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는 개별적인 나가 아니라 포괄적인 나입니다!

 

옛 산도 옛 물도 옛 사람들도…
질문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는 물이 옛 물이 있을쏘냐.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더라.” 하는 이런 내용의 한시가 있습니다. 이처럼 저희 중생들도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면서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합니다. 저희가 흘러가는 곳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예전에도 그런 시를 읊었는데…, 지금 보니 옛 산도 옛 물도 옛 사람들도 없다고요. 그렇게 없기에 있다 없다 하는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라고 말들을 했죠. 옛 산이 있고 옛 물이 없다면 그건 한 부분에 속한 얘기지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냉정히 판단해 볼 때 옛 사람도 없고 옛 물도 없고 옛 산도 없습니다. 묵묵히 그대로 작용하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실상이 그대로 살아 있기에 옛거다, 옛것이 아니다 그런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살아나가다 보니까 이 육체로 인해서 옛날이다, 지금이다, 조상이다 또 그 조상의 자식이다 이렇게 말들을 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이다, 재작년이다, 올이다, 내후년이다 하고 말들을 해 놓은 거죠.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면서 그렇게 천차만별로 살아나가자니 질서를 지켜야 하고, 문란치 않게 스스로 정립을 하고, 그러기에 이름을 지어 놓고 그렇게 하고 있죠. 그래서 말하자면 지속된 꿈이지마는 지속된 실상의 삶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지속된 삶의 근본을 알고…. 그 근본의 도리가 생로병사라고 하고 또는 고집멸도 사제법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됐다는 겁니까?

우리가 어떠한 진화력을 얻어서 탈바꿈을 하고 자꾸 지속된 한 발을 떼어 놔야겠기에, 결국은 진화라는 과정에 의해서 우리가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과정을 고가 없이는, 그런 과정이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해서 고집멸도라고 말씀을 했겠죠. 사계절이 그대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추위를 무릅쓰고 또는 더위를 무릅쓰고 또는 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떨어졌다 피고 떨어졌다 피고 이렇게 지속되는 나날을 그대로 하면서 거기에서 계발을 한다면, 즉 말하자면 나무와 나무를 접을 붙여서 열매와 열매가 모양이 달라져서 나오게 만들고, 그 연관성으로 인해서 진화력으로써 창조력을 키우고,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정신 개화가 되고, 나아가서는 마음의 실상이, 즉 생명의 실상이 그대로 마음으로서, 한마음으로서 존재가 되고 근본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촛불이 있다 할지라도 성냥을 그어 대지 않으면 불이 되지 않듯이 그거는 누가 켰든 간에 내가 켜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켜진 겁니다. 그것은 촛불이 아니라 바로 마음의 불이죠. 그러니 안팎이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전부 여러분이 작용하는 것이 바로 나의 그 생명의 실상이 있기에, 거기는 없다 있다 하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기에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실상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가 꿈을 꿀 때도 몸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지만 자기라는 그 자체는 그대로 생각한 대로 움죽거리고 있죠. 꿈을 꿨다 안 꿨다 하는 것은 자기가 모르기 때문이지만 항시 밤낮이 없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잠을 자도 잠이 없고 낮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돌아다닌다는 자체가 없고. 여러분은 몸이 다니니깐 내가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나 아닌 참나가 있기에 바로 내가 움죽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꿈엔 꿈대로 내가 움죽거리는 게 아닌가요? 바로 나 아닌 내가. 그 분신이 움죽거리고 있는 그건 환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실제적인 환상입니다. 꿈에 본 자기도, 꿈에 본 상대도, 현실의 나, 이 분신도 바로 현실의 상대고요.

