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윤창화 지음|민족사 펴냄|2만 5천원
당송 선원 생활문화, 철학 등 8년간 탐구
최초의 선원…백장회해가 창건한 백장사
납자 시스템은 법문, 독참, 청익, 좌선 등
깨달음 격론 벌어지는 치열한 전장 역할

[현대불교=김주일 기자] ‘선의 황금시대’인 중국 당송시대 선원서는 어떤 방법으로 납자들을 지도했을까? 우리나라 선원처럼 화두를 준 후 무작정 앉아 있으라고만 했을까? 아니면 별도의 지도가 있었을까?민족사 윤창화 대표〈사진〉는 최근 자신이 펴낸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서 “당송시대 선원총림의 납자 시스템은 법문, 독참, 청익, 좌선 등 4가지 였다”고 설명한다. 이어 윤 대표는 “이 4가지 시스템은 가람 설계도에도 그대로 적용돼 가장 중요한 당우는 법당(설법당), 방장, 승당(선당)으로 이 세 당우가 수행 및 오도 시스템의 핵심 건물이었다”고 밝혔다. 이번에 윤 대표가 펴낸 책은 선종의 여러 청규와 선문헌을 바탕으로 중국 중세(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각종 제도, 가람 구성, 생활철학, 그리고 그 사상적 바탕 등 선종의 생활문화에 대한 전반을 탐구한 저술이다.

윤 대표는 책속에서 중국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철학과 각종 제도, 문화, 생활상, 가람 구조, 그리고 납자 교육 및 지도 시스템의 핵심은 중생을 부처로 만들고 범부를 조사로 만드는 데(成佛作祖)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즉 단순한 종교 교단이 아니고 미혹한 인간을 전인적 인간으로 형성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침묵이 감도는 정적인 장소가 아니라 방장이 피로에 시달릴 정도로 깨달음의 격론이 벌어지는 치열한 전장이었다고 말한다.

역사상 최초의 선종사원은 당(唐) 중기 백장회해(百丈懷海:720~814)가 창건한 대웅산(백장산) 백장사(백장총림)이다. 그 이전에는 독자적인 선종사원이 없었다. 선승들은 율종사원에서 당우 한 채를 빌려 함께 기거(寄居)하는 이른바 더부살이 형식, 또는 독살이 형식이었다. ‘선종의 건설자’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선승’인 백장회해는 선종의 이상 실현을 위해 비로소 율종사찰로부터 독립해 처음으로 독자적 사원을 가졌는데, 그는 백장총림을 세우면서 몇 가지 중요한 대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불전(대웅전)을 세우지 않고 법당(설법당)만 세운다. 둘째, 생활경제 즉 총림의 식생활 문제는 보청(노동)으로 해결한다. 셋째는 주지(방장)는 불조로부터 친히 법을 부촉 받은 법왕이므로 그를 높이기 위해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등이다. 이 세 가지는 그 역사적 사실을 의심할 만큼 놀랄만한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는 무엇을 의미할까? 저자는 우선 선종사원서 종교적 기능을 주로 하는 불전을 건축하지 않고, 불상도 모시지 않던 당나라 때 선종사원에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대 조사선의 선승들은 반야지혜가 투철했다. 그들은 사상적·정신적으로 치열하게 투쟁한 끝에 ‘부처’란 목석이나 금은으로 만든 불상이 아니고 반야지혜가 곧 부처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반야지혜가 작동·가동되지 않는 부처는 나무토막이나 돌조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잘 아는 김동리의 단편소설 〈등신불〉은 단하천연 선사가 불상을 쪼개서 불을 땠다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을 소설화한 것인데, 이 선화가 시사하는 바는 목석으로 만든 불상은 지혜 작용이 없는 조각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불상 속에는 부처가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금강경에는 제5분 여리실견분에는 대승의 여래가 수보리에게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상(身相)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하자, 수보리는 “세존이시여, 신상에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부분이 있는데, 저자는 이것이 불전을 세우지 않고 법신불이 활발발하게 작용한 법당을 세운 사상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런 정신은 불전이 세워지기 시작한 송나라 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비록 시대적 요청에 의해 선종사원에 불전이 세워지고는 있었으

윤창화 민족사 대표
그 규모가 왜소해 법당의 규모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고, 신자들도 각자가 개별적으로 불전에 가서 기도할 뿐, 현재 우리나라처럼 부전스님이 불전에 가서 불공을 올려 준다거나 기도·염불해 주지는 않았다. 불전은 있어도 아직 불공의식 등 염불문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북송시대 불전의 위상은 낮았고, 그 위치도 한쪽 모퉁이에 있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칠성각이나 독성각 정도였다. 선당(禪堂)의 납자들은 그쪽으로 일체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고 저자는 책 속에서 밝힌다.

저자가 이 주제를 탐구한 출발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토(京都)에 있는 선종사원을 답사하고 나서부터다. 교토의 선종사원인 묘신지(妙心寺), 겐닌지(建仁寺), 료안지(龍眼寺), 텐류지(天龍寺), 쇼코쿠지(相國寺), 도후쿠지(東福寺) 등과 후쿠이에 있는 에이헤이지(永平寺) 등 선종사원은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사원의 규모와 정갈함, 방장(方丈, 주지실) 당우와 선종 특유의 석정(石庭) 정원 등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쓰게 한 발분망식의 계기였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8년 동안 매우 행복했다. 이 주제(선종사원, 선원총림)와 대면하면 어느새 번뇌 망상 등 일체를 잊고 탐구삼매에 들었다”고 술회한다. 저자에 따르면 선종사원 즉 선원총림은 사후 왕생극락이나 현세 이익을 기원하는 종교적·기복적 장소가 아니고, 선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완성시키기 위한 전문적 수도장이었다. 선원총림은 중생을 전인적 인격자인 부처로 만들고, 불교적 바탕이 전혀 없는 범부를 위대한 조사로 만드는 성불작조(成佛作祖)의 공동체였던 것이다. 선불교는 이와 같은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청규, 생활방식 등 모든 제도를 수행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납자 지도 시스템과 철학을 완성시켜 갔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모습과 철학을 다양한 문헌을 통해 고증하며 세밀하고 집요하게 써내려 간다. 선종이 율종으로부터 독립해 그 나름의 독자적 체계를 이룩하고, 규모와 사상적 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던 이유를 우직하게 탐구한다. 그가 이 연구로부터 이끈 핵심은 당송시대 선승들은 공(空)을 실현키 위해 모든 현상과 번뇌망상은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다고 파악했고, 정신적으로는 관념의 집착을 타파한 것이다. 그 상징적인 말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인 살불살조(殺佛殺祖)’이다.

실제로 선종서는 불(佛)이나 성(聖)에 대한 권위를 배격했고, 불과 불상을 그다지 신성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선원 납자들이 대웅전에 가서 조석예불을 하지 않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데, 권위의 장막(부처와 조사)을 걷어 버렸을 때 비로소 독탈무의(獨脫無依)한 자유인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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