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은 살아서 누리는 삶의 현장

오늘도 좋은날

삶은 축복이자 기적이다. 꿈과 희망이자 빛과 어둠이다. 기대와 설렘, 노력과 도전, 성취와 행복이다. 청춘 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노년(老年)도 아름답다.

여자는 여자여서 행복하고 남자는 남자여서 자유롭다. 더러는 고단하기도 하고 팍팍한 그림자와 함께 하지만 그림자는 빛이 있어 존재한다. 하여, 절반은 슬프지만 절반은 기쁜 일이 찾아든다.

때로는 너덜너덜한 넝마의 삶이 질기게도 따라오지만 개운한 삶이 솔찬한 기쁨을 몰고 온다. 삶의 톱니바퀴엔 미운 얼굴도 끼어 있지만, 마음 열고 보면 다 금싸라기 같은 사람들이다. 징검다리도 될 수 있고 버팀목이 될 수도 있는 햇살같이 따뜻한 이웃들이다. 미운 자도 보내고 나면 울컥 서러워지듯 오손도손 마주 손잡고 등 따시게 위로하며 격려하며 형제자매처럼 살 일이다. 우울증에는 최고의 약이 설렘이라는 말이 있듯이 첫 데이트 있는 날처럼 첫 키스의 추억으로 조금은 들뜨고 더러는 설레며, 꿈과 희망을 일구어나가는 밝은 빛으로 살 일이다.

어차피 삶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의 눈높이에 따라 부정적인 착각으로 어둠과 빛 사이에서 생각의 윤회를 거듭할 뿐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착각으로 어둠과 절망 사이에서 방황할게 아니라 긍정적인 착각으로 희망을 길들이며 밝은 빛이 가득 차게 꿈을 펼치며 살 일이다. 여자는 누구나 미인이길 바라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결국 남자의 마음 차지는 얼굴 예쁨보다 마음 예쁨이다. 남자는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며 성취욕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여 건강 잃고 명예 잃고 어둠의 자식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여자의 마음 차지는 돈과 명예보다 진솔한 믿음의 건강한 사랑이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남자이다. 세상의 절반은 밤의 어둠이요 절반은 낮의 빛이다. 행복과 불행 또한 절반의 균형을 조화롭게 이어가는 것이다. 영원히 행복한 사람이 없듯 영원히 불행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시험의 지옥 경쟁의 사회, 있는 자 없는 자의 틈과 벽 사이에서 이용자가 되기도 하고 이용당하는 자가 되어 현생의 윤회를 거듭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러나 신앙은 사닥다리 오르듯 하여 시야를 넓히는데 신앙의 생명력이 있듯이 마음의 빗장을 풀어 마음 열고 보면 길이 보이고 세상이 보이고 꿈과 희망이 보이는 법이다.

천국의 극락세계는 죽어서 가는 게 아니다. 살아서 누리는 것임을 명심해야한다. 한 생각을 접고 보면 미움이 사랑으로 바뀔 수 도 있을 터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이 바뀌면 운명도 따라 바뀌는 법이다. 마음이 열리면 세상도 열리는 법이다. 아미타불이 먼 곳, 까마득한 곳에 계신 줄 알고 찾고 또 찾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곧 진리의 실체인 아미타불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섬겨야할 부처님은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 상이 아니라 나의 주거공간인 집이 참 법당이요, 움직이는 부모님과 아내 남편이 극진히 모셔야할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형제자매가 보살님이요 이웃사촌이 오백나한이었던 것이다.

극락세계는 죽어서야 이르는 곳이 아닌 살아서 누리는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본래 동, 서, 남, 북은 없는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과 팔방, 십방이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어느 곳에 있던 세상의 중심, 오늘의 참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으로 선(善)과 악(惡)을 지배하는 또 다른 의미의 창조주가 되는 것이다. 변두리와 모서리가 없는, 아웃사이더가 아닌 인사이더의 오늘의 참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가슴 활짝 펴고 어린 날처럼 주먹 나팔 불며 신바람 나게 호호탕탕하게 살 일이다.

쌀독에 담긴 절반의 쌀을 보고 한 아주머니는 배고픈 걱정이 앞선다면 한 아주머니는 배부른 여유를 누릴 수도 있을 터이다. 큰 아들은 우산장사요 작은 아들은 양산장사이다. 비오는 날엔 둘째가 걱정이요 햇볕 쨍쨍한 날엔 큰아들이 걱정이다. 그러나 한 생각만 접고 보면 비오는 날엔 우산 팔려 좋고 햇볕 쨍쨍한 날엔 양산 팔려 날마다 좋은 날이다. 생각 바꿔 오늘도 좋은날로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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