생각 없는 일을 하는 법이 없고 생각 없는 일을 설계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기가 나기 이전에 인연의 소치로 만난 인연들이죠. 인연들이 꿈에는, 우리가 하루를 지낸다 하면 바로 일 년을 지낸 듯이, 그렇게 하룻밤에 일 년을 지낼 수도 있고 삼 년을 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룻밤에 수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살다가 끝을 마치지도 못하고 어떠한 문제가 생겨 가지고선 깨다 보면 새로 한 시다, 새로 두 시다, 세 시다 이런 소리를 하게 됩니다. 깨 보니깐 그렇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시간과 공간이 없는 세계에 도달해 있다가 또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그 시간을 따지면서 또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따질 필요도 없는데 왜 그걸 따져야 하느냐. 한두 사람이 산다면 따질 필요도 없지만 천차만별로 모두 여러 생명들이, 아니 여러 물체들이 살기 때문에 그렇게 따지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시간도 정해 놓고 해도 정하고 달도 정하고 날도 정했죠. 이것을 정하지 않으면 질서가 문란해지고 또는 충성이나 효도도 없을 것이고 아주 고등 동물의 그 행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단군께서 그렇게 질서를 지키게 해 놓으셨던 거죠. 그러자 마음을 기르라고 석가가 탄생했고, 그 후에 여러 가지 종교들이 생긴 원인도 바로 그래서 생긴 게 아닐까요?

가끔 여러분과 같이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혼자 앉았지만 나 혼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과 같이 항상 하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에 과거에도 현실에도 미래에도, 우주 삼세를 두고 말할 때 과거뿐만 아니라, ‘과거’ 하면 억겁을 통해서도 ‘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헤아릴 수 없이 몸바꿈을 했다 할지라도 바로 ‘과거’라 합니다, 한마디로. 그런데 그 과거에 수없이 탈바꿈을 해 가지고 자기 형상을 형성시켰건만 자기는 그것을 아예 모르는 채 지금 현실에 형성된 내가, 바로 내 모습이 난 줄 알고 시간만 따지고 급급해서 날짜만 보고 애를 쓰고, 내가 나라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은 거죠.

그래서 아까도 말했듯이 옛 물도 없고 옛 산도 없고 옛 사람들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언어가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없는 가운데서 우리는 작용하고 이렇게 그냥 그대로 자기의 마음의 지혜에 따라서 인연의 업보를 지을 수도 있고 인연의 업보를 부술 수도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인연의 업보를 없애지 못하는 것은 자꾸 자기라고 하기 때문에, 자기가 한다고 하기 때문에, 매사를 자기가 한다고 그러기 때문에 그 업보를 짓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 모습은 지속될 수 없지만 참자기는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얘기하죠. 참나는 개별적인 나가 아니라 포괄적인 나라고요. 유생 무생이 한데 합쳐지고 일체 만물이 다 합쳐진 이 내공에 의해서 모든 것은 자기가 할 탓이라고 말하겠죠. 그러니깐 그대로 아니다 기다 이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 꿈이다 생시다 이러한 게 붙지 않는 자리, 즉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 자리, 생사윤회라는 말이 붙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서 그대로 여여하게 내가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달을 할 수 있고 상신할 수 있고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능력을 제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진 것입니다.

생명의 실상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가 꿈을 꿀 때도 몸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지만
자기라는 그 자체는 그대로 생각한 대로 움죽거리고 있죠.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그 즉시에 모든 것을 놔 버리고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놓으면서도 그대로, 하고 가는 것이 놓고 가는 것이기에 생각났으면 어떤 사람은 재깍 해 버리고요, 어떤 사람은 ‘아, 내일 해도 괜찮은 건데, 뭐.’ 그러고선 미룬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격은 몸으로도 금방 생각나면 생각나는 자리에서 해치워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거든요. 또 내일 할 일이라면 생각조차 할 필요도 없고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서 하는 것이 항상 그대로 여러 가지를, 억겁 천년 전에서부터 이렇게 여러 가지를 놓고 가는 거죠. 그래서 옛 산은 있어도 옛 물은 없다고 한 말은 그것은 사량에 의한 말이지, 본래 옛 산도 따로 없거니와 옛 물도 따로 없고 옛 사람들도 따로 없다 이 소립니다. 삼천 년 전에도 이러했고 삼천 년 후의 오늘에도 이러할 겁니다. 옛날의 부처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또 옛날의 그 부처가 있기 이전에 부처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떤 때 생각을 하면 참 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한생각을 다시 돌이켜 봅니다. 나는 뭐, 애당초부터 알았나? 내가 옛날에, 벌써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전에 그 모르는 거를 알았다 할지언정, 여러분도 모르는 거를 지금 알았다 할지언정 그것이 삼십 년 전에 알았고 바로 지금 알았다고 해서 어찌 그게 둘이겠는가. 삼천 년을 삼 일로 칠 수도 있고 하루로 칠 수도 있으니 어찌 그게 둘이라고 보겠습니까? 옛 사람들이 아닌 이상. 그 반면에 새 사람도 아닙니다. 새 산도 아니고 새 물도 아닙니다. 헌 물, 헌 산, 헌 사람들도 아닌 반면에 새 것, 새 사람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는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식물들을 보십시오. 옛것들도 아니고 현재 것들도 아닙니다, 그냥 지속하고 있습니다. 저 청청한 푸른 산의 풀잎들도 옛 풀도 아니고 지금 현재 풀도 아닙니다. 그것도 풀잎이라고 우리가 말을 하지만 이름을 다 갖추어서 가져 나왔을 텐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풀 이파리의 이름을 우리 마음대로 지었을 뿐입니다. 이름을 본래부터 가져 나온 건 아닙니다.

