화되기도 하고, 또는 끝 간 데 없이 우리는 이 중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 몸에서 벗어나고, 지구에서 벗어나고, 세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 하나가 금방 깨쳤다고 해서 한 소식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소식 얻은 게 아닙니다. 갓난 어린애 금방 낳아 놓고서 “너,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해서 네 멋대로 살아라!” 이러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금방 깨친 사람은 어린애 금방 낳아 놓은 거와 같아서, 그걸 부모가 기르고 또 가르쳐서 이렇게 사회인이 될 때까지는 부모의 보조가 필요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깨쳤으면 그때서부터 실험으로 들어가고, 즉 말하자면 체험으로 들어가고 연구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때는.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게 체험이 된다면, 당당하게 안으로는 내 생명체들을 모두 한마음으로 굴려서 지배하고, 바깥으로는 마음들을 조절해서 지배하고 그렇게 해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해 놓고, 그다음에 또 한 가지는, 즉 말하자면 세 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나를, 모든 것을 놔라, 자기 주인공에 놔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컴퓨터에 놓으라는 얘기와 똑같습니다. 컴퓨터에 입력을 해 놓으면, 그냥 아무렇게나 버려라 이러는 게 아니라 입력을 하는 겁니다. 과거에 입력이 돼 가지고 지금 현실에 이렇게 고생을 하니까, 지금 고생하는 것을 입력을 다시 한다면 앞서 팔자 운명이라는 그 단어가 없어지고 그 언어가 없어지고 업보가 없어지고 녹아진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우리 자체가, 지금 우리 몸뚱이가 살아서 지금지금 움죽거리면서 가기도 바쁘고, 옳게 가기도 바쁘고, 나 발견하기도 바쁘고,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도 바쁘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기도 바쁜데, 우주 천지가 전부 가설이 돼서 직결돼 있다는 그 사실도 연구하고 탐험도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바빠 죽겠는데 싸울 새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욕을 해도 그렇고 나하곤 상관이 없는 거죠. 네? 죽인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어요! 내가 바빠요, 지금.

인간까지 올라온 것도 천 년을 공을 닦아서 온 겁니다. 그래서 사람 하나 되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돼 가지고도 거기서, 즉 말하자면 진화해서 승진을 못한다면 여기서 빙빙빙빙 끝 간 데 없이 돌다가 또 미해져서 잘못되면 짐승의 허물도 쓸 수 있는 거죠. 만약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의식만 가지고 있다 보면 아, 부부가 자는 것만, 그 의식만 가지고 있으니 거기 아무 데나 들어갈 수밖에요. 그래서 그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면 사람의 모습이 없어지고 짐승의 모습으로도 나올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분명히 있으나 우리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고 합니다. 그건 왜냐하면 과거는 지금 짊어지고 나왔으니까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으니, 지금 모두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생활하는 거를 한번 지켜보면서, 여유 있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잠재의식 쪽으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라 이거죠.

이 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즉 불교다 이러면 불교가 무슨 미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톨릭교, 기독교, 불교 할 거 없이 전부 바깥에서 숭상하고 바깥에서 끄달리고 바깥에서 구하고 그러니, 전부 그게 미신들이지 뭡니까? 사람이 미신 노릇을 하면 미신이 있는 거지 사람이 미신 노릇을 하지 않는데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귀신 노릇을 안 한다면 귀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도리를 그대로 참답게 해 나가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고 당당하게 자유스러울 수 있고, 돈을 쫓는 게 아니라 내가 없으면 당당하게 돈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즉 말하자면 인간의 이 모두를 자유스럽게 살 수 있으며 또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으며 또는 법신이 될 수 있으며,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사니 화신이 될 수 있으며, 뭐든지 내가 사는 대로 그대로 여여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재료가 다 돼 있다는 사실, 여여하다는 사실, 청정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다는,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 근원을, 근본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견으로 아주 작게 써서 ‘요거는, 요거는….’ 이럭하고는 그냥 자꾸 따로따로 가르니 지혜가 넓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 족자에 붙여 놨죠, 저기. 저기 보십시오. 불(佛)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 자체가 불입니다. 여러분은 생명 없는 여러분도 없거니와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다는 사실도 부정 못하시겠죠? 그리고 마음이 있으니까 움죽거린다는 그 사실도 부정 못하시겠죠? 그것이, 우리 사는 게 그냥 불교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생활입니다, 그냥. 불교가 어디 국한돼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먹고 죽고 이렇게 돌아가는 생사윤회도 없느니라.” 했습니다. 나중에 그 도리를 알면 생사윤회도 없어요. 잠시 잠깐 없어졌다 잠시 잠깐 잎이 피듯이. 여기는 사철이 따로 없습디다마는 그래도 가을이 되면 잎들이 떨어지더군요. 어쨌든 간에 잎이 떨어졌다고 해서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뚱이가 떨어졌다고 그래서 나무뿌리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에서나 추운 데 보면요, 가을에 잎이 탁 떨어지고 나면 그 나무는 앙당한 가지만 남죠. 이번에도 알래스카에서 보니까 푸르름은 푸르름대로 있고, 아주 그냥 흰 백설이 덮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외에는 아주 앙당한 가지만 남아서 추위를 참으면서 인내로이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이 우리 인간의 마음과 더불어 같이, 똑같이 공존하고 있더군요.

