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생각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그대로 해 나가라

 

(지난 호에 이어서)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가지각색의 사생(四生)들이 다 내 아픔 아닌 게 없고, 내 몸 아닌 게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없느니라. 그래서 그것을 다 얻어서 전부 꺼내 줘도 줄지 않는 그런 넓은 마음으로서 어떠한 짐승이 원하고 벌레가 원한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 벌레 속에 응신(應身)으로 드셔서 건져 주신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물리가 터져서 지혜가 생겨 가지고 진화가 되게 만드신다 이 소리예요. 그러니 어떤 거 될 때 부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벌레가 원했을 때 응신으로서 응(應)할 때에 ‘내가 요런 때 부처다’ 이럴 수도 없고, 하하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됐을 때 ‘내가 요런 때 부처다’ 이럴 수도 없고, 또 병자가 원했을 때에 약사(藥師)로 응신이 돼서 응해 주실 때에 ‘내 요런 때 부처다’ 요럴 수도 없고 그래서 여래(如來)다 부처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이름을 지었다면 부처가 아닌 것이요, 부처가 아닌 것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구정물이 들어오면 바꿔서 새 물로 쓰고
맛없는 걸로 들어오면 맛있는 거로 바꿔 먹어라.
이게 자유자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작위(作爲) 없는 바로 자유인이 돼야 하는 거죠. 어떠한 집착을 한다면 그냥 가차 없이 허용치 않는다는 얘깁니다.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자기가 뭐 ‘이런 거는 잘못했으니깐 내가 이거는 잘해야지.’ 이런 생각을 해서 없애는 게 아니라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깨달은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자유스럽겠습니까. 좀 해 보세요, 어떤가. 뜨거운 물이다 찬 물이다 내가 말할 수는 없으니깐요. 먹어 봐야 알죠? 중생과 부처가 차이가 있는 것은 무(無)의 떡과 유(有)의 떡을 한데 껴서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거와, 유의 떡도 착이 끼어 가지고 요것은 요렇게 먹고 조건 조렇게 먹고 하며 그것도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과의 차이죠. 여러분 지금의 삶은 어느 쪽입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할까요? 허허허.

이거를 잘 듣고 한번 뒤집어서 우리가 그대로 듣고 보는 그 자체가 그대로 여여함이다,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다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함이 없이 하는 것이죠. 반면에 여러분은 그냥들 사니까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냥들 사는 거와 함이 없이 살림을 하는 거와 차이가 있겠죠. 그러니 여러분도 여기저기다가 착을 두지 말고 무조건, 못났든 잘났든 자길 믿고 자기가 하는 일들을 자기한테 그냥 다 맡기시라 이겁니다. 그러면 머지않아서 꼭 결과가 나올 겁니다. 결과 없는 결과가 나올 겁니다.

질문자1(남) 스님께서는 이 공부를 해 가면서 잘해야 되겠다, 빨리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까지도 다 놓으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한편 그런 걸 놓으면서도 나름대로 욕심은 있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 가르쳐 주십시오.

큰스님 욕심이 있고 없고 간에 자기 분수대로, 자기 능력대로 지금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거기에는 자기의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하고 덜함도 없겠죠. 지금 자기 능력대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 능력대로 살고 있는 그 자체를 그대로 자기가 하고 있고 자기가 살고 있으니까 아까 얘기한 대로 주인공, 자기한테 되놓는 겁니다. 현재 자기가 과거 자기한테 그냥 다 놓듯이, 현재 자기와 과거 자기가 둘이 아니게 바로 삼심(三心)이 일심(一心)으로 공(空)했으니까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하고 가는 거 자기한테다 놓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이 그냥 자기가 하고 자기가 그냥 하고 있는 자체, 자기가 공했으니까, 주인공이니까 그대로, 그대로 놓고 아주 편리하게, 편안하게 그대로 ‘네가, 네놈이 하는 거니까 너만이 해결할 수가 있고, 너만이 잘못된 거를 다시 바꿀 수가 있고, 너만이 건강하게 이룰 수가 있고, 너만이 화목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 안 그렇습니까? 아주 냉정하게 판단해 보십시오. 자기가 살고 있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고, 자기가 화목을 도모해야 하고 하는 것이 바로 자기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주인공을 얍삽하게 보진 마십시오. 포괄적인 자기니까요.

