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정토종 제9조 우익(益) 대사

“선종과 교종 양쪽에 두루 통달하시고
깨달으신 바는 부처님과 다름없이 같으시네.
미혹된 업 끊지 못하면 부서진 그릇과 같으니
법비(法雨)를 만나신 후 이전에 쌓은 공명 버리셨네.
이 힘으로 염불수행 하여
결정코 현생에서 새장(윤회)을 벗어나고자 하셨네.
도 닦는 이들에게 간절히 권하신 말씀 있으니
서방에 왕생함이 참으로 부처님을 계승하는 것이니라!”

선정쌍수(禪淨雙修)의 기반 다진 선지식
위 게송은 중국 근대의 고승인 인광 대사가 정토종 제9조 지욱(智旭) 우익 대사(益)를 찬탄한 게송이다. 지난 회에 소개한 연지 대사와 마찬가지로 우익 대사는 선종과 교종, 정토종까지 통달한 대 선지식이었다.
우익 대사가 연지 대사의 〈죽창수필(竹窓隨筆)〉을 보고 발심하여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비슷한 수행법을 닦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인생과 우주의 문제 참구
무문관 수행 중 염불 결심
서호사 창건, 염불법 펼쳐

정토종 제6조 영명 연수 선사로부터 본격화된 선정쌍수(禪淨雙修: 선과 염불을 함께 닦음)의 전통이 제8조 연지 대사에 이르러 빛을 발했다면, 제9조 우익 대사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기반을 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구두선(口頭禪)의 병폐를 낳던 선(禪)에 활력소가 됨은 물론, 아녀자들이나 하던 염불수행이 당대 최고의 고승들이 닦는 최상승의 수행법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우익 대사는 그의 문집인 〈영봉종론(靈峰宗論)〉에서 선과 염불이 상호 모순되는 수행법이 아니라, 둘 다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탁월한 행법임을 역설하고 있다.

“참선자가 서방에 왕생하고 싶다면 참선을 염불로 바꿀 필요는 없다. 다만 ‘믿음’과 ‘발원’을 갖춘다면 참선이 바로 정토수행이다. 또한 염불이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에 이르면 주관과 객관을 모두 잊고 곧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한다. 이 어찌 도를 깨침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참선과 염불은 둘 다 도를 깨칠 수 있으며 둘 다 서방에 왕생할 수 있다. 다만 의심(疑情)이 있으면 곧 참선이고, 의심이 없으면 곧 염불이다. 사람들이 수행을 시작할 때 스스로 살필지어다.”

명대(明代) 4대 고승의 한 분으로서 모든 종파의 존경을 받았던 우익 대사(1599~1655)의 행장을 따라가 보면 참선으로 견성(見性)까지 한 선사가 왜 염불을 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대비주 지송으로 극락왕생 발원
팔부도인(八不道人)이란 별호(別號)로도 잘 알려진 대사의 휘(諱)는 지욱(智旭), 호(號)는 서유(西有)이다. 대사의 속성은 종(鍾), 이름은 제명(際明) 또는 성명(名聲)이라 하고, 자(字)는 진지(振之)이다. 강소 오현 목독진(江蘇 吳縣 木瀆?: 현 강소성 소주)에서 태어났으며, 모친은 김(金)씨(이름은 대련)이고 부친은 기중 공(岐仲公)이다. 부친이 백의관음보살의 대비주(大悲呪)를 10년간 지송(持誦)하여 꿈에 관음보살께서 아들을 보내주는 것을 보고 나서 대사를 낳았다고 한다. 때는 명나라 만력(萬曆: 神宗) 27년(서기 1599년) 5월 3일이었다.

대사는 7세에 채식을 하고, 12세에 유교 경서를 읽었는데, 성리학을 존중하고, 불교와 도교를 멸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에 냄새나는 오신채와 술을 다시 먹고 불교를 배척하는 〈벽불론(闢佛論)〉 수십 편을 지었다. 그러다가 17세에 우연히 연지 대사의 〈자지록 서문(自知錄序)〉과 〈죽창수필〉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문장의 내용과 이치가 매우 깊음을 느꼈다. 비로소 자기의 잘못된 견해를 알아차리고, 이전에 지은 불교에 대한 비판적 저술들을 불사르며 깊이 참회하였다.

1618년 겨울에는 부친상을 당했는데, 〈지장보살본원경〉을 보고 마침내 출가를 발원하였다. 대사는 봄부터 겨울까지 대비주 지송을 마친 후, 계(戒)의 뿌리가 영원히 청정해지고 끝내는 극락의 구품연화대에 앉아 모두가 아미타불의 백호광명을 뵈옵고 원만하게 법계장신(法界藏身: 法身)과 같게 될 것을 발원하여 또다시 대비주 십만 팔천 번을 염송하였다.

〈능엄경〉 공부하다 의정 생겨 출가 결심
22세(1620) 때부터 본격적으로 염불에 전념하여 세속의 시문(詩文) 2,000여 편을 다 불살라버리고는 불법의 이치를 닦는데 더욱 매진하였다.

이듬해 7월 30일에는 뛰어난 방편인 염불수행을 통해 부모님과 조상님을 비롯한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48원(願)을 발하고, 스스로 ‘대랑 우바새(大朗優婆塞)’라 이름하였다.