그러니 저것도 그렇습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라 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대로, 모든 게 찰나찰나에 돌아가고, 작은 거면 작은 거 큰 거면 큰 거, 선후가 없이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돌아가면서 산다 하는 것을 명시해 놓은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청정한 거죠. 마음은 항상 국한돼 있지 않고 매여 있지 않고, 찰나찰나 그냥 슬기롭게 돌아가는 게 여러분 마음이죠? 그 마음이 청정함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 이 소리죠.

그래서 여러분 자성이 본래 여여함을 알라 이랬죠? 그대로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자체를, 여여함을 왜 모르느냐 이겁니다. 마음만 조금 넓게 쓴다면, 서로 대적하고 서로 욕하고 서로 긁어내리고 그럭하지 말고 넓게 쓴다면, 그저 남한테 꼭 말을 하고 다녀서 넓게 쓰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넓게 쓴다면 보이지 않는 데서나 보이는 데서나 귀인이 닥쳐서 나를 살게 해요. 내 마음 쓰는 대로라고요. 내 마음 쓰는 대로, 내 양심이 부처라는 말도 있듯이 내 양심이 잘 써지면 바로 수없이 오고 가죠. 그래서 이 인간의 마음 자체가 바로 천체무전통신기처럼 통하고 있죠.

그러니 오늘은 여러분하고 서로 토론을 하고, 요다음에 뭐 내일 모레 또 저기서 한다니까, 거기 가서 할 때 차곡차곡 인간의 몸이 어디서 이렇게 왔는지, 지금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거를 자세히 말씀해 드리죠. 오늘은 말입니다, 여러분이 궁금한 게 있으시니까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큰스님께서 항상 주인공 말씀을 하시는데, 그 주인공이라는 거는 보통 얘기하면 영혼을 얘기하는 게 아닌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그런데 마음 안의 주인공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힘을 가해 준다고 했습니다. 이런 거 한번 들어 보세요. 다른 물건은 다 먼저 됐는데 인간은 제일 나중에 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랬을까요?

질문자1(남) 정신적인 거, 영혼적인 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큰스님 그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제일 나중에 난 것은 미생물에서부터 거쳐서 진화되고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진화돼 왔기 때문에 인간이 제일 늦게 된 폭이죠. 그런데 그렇게 진화돼서 끌고 온 장본인이 누구냐. 자기 주인공입니다. 자기 주인공이 이끌고 왔기 때문에, 주인공이라는 뜻은 한 새도 없고 안 한 새도 없이 그냥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진화력을, 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주인공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마음 안에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놔라.” 하는 것은 그것이 과거생으로부터 온 컴퓨터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입력이 모두 돼 있는 바로 숙명통.

