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레 달빛에 밤이 깊어간다. 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내가 눈처럼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밤바람의 친구가 되어줘야 할까 보다. 지인 하전거사(夏田居士)의 단시, ‘놀이’에 함께 어울리고 싶기 때문이다.

“솔가지에 얹힌 눈 한 줌 / 툭 떨어뜨리며 혼자 노는 밤바람”

만물이 잠든 고요한 밤이다. 이런 밤에 주저리주저리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는가?

단 두 줄의 짧은 시 속에 온 우주를 담았다. 우주는 하루 속에 깃들고, 하루는 낮과 밤을 껴안는다. 바람이 밤에 눈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낮에 솔가지에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마조(馬祖)대사가 임종 직전에 읊었던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다. 저자는 온전한 하루, 해님과 달님을 노래한다.

시의 침묵 너머로 눈 녹는 소리 들려
바람돼 ‘無我 놀이’에 빠져보고 싶다

바람의 놀이터는 무한 공간이다. 솔가지에 얹힌 눈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 깃털처럼 가볍다. 눈은 땅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바람은 하늘도 땅도 아닌 빈 공간에서 노닐고 있다. 하전거사는 물리적인 공간을 초극하여 무위(無爲)의 세계에서 소요(逍遙)하고 있다.

그렇다고 바람은 현존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눈은 존재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솔가지에 얹혀있다. 어쩌면 누가 이곳에 얹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후 하고 불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아슬아슬 위태로운 모습은 나를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바람은 이런 중생을 마냥 바라만 보고 기다릴 수 없다. 달걀이 부화하려는 기미를 알아채고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 깨뜨리듯이 바람은 눈을 툭 건드린다. 바람의 줄탁은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사랑이다.

바람은 시청각 놀이를 즐긴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서 소나무를 덮었다면 세상은 온통 무채색이겠지만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소나무는 제 빛을 잃지 않고 오히려 푸르다. 여기에 달빛마저 교교하게 비췬 밤은 시원(始原)의 적요(寂寥)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만, 정적(靜寂)이 깨진다. 솔가지에 얹힌 눈이 흩날리지 않고 그대로 떨어진 것이다. 바람이 눈의 본질을 해체하지 않고 공간만을 이동시켰다. 이때 피어나는 아름다운 소리. 툭, 우주가 열리는 소리이다.

눈 한 줌은 한 점 우주이다. 깊은 겨울밤을 툭 건드리는 것은 지고(至高)의 경지에 이른 선(禪)적 놀이이다. 응축된 시의 첫 행이 두 번째 행에서 기화(氣化)한다. 위와 아래,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진다. 가고 옴이 없는 바람은 이렇게 무화(無化)된 정적 속에서 삼매(三昧)의 유희를 즐긴다. 겨울 속에서 봄빛이 새어 나오고, 시의 침묵 너머로 눈 녹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나도 바람이 되어 무아(無我)의 놀이에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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