질문자1(남)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비슷한 질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체를 주인공 자리에 맡겨 놓고 관하여 보는 그 수행에 있어서 어떤 대목에서 스님은 아주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라고 하셨고 또 한편으로는 그 관하는 것을 몸부림치듯이 하라 이렇게 표현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큰스님 그래요.

질문자1(남) 그 둘을 중생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가르쳐 주십시오.

큰스님 아이, 생각해 보세요, 글쎄. 몸부림 안 치게 생겼나? 아휴! ‘네놈으로 인해서, 네놈으로 해서 이게 전부 저질러진 일인데 네놈이 해결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 네놈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서 몸부림치지 않으면 어떡할 겁니까? 그리고 아주 냉정하게 판단해 보세요. 뭐 딴 놈이 거기 개재하는 게 아니니깐요.

과거에도 그놈이 살았고 현재에도 그놈이 지금 하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놈이, 그놈이 지금 모두 하고 가는 거죠. 내가 여러분한테 가르칠 때 부처님더러 요놈 조놈 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하하하. 제 놈이 한 거니까 제 놈한테다가 모든 걸 맡겨라! 요거 작업부터 해야만이 정말 신성한, 청정한 부처가 나온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밥도 안 해 놓고 밥을 먹어서 배부르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다 씻어서 밥을 해서 다 해 놓고 숟가락으로 떠먹을 때, 떠먹는 과정도 있어야 되겠죠? 그래야 떠먹을 때 맛을 알죠. 이건 해 놓지도 않고 먹으려고만 한다면 어찌 그게 먹어지겠습니까?

여러분, 그저 살아생전에, 어차피 이 세상에 나온 것을 한번 선의 칼을 뺀 거와 같이 생각하시고 절대로 그냥 낄 수는 없다고 모두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몸부림치면서 ‘네가 일을 저질러서 전부 요렇게 살게 만들어 놓고 또 네가 그렇게 진화시켜서 이렇게 인간으로도 형성시킨 거는 감사하지만 물주머니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선 그냥 그저 제 놈한테다 제가 한 일 다 놓으세요. 그런데 안 놔진다고 그러죠? 사회에 나가서는 뭐 어떠니 저떠니 하고 안 놔진다고 그러죠? 지난번에도 내가 그런 소릴 들었는데 안 놔지는 게 뭐 있습니까? 그대로 하는 거지. 그대로 생각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그대로 해 나가라는 거지, 누가 잘한다 못한다 이거 따지고 살랍니까? 회답이 아주 말끔하게 씻어지진 않았지만 공부한 것도 말끔히 씻어져서 공부가 된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되겠죠. 그러니까 그저 그렇게 잘 해 보신다면은 선생님 같은 분들은 잘될 겁니다. 하하하.

질문자2(남)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을 거울삼아서 습이 나오는 대로 되놓고 있습니다마는, 나의 습은 심야와 같이 깊어 청정한 나를 발견하려면 얼마만큼까지 가야 되는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수억겁 쌓인 죄업이라도 한생각에 다 녹일 수 있다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업이 녹는 도리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지금 말씀하고 마이크를 놓고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그 사람이 누굽니까? 그거를 그렇게 들었다가 놓고 제대로 이렇게 앉아 있는 그 사람이 누굽니까?

질문자2(남) 저입니다.

큰스님 그렇죠? 그런데 자기인 거를 번연히 알면서 자기 탓이라고 할 때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자기 탓이라고 합니까?