지금 사람들은 숙명통이라고 그러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에 아주 고조할아버지 컴퓨터라고 합시다, 허허. 모든 것이 다 입력이 될 수 있는 그런 컴퓨터라고 합시다. 그것이 불가에서 말하면 숙명통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숙명통만 있어서도 아니 되죠. 컴퓨터 그것만 있어서도 아니 되죠, 또. 이 모든 시스템이 다 돌아가려면 거기는 팩스도 있어야 하고 탐지기도 있어야 하고 무전통신기도 있어야 하고 망원경도, 천체망원경도 있어야 하고 또 레이더망도 있어야 하고 전부 붙어 돌아가야 합니다, 이거는. 하나라도 빠지면 아니 되죠. 모든 전체가 거기서 다 풀려나오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즉 말하자면 오신통 그 바깥으로 벗어나야만이, 오신통이 여러분의 몸이라고 한다면 바깥으로 벗어나야 몸을 마음대로 굴릴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또 한 가진 뭐냐 하면 여러분이 팔자 운명 이런 타령을 하는데 팔자 운명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 붙을 자리가 어디 있다고 붙어야 하고 운명이 있고 그렇습니까? 그런데 모르는 게 죄입니다. 모르는 게 죄예요. 모르는 게 고(苦)고요. 모르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 컴퓨터에 과거에 살던 과정이 전부 입력이 돼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겁니다. 근데 현실에 나오는 데다가 다시금 거기다가 입력을 시킨다면 과거에 입력이 됐던 건 다 없어진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팔자 운명이고 뭐고 병고고, 그런 거 어디서 왔느냐? 무슨 미신에 걸쳐서 뭐가 나왔느니 부모 조상이 잘못돼서 뭐가 나왔느니 그렇게 말을 하죠. 그건 사실입니다. 인과응보로서 악업 선업이 나오죠, 유전이 나오죠, 세균에서 나오죠, 영계에서 나오죠, 조상들이 잘못됐으면 그 연결의 인과로 나오죠. 아주 복잡하죠. 잘못됐다 하면 복잡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도리를, 한군데서 나서 한군데로 든다 하는 것만 알면…. 여러분이 계시니까 세상이 벌어졌고 여러분이 계시니까 지금 잘못됐네 잘됐네 하고 이렇게 종교도 믿는다 안 믿는다 이게 나오지, 여러분이 없으면 무효지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 탓이고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오관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서 나오고 여러분 속에서 들이고 생각하고 아, 그러지 누가 합니까? 아이, 생각해 보세요, 안 그런가. 그러니까 여러분한테서 나오는 거는 여러분한테 되놔요! 되맡겨요! 왜? ‘네놈이 엎드러졌으니까 네놈이 일어나!’ 이러고요.

이 종교라는 것은, 이 불법이라는 것은 저 풀 한 포기도 불법 아닌 게 없어요. 이 세상의 모두가 전부 직결돼 있습니다. 전부 직결돼 있고 전부, 이 전기가 가설돼 있듯이 전부 가설이 돼 있어요. 부처님께서 수많은 해골바가지 앞에서 큰절을 하신 것도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전부 직결돼 있느니라. 전부 돌아가면서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니었던 부모가 없고 내 형제 아니었던 형제가 없고, 그러니 바로 그 해골도 내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내 할머니가 될 수도 있고, 내 형제가 될 수도 있고 내 어머니가 될 수도 있느니라. 그런데 어찌 절을 안 하겠는가. 풀 한 포기도 버리지 말라. 내가 배울 때는 모두가 하나처럼 천체가 스승이다. 그건 왜?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가 생각을 할 수가 없으니까 배우지 못한다. 그러니 풀 한 포기도 스승 아닌 게 없느니라. 그거를 안다면 하나도 버릴 게 없느니라.’ 이런 거죠.

이렇게 불법이 심오합니다. 여러분한테 불법이 있다는 것을 심오하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가도 변소에 가도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거기 부처가 있다는 거를 어찌 모르십니까? 그리고 부처는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입니다.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이고 보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부처님을 모셔 놨는데 하나가 석존이면 하나는 문수입니다. 하나는 보현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하나는 그냥 힘만 가지고 있는, 즉 말하자면 어떤 기계화가 됐다면 그 중심, 심봉 그것만 딱 힘을 주고 있고 그 가장자리에 붙어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문수, 보현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하늘을 받친 불기둥이다 한다면 이쪽은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이 생각하는 거는 문수고 또 생각을 하고 움죽거리는 거는 보현이거든요. 그래서 자성 삼보에 귀의한다 이러는 거지, 어디 신이 따로 있어서 귀의한다 이러는 게 아니에요.