그래서 버섯 종류도 여러 이름들이 많지만 요즘 영지버섯이라고 이름 나온 것도 그 버섯을 사람들이 실험해서 보니까 아주 영약이라고 해서 영지버섯이라고 했지요.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 놓고 부르는 거지 본래 이름을 가지고 나온 것은 아니건만 그 버섯 종류의 실질적인 근본이 아주 남한테 이익하게만 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바로 이름도 영지버섯이라고 지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사슴뿔을 용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도, 왜 그렇게 지었을까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해서 지은 겁니다, 모두. 그 물건을 봐서 실험해 보고선 ‘아, 이건 용으로 이름을 지어야겠구나.’ 그걸 먹으면 용기가 왕성해지고 기운이 나고 그래서 활동을 잘 시킨다고 해서 용이라고 했겠지요. 모든 것은 그렇게 해서 이름이 주어진 겁니다.

물은 안 그렇습니까? 제자리에서 있는 것이 물입니까? 고정되게 제자리에서만 있는 것이 물이 아닙니다. 흘러서 또 나가고 흘러서 들어오고, 흘러서 나가고 흘러서 들어오고 이러는 것이, 흘러서 나가도 줄지 않고 흘러서 들어와도 두드러지지 않는 그러한 그 연결됨이 바로 우리의 마음, 즉 말하자면 과거생으로부터 마음이 연결되는 거지 육신이 연결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연결되기 때문에 육신도 연결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옛 사람도 없고 옛 물도 없고 옛 산도 없다는 말이 있죠. 어떤 사람은 그냥, 옛 산은 있어도 옛 물은 없다고 말은 그렇게 합디다마는 그거는 당치 않은 소리라. 그건 내 생각에 당치 않은 생각이니까. 또 그것도 고정되진 않습니다. 내 생각에 말입니다.

공부가 여일히 되질 않아요
질문 금강경을 아침저녁으로 독송을 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이 공부가 통 여일히 되질 않아요. 어떻게 해야 공부가 여일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해서 질문드립니다.

답변 이런 게 있습니다. 옛날 얘기 또 해야 되겠군요. 옛날에 어느 도량에서 학인들이 결제가 되면 한 절에 모여서 참선을 하든가 경을 읽고, 해제가 되면 또 나가서 공부를 하고 그랬습니다. 어느 날 나가서 공부를 하다가 결제가 돼서 다들 들어왔는데 그 절의 주지 스님께서 “너희들은 무슨 공부를 하고 들어왔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전부 무슨 경을 읽었다 무슨 경을 읽었다 하는데 한 분만은 “너는 무슨 공부를 했느냐?” 하니까 “저는 잠자고 밥 먹고 똥 싸고 있었습니다.” 하거든요. 그렇게 똥 싸고 밥 먹고 잠잤다고 하는 말에 “예, 이놈! 공부도 안 하고 그렇게 잠만 자고 똥만 싸고 그렇게 했으니 너는 부목이나 해라.” 하고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부목을 하면서 나무를 들고 패서 스님 방에 불을 때느라고 그 앞을 자꾸 돌아다니거든요. 그러면서 스님께서 노래를 했답니다.