질문자2(남) 물론 큰스님께서는 테이프에 입력되어진 모든 습을 다 지우고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마는 그 부분 그런 것들이 상당히 좀 힘이 들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큰스님 힘들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생각할 때는요. 지워서 없애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생활하고 나한테 닥치는 것을 그대로 그 공부의 재료라고 생각하시고 또 그냥 생활이 그걸 끊어 버렸다고 해서 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자꾸 나와야 내가 습득을 하고 내가 알게 되고 내가 경험을 하고 이렇게 되는 거지요. 만약에 그게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목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습이 나온다고 애를 쓰지 마시고 습이라고 생각지도 마세요. 나오는 대로 그대로 거기 놓고 행하면 그대로 되는 거지 무슨 습이 이렇게 많아서 내가 이걸 없앤다, 이걸 끊어야 되겠다 합니까. 이런 생각조차도 하지 마세요. 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습인 것이지 습이라고 생각 안 하면 습이 아닌 겁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그 습이란 말을 아주 쉽게, 자꾸 하는데요, 나는 그래요. 살아 있는 동물이라면 어떠한 거든지 보면은, 들으면은, 하면은 할 수 있는 그러한 재능이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그것을 나쁘고 좋고 그것만 아니까, 정히 나쁜 거는 하지 않고 좋은 것만 합니다. 또 나쁜 거를, 불의를 당했을 때 그거를 보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 모든 행하는 것을 그대로, 그대로 그냥 ‘아, 이 주인공 놈이 다 그대로 하고 그대로 해결하고 그대로 넘어가는구나!’ 그냥 이렇게 편리하게 생각하세요. 그 이름에 그냥 막혀 가지고는 쩔쩔매지 말고요. 좋은 생각이 나와도 습이라 그러는 거예요, 이거는. 허허허. 아니, 좋은 생각을 해서 습이라고 안 그랬더라면 좋은 행이 그대로 나오고 좋은 경사가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요건 또 습이구나! 요거, 이거!’ 이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냥 습이 되는 거죠.

내가 항상 얘기하죠. 그 뭡니까? 저 무학 대사가 꿈 해몽한 이치요. 이성계의 꿈 얘기 한 거 있죠? 만약에 무학 대사가 그 꿈을 그대로 나쁘게 해석을 했다면 나쁘게 됐을 겁니다. 그런데 좋게 해석을 하고 좋게 이끌어 주니까 그냥 지금 말로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만약에 꽃이 활짝 피었다가 그냥 우수수 다 져 버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면 ‘어이구, 이젠 죽었구나! 이젠 죽었어!’ 하고 모두 탄식을 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꿈도 생시고 생시도 꿈이니 절대로 꿈이 이렇다고 해서 언짢아할 일이 없고 바꿔서 자꾸 써라. 구정물이 들어오면 바꿔서 새 물로 쓰고 이렇게 자꾸, 맛없는 걸로 들어오면 맛있는 걸로 바꿔 먹어라. 이게 자유자재입니다. 그런데 왜 자유자재하질 못합니까? 돈이 들어서 자유자재 못합니까, 누가 막아서 자유자재 못합니까? 그렇게 하라는데도 그냥 어떤 양반들은 꿈을 꾸고선 “아이고, 꿈을 이렇게 꿨으니까 이거를 어떡하면 좋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어요, 그거 한생각이면 바꿔 쓸 거를, 글쎄! 하여튼 지금 말하고 지금 얘기하고 그러는 사람이 그 주인공 놈이니까, 하하, 그냥 주인공 놈이 과거도 살았고 현실도 살아나가니까 그저 과거 것이든 현실 것이든 그냥 닥치는 대로 그냥 ‘주인공, 네놈이 해결해!’ 하고 다 거기다 맡기세요.

질문자2(남) 믿고 맡기고 되놓는 생활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큰스님 예. 내가 있다고 세우지 말고요.

질문자3(남) 저희가 생활하는 과정에서는 믿고 맡기고 이렇게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마는 그, 생활하는 과정에서 늘 어떤 대상 인물이라든지 어떤 사물이든지 어떤 현상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하고 아껴야만 되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즉 다시 말씀을 드리면은 홍수가 났을 경우에는 둑이 무너질 걸 대비해서 밤새도록 안달을 하면서 둑을 쌓기도 하고, 또 사업을 한다든지 장사를 한다든지 저희가 회사에서 일을 할 때는 상대방 경쟁사라든지 경쟁자의 어떤 전략에 대해서 또 대비하고 사전에 사사건건 모든 것을 점검을 하면서 또 일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또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는 아이들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게 됨에 따라 오히려 가족들 간에 문제가 발생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착이라는 것과 다소 혼동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맡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더더욱이나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가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좀 더 가르침을 바라겠습니다.