여기 법당에 왔으면 저 부처님 형상하고 내 형상하고 둘이 아니요, 마음하고 둘이 아니요, 생명과 둘이 아니다 이거야. 또 강당에 갔으면 주처가 하나님, 님이야. 하나님은 나에게 있는 것이고, 하늘님은 나의 그 지혜로운 마음이고, 한울님은 나에게 모든 일체가 통신이 되는 그 한마음이 바로 “님이시여, 님이시여”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의 님으로 인해서 수많은 님이 하나로 뭉쳐서 조화를 이룬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슨 딴 데 있는 줄 알지 마시고, 부처가 딴 데 있는 줄 알지 마시고 언제나 부처나 중생이 둘이 아니요, 하나님과 부처라는 이 단어가 둘이 아니라는 거 이걸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부터 알라, 하나님부터 알라 이 소립니다. 왜 각자라고 말씀을 안 해 주셨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각자라는 말을 안 했더라도 편집하는 사람이 좀 더 이 뜻을 알았더라면 그렇게는 안 해 놨을 겁니다.

그러니 누가 나쁘고 누가 좋고 이걸 떠나서 우린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나왔으니 모두가 조화를 이루고 같이 공생·공용·공체·공식화하고 지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는데 누가 나쁘고 누가 좋고가 어디 있습니까? 지구가 지금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내 몸뚱이가 지금 돌아가도 이 몸뚱이 속에서 생명들이 지금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거를 좀 알 수 있게끔 모두 알려서 한마음으로 돌아가게 하고 내가 지배인이 된다면 한생각으로써…. 하루는 어느 불자가 그랬대요. 아, 저기 가다가 무르팍이 탁 부딪쳐서 무르팍이 아팠어. 그런데 그것이 도져 가지고는 다리가 아파서 못 다니거든. 그래서 ‘야, 네 집을, 네 다리를 이렇게 망가뜨려 놓으면 내가 너를 어떻게 누가 되지 않게 이렇게 끌고 다닐 수 있겠냐?’ 그러고선 주인공한테 ‘네가 알아서 해. 네 집을 네가 고치는 거지, 운전수가 고치는 거지 누가 고쳐?’ 그러곤 갔더니 아이, 조금 가다 보니까 다 나았더라지 않습니까. 그걸 알아들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지금 이 자리에서 혼자 앉아서 돈 어디 착취한 거를 아무도 모르고 나 하나만 알아도요, 아니에요. 이 보이지 않는 우주 법계에서 다 아는 거예요. 왜? 우주 법계에서만 아는 게 아니죠. 이 세포에서 다 아는 거예요. 세포가 법계거든. 내가 아는 거는 다 아는 거라.

그러니 우리 하나하나가 거짓 없는 사실이라는 거. 예전에도 누가 접시에다 시주를 했는데 시주를 했으니까 그래도 뭐를 정성이라도 들여 줄 줄 알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아니 글쎄, 여기선 멍크(monk)라고 그러니까 중이라고 그러는데, 예를 들어서 예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님!” 이렇게 잘 불러야 되겠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스님이 해 줄 줄 알고 가만히 있는데 안 해 주거든. “스님, 저 어떻게 정성은 안 들여 주십니까?” 그러니까 “정성을 안 들여 줬다고 생각하걸랑 이 돈을 도로 가져가거라.” 그랬거든. “나는 너한테 돈을 받은 새도 없고 내가 너 준 새도 없어. 네가 가게 가서 필요한 물건을 돈을 주고 사 왔을 때 그 사람 돈 줬다고 하겠느냐?” 하니까 그만 “어이구, 그러면 알겠습니다.” 그러곤 갔더랍니다. 가니까 아팠던 자기 아들은 그냥 일어나서 밥을 먹고 앉아 있더랍니다. 그겁니다, 바로.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0년 4월 22일 모건힐지원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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