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일곱 번 용서하고

생명은 아름답다. 신비하고 경이롭다. 생명은 그 존재만으로도 움직이는 기적이다.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고 보호 받아야 할 또 하나의 천지창조이다.

특히 사람의 생명은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환경과 권리 앞에서 평등하다. 귀천(貴賤)이 있을 수 없고 높낮이가 허락되지 않는다. 절대평등의 다함이 없는 행복과 자유 누림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일 수 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의무를 다했을 때 그에 따른 권리도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켜야할 사람의 도리는 소홀히 하면서 누려야할 권리 주장엔 메아리가 없을 것이 뻔한 일이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하고 내가 흔들리면 남도 흔들릴 수 있음을 헤아려 살피는 것이 인생의 기본덕목인 배려이다. 배려와 이해는 소통에서 비롯된다. 대화를 통해, 토론을 통해 공동체의 흐름을 통해 단절과 결핍을 풀어 가야한다. 나(我)라는 생각과 너라는 생각, 우리라는 울타리의 보호벽을 허물어가야 한다. 틈이 생기면 대화는 멀어지고 대화의 단절이 길면 이해의 결핍으로 적이 되는 세상이다. 가까운 친척도 멀리 있으면 먼 친척이 되어가고 먼 친척도 가까이 있으면 가까운 친척이 되는 격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대화로서 다양한 의견의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점일 터이다. 오해는 대화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곡해(曲解)는 대화의 막힘에서 출발한다. 대화는 입을 통해 문자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상대자한테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대화는 입으로 문자로만 하는 게 아니다. 느낌을 담은 표정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몸짓의 대화가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법이다.

흔히 〈천수경〉의 첫 구절인 정구업(淨口業)을 설명할 때 입을 통해 짓는 거짓말(妄語), 기만하는 말(綺語), 두 가지 말(兩舌), 거친 말(惡口)로 4등분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천수경(千手經)〉의 경(經) 명칭이 의미하듯 손이 천 개면 입도 천 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눈은 보는 입이요, 귀는 듣는 입이다. 코는 냄새 맡는 입이요 입은 맛을 분별하는 입이다. 배꼽 밑의 두 개의 생식기관은 배설하는 입이요 팔 다리는 움직이는 입인 것이다.

좁게 보면 신체에 달린 구멍은 모조리 입이요 넓게 보면 온 몸의 팔만사천의 세포 하나, 하나가 모조리 입이 아닌 게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구업(淨口業)의 바른 해석은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업(三業)으로 좁혀 받아들일게 아니라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이 셋이 아닌 하나로 설명되어야 할 터이다.

손짓 몸짓도 언어요 표정도 언어이다. 예전 사형(死刑)을 집행할 때 집행관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두 눈을 가린 사형수에게 자신의 말을 최후의 목소리로 각인 시키는 게 두렵고 께름칙하기 때문이다. 하여, 한 목숨을 마감하는 최후의 언어는 말이 아닌 손짓, 또는 목 짓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웅변일 수 있고 또 다른 언어일 수 있는 것이다. 형사 소송법에서 묵비권이 하나의 권리행사로 존중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일 터이다. 자, 방향을 바꾸어 조계종단의 숙제로 떠오르는 멸빈자 사면복권에 대해 언급할 차례이다. 이유야 어떠하던 조계종단에 소속된 종도로서 종헌 종법을 어겨 궤도를 이탈한 행위에 대해서는 당연한 과보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종단의 사법 기관에서 중징계를 받아 승적도 박탈된 그들이 10년, 20년 넘게 사찰 주변을 떠나지 않고 승복 걸친 또 하나의 스님으로 살아간다면 종단에서는 섭수자비로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종헌 종법을 보완하고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그들의 과오에 따른 충분한 형벌은 그동안의 세월로 충분한 것이다. 10년, 20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님을 헤아려 그들에게 수행자로서 아름답게 회향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도록 자비를 베풀어야한다.

사람이 사람을 벌주되 사형(死刑)까지 내릴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율장정신을 되살려 일곱 번 용서하고 아홉 번 기회를 주어야한다. 한 울타리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고개 숙인 그들에게 행복과 자유를 누릴, 진정한 의미의 참 수행자의 길을 터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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