어쩌다가 벌이 말입니다, 벌 있죠? 벌이 어쩌다가 방에 들어가서, 그건 입산한 걸 말하는 겁니다. 어쩌다가 벌이 방에 들어가서 유리가 반사가 되는 거를 보고 그것이 문인 줄 알고 자꾸 입으로다가 거기를 쪼니까 고만 입이 뭉그러져 떨어졌거든요. 쪼다가 몸이 떨어지니까 입도 떨어지더라. 그게 아니라 말이 떨어지더라는 얘깁니다. 몸이 떨어지니깐 입도 떨어지고 입이 떨어지니깐 말이 떨어지더라는 얘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몸으로써, 사량으로써 책을 보고 이론으로다가 이거를 알고 그런다면 이 몸이 없어지면 그것도 없어질 거 아닙니까?

그러나 내 참 내면세계의 참나를, 참나인 주인공을 믿고 물러서지 않고 거기다 모든 것을 맡겨 놓을 수만 있다면, 몰락 맡겨 놓을 수 있다면 바로 그 속에서, 그 가운데서 내 참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사량적인 마음으로써 물질을 보고 그것을 글자 풀이를 하고 그러면서 소리를 내서 읽는 것은 진짜 금강경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누가 경을 읽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그 경을 누가 읽나?’ 그것을 찬찬히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누가 읽고 있을까?’ 하고.

양심의 가책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질문 사람에 따라서 똑같은 정도의 죄를 짓고도 어떤 사람은 아주 가책에 못 이겨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가 죄를 좀 지었기로서니 그게 뭐 그토록 가책 받을 일인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왜 그렇게 나누어지게 되는지요.

답변 그게 두 가지가 다 글러요. 두 가지가 다 나쁘다고요. 가책을 받지 않을 일이라면 그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거는 그저 가서 사과를 하고 이러면 되는데, 그렇지 않은 가책 받을 일, 아예 그렇게 하려면 하질 말아야 되겠지요. 또 ‘그까짓 걸 뭘 그래? 가책을 뭘 받아?’ 이러고 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것이 자기 앞에 돌아오게끔 돼 있죠. 그러니 우리가 그 가책을 받는다 한다면 양심이라도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요다음에 그런 짓을 다시는 안 할 거예요, 괴로워서. 그렇지만 ‘그까짓 걸 뭘 가책을 받아?’ 이럴 때는 그 사람은 능히 그런 일을 더 저지르고도 남음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한 거를 회개하기 이전에 잘못하질 않는다면 회개도 할 것이 없죠. 그래서 어떤 때는 혹시나 잘못되는 일로 갈까 두려운 얘기가 있습니다. “모든 거를 주인공에 맡겨 놔라.” 이럴 때 ‘야, 그럼 나쁜 도둑질을 하고도 맡겨 놓으면 되느냐?’ 이렇게 생각할까 봐 아주 짚고 넘어가는 말이 있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상식과 도의, 의리, 도덕을 갖추어 가지고 나온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서 부모에게 묵은 빚을 갚으며 자식들에게 햇빛을 주면서 이렇게 나가는 이 중도의 참,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 인간의 참마음이 우리 인간들을 조성해 내지 않았나. 그렇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만약에 “도둑질을 해도 거기다 맡기면 되겠군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그 말 자체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니까 아예 대꾸할 건덕지도 없는 거죠.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부처님의 마음 자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 마음부터 헤아려야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우주 만물만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거든요. 그렇게 될 때에는 참, 우리가 부처님이라는 그 뼈다귀 없는 뼈다귀를 세세생생에 우려먹어도 그것은 없어지질 않아요. 젖 같은 그 물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영원토록 간직하게 하고 끄달리지 않게 하는 보배예요. 우려도 우려도 줄지도 않고, 갖다 부어도 부어도 늘지도 않고 항상…. 세상에 그런 보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겉으로라도 부처님 하나만 모셔 놨다 하면 밥은 굶지 않으니 도대체 그 보배는 어떻게 생긴 보배기에 그렇게 좋단 말입니까. 거죽 모습으로 생긴 것도 갖다 놓기만 하면 먹고 살게 해 주는데 하물며 모습 아닌 그 보배는 얼마나 윤택할 것이냐는 얘기예요. 영원토록 말이에요. 아니, 가고 오고 그런 것도 없이 말이에요.

