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불교의 원류, 지공과 나옹 연구

자현 스님 지음|불광 펴냄|2만 8천원
[현대불교=김주일 기자] 4개의 박사학위를 소지한 조계종 교육아사리 자현 스님이 여말선초 붓다의 후신(後身)으로 존숭받은 지공 선사와 나옹 화상에 대한 시리즈 논문 13편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지공과 나옹에 대한 입체적인 연구를 통해, 한국 선불교의 원류를 재조명하며 조계종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목적을 갖는다.

지공·나옹 선사 연구는 필수
〈태종실록〉 권30에 의하면, 조선 태종 이방원은 불교를 배척했음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지공과 나옹 이후로, 내가 보고 아는 바로는 한 승려도 도에 정통한 이가 없다(我國自指空 懶翁之後 予所見知者 無一僧精於其道者).” 이는 당시 지공과 나옹의 위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 지공과 나옹은 현대의 불교의식에서도 빠지지 않고 증명삼화상(證明三和尙:지공·나옹·무학)으로 모셔진다. 지공과 나옹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불교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한국 선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지공과 나옹에 대한 연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한국 선불교에는 인도불교의 피가 흐른다. 인도의 왕자 출신으로 고려에 머문 지공 선사의 막대한 영향력 때문이다. 그리고 지공의 수제자 나옹은 임제종의 제 18대 법손 평산처림의 법맥도 계승한다. 즉 인도의 선과 중국선종을 모두 계승한 것이다. 또 나옹은 현 조계종의 법맥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법맥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조계종의 시원은 보우가 아닌 나옹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공은 인도불교가 이슬람의 공격으로 사라진 후, 대승불교의 잔존문화 속에서 출가한 왕자 출신의 승려다. 지공은 1300년 중인도 마가다국의 국왕인 만(滿)과 남인도 향지국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는 그의 기록에 따르면 부계로는 붓다, 모계로는 달마 대사의 혈통이다. 8세에 인도불교의 3대 사찰 중 한 곳인 나란타사로 출가해, 10여 년간 반야학과 계율을 수학한다. 이후 스리랑카에서 선불교를 수행한 후 티베트를 거쳐서, 차마고도를 따라 운남을 경유해 원의 수도인 대도(현 북경)에 도착한다. 그리고 원나라 제 6대 황제인 진종의 어향사(御香使) 신분으로, 1326년 금강산의 법기보살에게 향공양을 올리기 위해 고려를 찾는다. 당시 고려불교는 원 간섭기에 따른 티베트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이 절반이나 되는 등 극히 세속화돼 있었다.

지공은 1328년 9월까지의 총 2년 7개월을 머물면서, 하루는 선(禪)을 설하고 하루는 계(戒)를 설하며 고려의 풍속을 일신시키고 선불교의 기상을 중흥하게 된다. 지공은 대승불교의 계율관을 갖고 있던 선승이다. 지공은 대승의 무생계(無生戒)를 통해서 고려불교를 교화하는데, 이는 이후 고려불교의 계율관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공민왕에 의해서 원 간섭기가 끝나는 시기부터 고려불교는 신속하게 청정성을 회복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즉 지공의 계율 강조가 고려불교의 청정성 회복에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지공이 원의 대도로 돌아간 이후에도, 고려에서 유학 가는 선승들의 다수는 지공을 참배하고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수제자였던 공민왕의 왕사 나옹과 〈직지〉로 유명한 백운경한,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자초와 정지국사 축원지천이다. 지공과 이들 선승들의 노력에 의해서, 고려불교는 티베트불교의 그늘을 벗어나 신속하게 청정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지공이 고려불교에 남긴 유산은 실로 엄청나다고 하겠다.

한국 선불교의 완성자, 나옹선사
나옹은 20세에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문경 대승사 묘적암의 요연 선사의 문하로 출가한 후, 25세까지 각지를 두루 유력하며 수행하다가 양주 회암사에 이르러 4년간의 장좌불와를 통한 용맹정진 끝에 28세의 나이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나옹은 깨달음을 증득한 직후 원나라로 유학을 떠나, 대도의 법원사에서 지공을 참배하고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후 중국의 불교유적과 선승들을 참례하는 과정에서, 임제종의 18대가 되는 평산처림의 인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계속 성적순례를 하다가 수도로 되돌아와서 지공에게도 인가를 받는다. 고려로 돌아온 나옹은 공민왕 말기에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대두된다. 공민왕의 불교개혁에 발맞춰 고려불교 최대의 초승과(超僧科)인 공부선(功夫選)을 주도하고, 왕사가 되어 고려불교의 발전과 변혁을 도모한다. 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옹립되는 과정에서, 나옹 역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나옹에 대한 탄압 명분은 나옹이 중창(修造)한 회암사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최고 권력자를 위협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것이 죄목이었던 셈이다. 결국 나옹은 여주 신륵사에서 돌연 열반하게 된다.
열반 이후 무수한 사리가 분신하여 증가하는 등 기이한 이적들이 속출하면서, 나옹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진다. 이로 인하여 나옹에 대한 추모열기가 전국을 휘몰아치게 되고, 마침내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붓다의 후신으로까지 평가되며 신성화되기에 이른다.

나옹은 또 한국불교의 승단 안에서도 증명삼화상이라는 신화구조를 통해 오늘날까지 모든 불교의식문(佛敎儀式文)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외에도 모든 사찰에서 새벽예불 때 올리는 행선축원 역시 나옹의 발원문을 사용한다.

조계종과 한국선의 원류를 찾아서
흔히 현대의 조계종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확립된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종은 스승과 제자의 상전(相傳), 즉 법맥을 통해서 계승되는 불교다. 그러나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려 선종의 전승, 즉 법등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이 단절된 법맥과 법등을 원나라의 임제종으로 유학해서 다시금 이어오는 인물이, 바로 나옹과 보우 같은 유학승들이었다. 즉 현대의 조계종은 이들에 의해서 고려 말에 새롭게 재점화된 선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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