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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연기법의 깃발은 어디있는가”붓다 찾는 천로역정-④ 연기법의 새로운 창발의 길을
  • 방영준(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17.02.0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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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최대 불상인 홍콩 옹핑 청동대불. 부처님 법의 핵심 중 하나는 연기법이다. 화석화된 연기법을 다시 일깨워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기법은 불교 사상의 출발점이다. 불교 공부를 시작할 때 처음 접하는 것이 바로 연기적 인과론이다. 연기법에서 무아와 공의 사상이 나온다. 붓다가 밝혀낸 연기법은 경이롭고 위대한 사상이다. 인류 정신사에 이런 엄청난 사례가 어디 있었던가? 초월적 대상에 대한 신앙 없이 연기법이 토대가 되는 종교가 지구별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연기법을 체감하는 것이 공명
생활하고 실천하는 삶이 요동
그 요동이 바로 자비행이다.
개인과 사회변화의 변증법을
붓다의 연기법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연기법에 대한 나의 찬탄은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동안 연기법을 덤덤하게 바라보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 학문을 배우고 인과론적인 자연과학 방법론의 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연기론에 쉽게 친화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 공부를 하면서 연기론의 큰 바다를 모르고 개울가에서 어슬렁거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붓다의 제자 ‘아난다’도 연기법의 심심 미묘함을 모르고 “너무 간단합니다”라고 했다가 꾸중을 들은 사례가 있지 않은가. 내가 바로 그 아난다였다.

내가 연기법의 큰 뜻을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 시절 ‘일반체계이론(general system theory)’을 배우는 과정에서다. 일반체계이론은 오늘날 ‘복합체계이론’으로 확장되어 불린다. 오늘날 복합체계이론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포괄하는 연구방법론으로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패러다임이다. 복잡계 이론의 대두는 비결정론적 세계관의 부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카오스 이론과 노벨화학상을 받은 프리고진(Iliya Prigogine)의 자기 조직화 이론은 복잡성 과학의 이론적 토대로 대변되고 있다. 카오스 이론은 비가역적이고, 비결정론적이며, 혼돈적인 자연현상에서 질서를 찾는다. 프리고진의 사상은 흔히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는 말로 대변된다. 프리고진의 저작 〈있음에서 됨으로(From Being to Becoming)〉에서 ‘있음’의 세계는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이고 ‘됨’의 세계는 진화론적, 유기체적, 비결정론적이다.

복합체계이론을 보면 붓다의 연기론의 냄새가 물씬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체계이론에 관한 원서들을 독해하는 과정에서 많은 체계이론 학자들이 붓다와 불교에 대해 매우 친화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오랫동안 불교 수행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연기적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 운동을 하는 분도 있다.

복합체계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모든 실재와 현상은 무수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한 덩어리의 집단으로, 각 요소가 다른 요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각 부분의 총화 이상으로 다이나믹한 자기 조직력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합체계이론은 붓다의 연기론을 오늘날의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틀에 의해 재해석하고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500년 전에 붓다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 수 있을까? 복합체계이론은 생물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등 현대 자연과학의 발달을 통해 정립된 이 시기의 첨단 이론으로서 다양한 논증이 일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이론이다. 아득한 2500여 년 전 붓다는 수행의 과정에서 깨달음으로 연기의 다르마를 발견했으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이러한 붓다의 연기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변화에 따라 계속 내용과 적용대상이 확대되어 왔고 그 방법도 매우 정교해졌다. 연기론도 시대의 요구와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붓다 입멸 1500년이 지난 후 연기론의 생동감이 사라졌다고 한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를 통해 연기론의 화석화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다. AD 7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1400년 동안 기존 연기론의 수준에만 머문 불교인들의 태만을 나무라고 있다. 그런데 박물관의 조각품처럼 형해화 된 연기론이 21세기에 불교 이론이 아닌 복합체계이론에서 새롭게 꽃을 피우고 있으니 어인 일인가?

연기론을 일반체계(복합체계)이론으로 분석하여 불교 사상의 특징을 분석하는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 체계이론의 틀에서 보면 우리의 자아라는 것은 주변 세계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에너지와 정보의 변형이다. 그래서 자아는 변하지 않는 개별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어빈 래즐로(Ervin Laszlo)라는 학자는 저서〈Introduction to Systems Philosophy〉에서 생명 형태(life-forms)들이 생존하고, 적응하고, 상호 연결하는 능력을 키우면서 스스로를 조직하는 상황을 ‘열린 자연 시스템(open natural system)’이라고 규정하면서 모든 존재의 연기론적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연기의 광장으로 본 것이다.

연기의 광장은 울타리가 없는 광장이다. 실재는 역동적인 상호의존적 과정으로 나타난다. 모든 요인들은 불변하거나 자율적인 요소나 본질이 아니라 상호인과적인 상호연결망 속에서 존속한다. 붓다의 연기론은 인과 관계를 내재하는 어떤 힘의 기능이 아니라 관계의 기능으로 접근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러나 결과는 결코 예정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원인들은 다양하며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의 연기론은 인과율을 안고 인과율을 뛰어 넘는다. 연기론은 인과율에 대한 논의를 양극화했던 결정론과 불확정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중도를 제시했다고 본다. 중도의 길은 양 극단의 이항대립을 넘어 더 깊고 더 먼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길이다.