큰스님 글쎄, 자식들 때문에 안달을 하든 또는 사업 때문에 안달을 하든, 둑이 무너져서 안달을 하든 그걸 자기가 왜 걱정을 해요? 그렇게 안달하고 사는 것이 바로 주인공 놈이 하는 거라니까요. 어때요? 누가 그렇게 하지 말라는 사람이 있었나요, 그렇게 하라는 사람이 었었나요?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거는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 주인공을 믿고 하는 사람들은 열 번 뛸 거 한 서너 번밖에 안 뛰거든요. 그렇게 뛰면서 하는 것을 그대로 주인공이 하는 거야. 왜 자기가 괜히 끼어들어서 나는 이렇게 뛰고 이러는데 주인공 따로 또 두고…. 그럼 자기 따로 있고 주인공 따로 있는 게 되잖아. ‘자기가 하는 거 그대로 습이 돼서 이렇게 뛰는구나. 이거 주인공한테 다 놓지 않고 이렇게 뛰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하고 있고 뛰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그냥 주인공이 하는 거야. 이해가 안 가요? 응? 그냥 애들을 위해서 걱정하는 것도 또 사업을 위해서 뛰는 것도 그대로, 그대로 하는 것이 주인공 놈이 하는 거라니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주인공 놈이 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채찍으로 채찍질을 하기 위해서 ‘주인공, 이렇게 지금 하고 가는 일, 너만이 해결할 수 있고 잘 이끌어 갈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되놓는 것은 자기더러 자기가 하는 소리예요. 그런데 현재 자기를 주인공하고 둘로 보질 말아요. 둘로 본다면 ‘나는 이렇게 뛰는데, 주인공한테 이렇게 맡기지 않고 나는 뛰는데….’ 이렇게 생각이 들거든요. 주인공이 그렇게 뛰고 지금 가고 있잖아! 몸뚱이는 주인공 시자니까. 마음의 시자거든요. 그러니까 마음과 몸뚱이와 생명과 셋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라고 했으니까 합쳐서 주인공이야. 주인공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고 해서 나는 착이 있고 이렇게 놓지를 못하고 뛴다고 생각질 말고 그대로 주인공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를 그냥 시인하고 넘어가라 이 소리예요. 그러면 아무 걱정이 없잖아요. 둘로 볼 것도 없고요.

질문자4(남) 최근에 조상님과 큰스님, 주인공 자리 그리고 제가 둘이 아님을 간절히 느낄 수 있는 새해맞이 촛불재가 있었습니다. 저희 광주에서도 많은 분들이 동참하여 그야말로 마음의 촛불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질문 하나 올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가령 삼형제가 함께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일반적으로는 촛불재를 모실 때 어떤 한 분만이, 예를 들어서 큰 형만 모신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촛불재도 백중이나 또는 개별적으로 재를 모시는 등 여러 번의 행사가 있습니다만 과연 이런 뜻 깊은 행사를 어떤 형제가 대표로 하는가, 아니면은 한 번만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큰스님의 법음을 받들고자 합니다.
큰스님 이 세상에 나올 때 제각기 다 혼자 나오죠? 갈 때도 혼자 가요. 대신 가 주는 사람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밝히는 것도, 컴컴한 두뇌를 밝히는 것도 바로 제각기 각자 있는 거죠. 그런데 환경에 따라서, 예를 들어서 식구가 오지 못하고 하지 못할 때에 그 한마음으로서 대신하는 거지, 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혼자 대표로 하면 되지.’ 이러지는 마세요. 촛불재라는 것은 이 모든 유의 법이나 무의 법에서 내가 형성되고 살아나갈 때에 컴컴했던 일을 다시금, 내 깊은 마음으로 인해서 두뇌로 밝은 물리 지혜를 내기 위해서, 또 항상 뿌리가 깊은 밝음을 스스로서 밝게 진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이건 들고 켜고 하는 데에 방편이라고 하지마는 방편이자 진실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거나 이렇게 열심히 뛰는데도 안된다거나 이런 것도 업에 속하는 거니까, 그것도 본인이 촛불을 들고서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 주거나 부모가 해 주거나 이래도 그건 훨씬 더 물리가 터지게 돼 있는 겁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조건이죠. 내가 해 놓지 않고 내가 무엇을 받을 게 있겠습니까? 내가 해야만이 한 것만큼 받을 겁니다. 그러니까 촛불재라는 것이 아주 못났든 잘났든 또는 업보가 많든 업보가 적든 하여튼 누구나가 다 해야 될 일이라고 봅니다.