부처님의 주인공과 나의 주인공
질문 부처님의 주인공이나 저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라 그러시는데요, 부처님의 주인공은 무명을 일으키지 않는데 저의 주인공은 왜 무명을 일으킵니까?

답변 무명이 달리 무명인가요? 그 도리를 모르니까 무명이지. 무명도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무명이 붙지 않는 것도 내 마음에서 나오는 거예요. 예전에도 얘기했죠? 잠재의식 깊은 속에 만약에 녹음테이프가 하나 있다면, ‘일심이라면’ 하는 소립니다. 그 공한 일심이라면, 자기 주인공 그 자체가 테이프라면 말입니다, 녹음이 된 데다가 다시 녹음을 하고 또 녹음이 된 데다 다시 녹음을 하고 자꾸자꾸 이렇게 가면 그 앞서 녹음한 것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런다면 그것은 무명이 붙지 않는 것입니다. 그대로 놓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대로 놓고 가는 것입니다. 무명이라는 것도 이름을 붙여서 무명이지 무명이 없으면 부처를 이루지 못해요. 망상이 없어도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분별이 없는데 어떻게 부처를 이루겠소? 그럼 목석이고 송장이지. 또 생명의 그 근원, 뿌리만 있다면 보이지 않으니까 무효예요.

그래서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고 또 근본적인 생명의 그 뿌리를 무시할 수도 없고, 양면을 다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씀씀이를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그런 뜻은, 넓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렸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그런다면 위로는 부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라는 그걸로만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 하나를 놓고 축소해서 작게 생각을 해 보십시다. 그러면 내 위로는 참자기 그 자체를, 참자기를 존중하면서 아래로는 자기 몸뚱이를 올바르게 끌고 다니는 겁니다. 그럴 줄 알아야 남도 올바르게 끌어 주지 않습니까? 내 행동이 발라야 남의 행동도 스스로 “저 사람 정말 배울 만해. 말과 뜻과 행이 올바르기 때문에 저 사람은 정말 본받을 만한 사람이야.” 이렇게 말씀들 하시죠.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안될 때, 하나라도 어긋날 때 그것은 업보가 되고 유전이 되고, 바로 무명이라고 이름해서 붙일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무명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고 부처라고 붙일 것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살고 돌아가려니까 뭐든, 돈이라고 이름을 지어 놨고 또는 물건에 이름을 붙여 놓은 겁니다. 이렇게 그 이름을 불러야 되겠으니까. 어린애를 낳아도 이름을 붙여서 “아무개!” 이래야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이름을 붙여 놓은 것뿐이지 이름이 사실은 그 사람 진실, 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름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그 이름이 대동소이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도 없는 거죠. 그러니까 같이 공했다는 얘깁니다.

그거고 저거고 다 한마음에서 나오는 거니까, 나쁜 마음이 나오는 것도 그 마음에서 나오는 거, 좋은 마음이 나오는 것도 그 마음에서 나오는 거, 좋은 마음이 나오면 좋은 행을 할 것이고 나쁜 마음이 생기면 나쁘게 행을 할 것이니까 자기 참주인공에 모든 거를 맡겨 놓고 믿고 물러서지 않고 거기다 관하면, 그저 닥치는 대로 거기다가 관해서 의정(擬定)하면…, 모든 것을 의정(擬定)해서 놓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놓고 알면 아는 대로 놓았을 때 비로소 참 생명수의 근원이 나에게 홀연히 알려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가정에 지금 이렇게 풍파가 많고 병이 많고 죽겠는데, 급해서 죽겠는데 무슨 주인공을 찾고 전부 거기다 맡겨 버리래? 아니, 난 지금 당장 급한데!” 이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뿌리가 싱싱하면 가지도 싱싱할 것이고 썩지 않을 것입니다. 이파리도 싱싱할 것입니다. 이파리 썩고 가지가 썩고 그런다고 해서 애를 쓰지 마시고 뿌리만 싱싱할 수 있다면 그 가지는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파리도 싱싱하게 아주 푸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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