나는 지금도 연기적 인과론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연기적 인과론을 공부하고 생각할수록 그 심심 미묘함에 현기증을 느낀다. 깨달음의 탈신비화와 불교의 사회적 사명을 강조한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는 나의 불교 공부에 많은 도움과 시사점을 주었다. 현응스님은 깨달음을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의 예를 들고 있다. 〈깨달음과 역사〉의 내용에 대해 깊이 공감하나, 연기법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긍정하기 힘들다.

나는 붓다의 초전법륜에서 붓다의 깊은 고뇌를 느낀다. 붓다는 성도 후 옛 도반들에게 전법을 하기 위해 250킬로미터가 넘는 ‘바라나시’까지 간다. 당시의 교통 사정을 생각하면 엄청 먼 거리라 할 수 있다. 그 먼 곳 까지 가는 것은 붓다의 다르마를 옛 도반들은 그래도 이해하지 않을까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섯 도반에 대한 설법 과정은 45년의 긴 전법 과정에서 제일 치열했다고 생각한다. 대기설법이 아닌 직접 화법으로 설법한 유일한 것이다.

붓다 자신은 탁발하지도 않고 도반이 차례로 탁발한 것을 먹으면서 연기론을 설득하였다. 며칠간의 설법과 토론과정을 통해 도반들이 연기론을 이해하고 받아 들였을 때 붓다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곧 이어 55명의 제자들을 얻게 되는데 이들도 단기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경전에 전한다. 이는 붓다의 첫 제자와 붓다 학당 1기 졸업생에 대한 예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나는 30여년 이상 ‘이해’한 것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는 직업으로 살아 왔다. 동시에 이해의 층위와 유형이 얼마나 다양한 것인가를 체감해 왔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아님을 알았고,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해했다고 착각도 했고, 또한 이해가 안됐는데 이해했다고 거짓 행동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에게 미안한 짓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해’란 단어에 걸림이 많다. ‘이해’는 현재 진행형의 행위이고 이에는 항상 새로운 해석이 따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따라서 이해는 ‘지적 수행의 과정’이다.

붓다의 다섯 옛 도반들과 붓다 학당 55명의 1기생들은 연기법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궁금하다. 연기법에 대한 이해 자체가 매우 연기적이기 때문이다. 시대와 사회 구조가 변하면서 후대의 붓다 제자들은 연기의 법을 다양하게 적용하여 설명하여 왔다. 문화의 유형과 수준, 사회구조의 변화, 시대적 요구 사항 등 다양한 연기적 조건에 따라 연기법의 구체적 내용은 달라진다. 그런데 그 생기발랄한 연기론이 화석화되어 버렸다고 한다. 오늘의 불교는 이미 화석화된 연기론을 1400여 년 동안 되새김질하고 있다고 하니 이는 붓다 다르마가 화석화되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우리는 후기 산업화 사회를 넘어 지식정보화 사회로 명칭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종래의 삶의 양식과 사유의 패러다임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이 시대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연기법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연기론의 출발은 삶의 괴로움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발하였는데, 오늘날 삶의 괴로움의 영역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지구촌 전체로 확대되고 유형도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인간이 이 지구촌의 생명을 전멸시킬 수 있는 다량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자연이 파괴되고 생물 종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또한 가치관과 이념과 문화, 가치관의 싸움은 도처에서 횡행되고 있다.

이 시대의 연기법은 새로운 창발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연기론의 현대적 변용이라고 볼 수 있는 복잡계 이론이 주는 시사점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세계를 설계하고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조직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설계나 제어라는 발상은 마치 기계를 만들 때의 공학적 발상과 같은 것이다. 이와 달리 창발성은 자기 조직화 프로세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진화(co-evolution)’현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공진화란 각 요소나 주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서 자기 조직화를 촉진하는 것이 개체의 ‘공명(共鳴)’이다. 시스템 전체의 상태에 관한 정보가 모든 구성원에 전달되고 공유됨으로써 개체와 개체간의 공명이 일어난다. 이러한 공명을 통해 작은 ‘요동(Fluctuation)’이 일어나고 이 작은 요동이 큰 변화를 가져 오는 출발점이 된다. 이것은 카오스 이론의 ‘나비 효과’나 ‘갈매기 효과’와 같은 것이다.

세상을 연기법으로 체감하고 공감하는 것이 공명이고, 연기법의 틀에서 생활하고 실천하는 삶이 바로 요동이다. 그 요동이 바로 자비행이라고 본다. 이제 연기법이 바람직한 21세기 사회 구현을 위해 지구촌이 새로운 자기 조직화를 일으키는 데에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과 사회변화의 변증법을 붓다의 연기법에서 새롭게 찾아야 할 것이다. 21세기 연기법의 깃발은 어디에 있는가? 용맹정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화두이다. 용맹정진의 장소는 밀폐된 선방이 아니라 바로 중생의 삶의 현장이다.

방영준(성신여대 명예교수)  motp79@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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