예전에도 원주에서 이런 예가 있었지요. 아들이 뭐 둘이나 되나요? 단 하난데, 그냥 공부를 영 안 해서 남을 따라설 수가 없어요. 안 자고 공부를 하는데도 그렇대요. 그래서 해마다 이 촛불재를, 그때도 했는데 하여튼 그 어머니가 그 소릴 듣고 그냥 아들의 촛불을 저녁마다 자기가 켠 모양입니다. 그런데 일 년 내지 몇 개월 안 가서 물리가 터져 가지고 그 반에서 일등을 하더랍니다. 이것이 거짓이 아니에요. 이것이 내가 한 것만큼 내 앞에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렇게 두뇌가 컴컴했던 것이 그렇게 밝아졌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제가끔들 촛불재 하는 거는 상당히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질문자4(남) 두 번째 질문 올리겠습니다. 제 자신이 4년 전에 있었던 교통사고로 인하여 사실은 한마음 법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이 육은 덤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공부를 이 몸이 있을 때 그야말로 정진해야겠다는 것과 저 자신 또한 이렇게 덤으로 사는 마당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이 부처님 회상에 모이신 모든 분들이야 전부 다 아시겠지마는 저처럼 이렇게 우둔한 사람을 위해서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거기에 대해서 큰스님의 감로법을 청합니다.

큰스님 우리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금속은 세계적으로 안 쓰이는 데가 없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금(金)이라는 것은 마음의 에너지라고 볼 수 있겠죠. 그 마음의 에너지가 없으면 여러분을 이끌고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듣는 순간 가고 옴이 없이 천 리라도 한 찰나고 요 대문 밖도 한 찰나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얘기와 같이 만약에 내가 심부름꾼이라면 한 찰나에 그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주인공에다 되놔라 하니깐 업신여긴단 말이에요, 자기를. 하하하. 자기 주인공을 업신여기죠. ‘아이고, 나한테다 내가 놓으래?’ 이러고 업신여긴단 말입니다. 그 업신여기는 버릇을 갖지 마세요. 항상, 자기의 자기한테다가 ‘주인공!’ 하면은 겸해서 항상 에너지가 거기에 동참합니다. 즉 네 마음 내 마음이 둘이 아니게 동참이 되죠. 그러니까 그 주인공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죠? 업신여겨서도 안 되죠. 자기면서도 자기가 아니고 자기가 아니면서도 전체가 자기고 그러니 자기 주인공을 어떻게 업신여깁니까.
‘자기 주인공이 일 저지른 걸 자기 주인공이 해결해야 된다’ 하고 거기 믿고 놔라 이거죠. 놓는데 자기가 이렇게 이런 공부를 하러 왔으니까 인연이 된 거죠. 인연이 됐으니까 둘이 아닌 거죠. 그러니깐 천리만리라도 얘기 소리를 듣는 순간 그냥 가고 옴이 없이 갑니다. 하하하. 마다 안 하고 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나는 힘이 없는데….’ 이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힘이 없든 있든 막론하고 그냥 나투니깐요. 하하하. 그 믿음, 같이 한마음으로 나투어 준다는 믿음 때문에 다 나투는 거죠. 육안으로는 오고 가는 게 보이지 않겠지요. 너무 빛보다 더 빠르니깐요.

※위 법문은 대행스님께서 1994년 2월 20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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