그 해에 고덕 법사(古德法師)가 〈대불정수능엄경〉을 강설하였는데, 우익대사께서 앉아서 듣다가 “세계는 공(空)에 의해 있게 되고, 공은 대각(大覺)에서 생겨난다(世界在空 空生大覺)”는 대목에 이르러 마음속에 갑자기 의정이 생겨 스스로 묻기를 “무엇으로 인하여 공이 이 대각에서 생길 수 있는가? 세계와 허공은 다시 어떻게 생기는가?(因何空能生此大覺 世界與虛空又從何而生)”라고 하였다. 이렇게 저절로 화두가 드러나자 답답하고 괴로워 도무지 불법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출가 수행을 통해 인생과 우주의 큰 문제(大事)를 참구해서 체득하고자 하는 결심이 든 것이다.

대사는 24세(1622)에는 꿈에 수차례 감산 대사(?山大師: 1546~1623)를 뵈었다. 이때 감산 대사는 조계(曹溪)에 거주했기 때문에, 길이 멀어 갈 수 없었다. 대신 감산 대사의 문인인 설령(雪嶺) 법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지욱(智旭)’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리고 자(字)를 우익(藕益)이라 하였다.

전국만일염불회의 염불정진 모습. 현대불교자료사진.
성유식론 공부하다 생사가 공한 도리 체득
그 해 여름과 가을에 운서사(雲棲寺)에 가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청강했는데, 강의를 듣는 중에 성종(性宗: 화엄종, 천태종)과 상종(相宗: 유식 법상종)의 두 종이 회통되지 않아 의문이 들었다. 이로 인해 경산(徑山)에 가서 좌선하면서 그 이치를 참구하였다.

이듬해(1623) 여름에 이르러 비로소 성상이종(性相二宗)의 뜻과 이치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깨달은 바를 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조금 지나니 곧 마음이 점차 공하고 공해져 다시 한 글자에도 머물지 않으셨다. 이 해 납월 팔일에는 연지 대사의 탑 앞에서 사분계(四分戒)를 받았으며, 26세(1624)에는 보살계를 받았다.

중병에 들자 왕생주 염송으로 가피 입어
대사는 28세 되시던 해에 모친이 돌아가셨다. 극진히 효자의 예를 다하시고는, 세상의 인연을 끊고 송릉(松陵: 현 江蘇省 吳江市)으로 가서 폐관(掩關)하고 무문관 수행을 서원했는데, 폐관 중에 뜻밖의 큰 병을 얻었다. 대사께서는 참선공부로써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셨지만, 매우 위독한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대사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생사를 감당할 힘이 전혀 없었다. 자신의 수행력이 아직 많이 부족함을 깨닫게 된 것이며 보통의 법력 가지고는 생사에 자재(自在)할 수 없음을 더욱 절실히 느낀 계기가 됐다.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염불할 것을 다짐한 대사께서는 우선 병부터 나아야겠다는 생각에 왕생주(往生呪)를 7일간 지성껏 염했는데, 극적으로 병이 완쾌되는 가피를 체험하게 되었다.

대사는 31세에 박산무이(博山無異)선사를 따라 금릉(현 강소성 남경)에 가서 대중과 어울려 배웠는데, 수개월 동안 지내면서 암담한 선문(禪門)의 폐단과 병통이 심각한 것을 보시고, 더욱 굳건히 계율을 널리 펼칠 것을 결심했다.

32세(1630) 이후로는 정토법문을 중심으로 천태 교리의 연구에 전념했다.
35세에 대중을 통솔하여 서호사(西湖寺)를 창건하고, 이후로 20여년간 강서, 안휘, 절강, 복건 등지를 유력하면서 대장경 열람, 경전과 교리 강술, 저작 그리고 염불법을 널리 전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손을 든 채 입적 후에도 두발 자라
청(淸) 세조(世祖) 순치(順治) 12년(1655) 정월에 병이 나자, 대사께서는 신체를 다비(茶毗)한 후 뼈 부스러기를 가루로 만들어 날짐승과 물고기들에게 보시함으로써 서방왕생의 인연을 맺어줄 것을 유언하셨다. 결가부좌하시고 서방을 향하여 손을 들고서 입적하셨는데, 이때의 세수 57세였다. 제자들이 대사를 시봉하여 감실[龕]에 봉안한 후 3년 뒤 여법하게 화장하고자 감실을 열었을 때, 결가부좌한 대사의 근엄한 모습이 보였으며 머리카락이 자라 귀를 덮고 있는 것이 생시와 같은 용모였다. 문인들은 대사의 유촉을 차마 따르지 못하고 대사의 영골(靈骨)을 영봉사 대웅전 오른편에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만일 우익대사께서 선지(禪旨)를 깨친 후 자족하면서 염불수행을 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생사에 윤회하는 과보를 면치 못했으리라. 다행이도 중병을 앓아 생사에 대적할 힘이 없음을 미리 깨닫고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한 염불수행으로 임종시에 자재하게 왕생하여 윤회를 벗어난 극락정토에 화생하셨으니,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둘이 아닌 불력(佛力)수행의 공덕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십년 간 참선해도 진보가 없거나, 평생을 간경(看經)하고 다라니를 외워도 생사해탈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반드시 정토법문에 대해 참구해 보라. 가장 빠르고 간편하고 확실하게 삼계윤회를 초월하는 속초성불(速超成佛)의 지름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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