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丁酉年), 붉은 닭의 해도 벌써 보름이 흘렀다. 닭은 12지신 가운데서 유일하게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한다. 작은 땅벌도 날개를 윙윙거리며 공중을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혐오하는 박쥐도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을 나는데 멋진 날개를 지닌 닭은 날지 못한다. 생물은 물에서 뭍으로 그리고 날개를 얻어 하늘로 비상(飛翔)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닭은 날개가 퇴화하여 날지 못하고 다리만 튼튼해져서 땅을 종종거리며 머리를 숙여 먹이를 찾는다.

온갖 동물들이 등장하는 <산해경(山海經)>을 살펴봐도 봉황이 닭의 화려한 꼬리를 닮았을 뿐 닭은 언급되지 않는다. 백악기 후기에 몽골에서 살았던 길리미무스라는 공룡이 깃털은 없으나 닭을 닮았다고 한다. 아마도 닭이 공룡에게 제 목의 신축성을 자랑한 탓에 공룡이 그 장점을 취했나 보다. 이처럼 다른 동물들은 닭의 우수한 면을 제 몸에 접목시켜 더 멋진 모습으로 나아가는데 닭은 오히려 퇴화하다니 딱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닭은 일 년에 100개에서 200개의 달걀을 낳고 고기는 다양한 요리로 만들어져서 인간에게는 유익한 가축이다. 근래에는 그 인기가 얼마나 좋았으면 ‘치맥(치킨+맥주)’이란 신조어가 중국까지 전해졌을까.
닭은 설화에 등장한다. 신라의 탈해왕이 어느 날 밤에 금성의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나뭇가지에 걸린 금빛 궤 안의 아이를 거두어 키웠다. 그 이름을 김알지(金閼智), 숲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그가 왕이 되어서는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이뿐 아니라 고대의 영웅이나 나라의 시조는 아예 알 속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이 활개를 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석탈해(昔脫解), 수로왕(首露王), 고구려의 동명왕(東明王) 등을 꼽을 수 있으니, 알을 낳는 닭이 으스댈만하다.

닭 머리 형상의 계룡산(鷄龍山)은 또 어떠한가. 계룡산에 정도령(鄭道令)이 나타나면 새 세상이 열린다는 예언에 내가 정도령이라고 떠들어 대는 이들이 한둘이던가.

아하, 내가 아니면 누가 새벽을 알리느냐고 발끈하는구나. 그래, 네가 울어야 어둠이 걷히고 새날이 밝아온다.

석가는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고, 예수는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했다. 샛별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계명성(啓明星)’이다.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심령에게 환하게 길을 밝혀주는 진리의 빛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자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하다가 여명의 닭소리를 듣고서 통곡했다. 그는 ‘계명성(鷄鳴聲)’을 들은 것이다. ‘계명성(啓明星)’은 ‘계명성(鷄鳴聲)’과 다르지 않다. 닭소리는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무명(無明)을 깨우는 ‘도계(道鷄)’의 소리이다. 닭소리는 자아(自我)라고 여겼던 마음이 빚은 환상의 껍질을 벗기고 내 안에 깃든 진여(眞如)를 깨우는 ‘불계(佛鷄)’의 설법이다.

정유년의 닭이 힘차게 홰쳐 운다. 우리 모두 이 닭소리에 잠든 본성을 깨워 새로운 불국토를 이루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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