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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활동한 新발견 불모최선일 위원의 佛母列傳 - 계찬(戒贊) 스님
  • 최선일 문화재청 감정위원
  • 승인 2016.12.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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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은 시군(市郡)을 대표하는 사찰에 전각 건립과 더불어 불상이 제작되면서 수백 명의 조각승이 활동한다. 조각승들은 특정 사찰에 거주하면서 선맥(禪脈)을 따라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다. 특히 1650~80년 전국에 걸쳐 많은 불상들이 제작되는데, 불상은 전각에 맞게 100cm 정도의 중형이 가장 많이 제작되었다. 이 불상 조성은 하나의 계보에 속하는 6~7명의 조각승이 참여한다.

1640~70년대 불상 조성 불사 참여
승일·응혜 계보… 전국 무대로 활동
순천 동화사 삼세불상 現 유일 작품
2011년 정밀조사하며 조성기 확인돼

앞으로 이 시기에 제작된 불상이 계속 조사된다면 여러 명의 조각승의 삶과 작품 세계가 밝혀질 것이다. 그 가운데 계찬 스님은 최근 기년명 불상이 발견되어 불상 양식이 밝혀진 조각승이다. 계찬 스님의 생애와 조각승이 된 과정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과 사적기(寺蹟記)를 통해 활동 시기와 조각승 계보 등을 알 수 있다.

계찬 스님이 불상 제작에 참여한 가장 빠른 유물은 1643년에 응혜(應慧) 스님과 제작한 대구 달성 용연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이다. 이 명부전 불상은 응혜 스님, 희장(熙莊) 스님, 선홍(善弘) 스님 등이 제작하였다.

그 후 계찬 스님은 1646년에 승일(勝日) 스님과 전남 구례 천은사 수도암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목조대세지보살좌상을 조성하는데, 계찬 스님은 불상을 제작한 7명 가운데 5번째로 언급되어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스님은 1647년에 응혜(應惠) 스님과 전북 군산 불지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제작할 때, 부화승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1640년대에 나이가 30대 후반일 가능성이 있다.

계찬 스님은 1648년에 승일 스님이 만든 전남 강진 정수사 목조삼세불좌상에 보조화승으로, 1651년에 응혜 스님과 경남 진주 은정대 불상을 제작할 때 두 번째로 언급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657년에 수화승으로 전남 순천 동화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을 만들고, 1671년에 응혜 스님과 전남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보살상 1구는 제주 심광사 봉안)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진 계찬 스님의 활동 시기는 1643년부터 1671년까지이다. 계찬 스님이 1650년대 수화승으로 활동한 것을 보면, 1610년을 전후하여 태어나 1630년대에 불상 제작에 보조화승으로 참여한 후, 1640년대에 승일 스님과 응혜 스님 등과 불상을 제작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아 부화승으로 활동하다가 1650년대에 수화승으로 불상 제작을 주도한다. 계찬 스님은 1650년대부터 1670년대까지 경남 진주, 전남 순천, 전남 장성 등의 사찰 내 불상 제작을 주도한 것을 보면, 16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주도적으로 만든 불상이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계찬 스님의 스승이나 선배로 추정되는 응혜 스님은 17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활동한 조각승이다. 응혜 스님은 1639년에 청헌 스님과 경남 하동 쌍계사 목조삼세불좌상을, 수화승으로 1643년에 달성 용연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을, 1647년에 전북 군산 불지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을, 1660년에 전남 담양 호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장성 백양사 성보박물관 소장)을, 1678년에 지리산 소은난야 목조대세지보살좌상(광양 무등암 봉안)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동화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 제작에 부화승으로 참여한 인계(印戒) 스님은 1678년에 응혜 스님과 지리산 소은난야 목조대세지보살좌상(광양 무등암 봉안)을, 1689년에 수화승으로 전남 여수 흥국사 53불좌상을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사민(思敏) 스님은 1689년에 인계 스님과 여수 흥국사 53불좌상을 조성하였다.

계찬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현진(-1612-1637-)→ 승일(-1622-1670-)→ 응혜(-1639-1678-), 계찬(-1643-1671-)→ 인계(-1651-1714-), 사민(-1657-1689-)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계찬 스님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현진 스님의 계보로, 승일 스님과 응혜 스님을 이은 조각승이다.

계찬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유일한 불상은 전남 순천시 별양면 개운산에 자리 잡은 동화사(桐華寺)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동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9교구 화엄사(華嚴寺)의 말사로,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창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연혁을 알 수 있는 문헌이 남아있지 않다.

동화사는 정유재란 기간에 파괴되어 1601년에 신총(信聰) 스님이 대웅전을 건립한 후, 1630년에 계환(戒環) 스님이 중창하였으며, 1662년에 희안(熙安) 스님과 법홍(法弘) 스님 등이 호선루 건립과 기와 불사를 하였다.

대웅전 내 수미단(須彌壇) 위에 봉안된 목조불상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로 이루어진 삼세불(三世佛)이다. 이 불상은 2011년 8월 9일에 사찰 측의 의뢰로 충북대학교 목재연륜소재은행과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의 정밀조사를 계기로 목조불상을 만든 수종(樹種)과 연륜분석(年輪分析) 및 복장 조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불상 내에서 조성발원문과 대좌에 적힌 조성묵서가발견되었다.

목조석가불좌상은 높이가 115cm 무릎 너비가 78cm인 중대형이다. 불상은 상체를 앞으로 조금 내밀어 자세가 구부정하다.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가 있고,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에 윗부분이 둥글고 낮은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 가늘게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원통형으로 단순하며, 입은 살짝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거의 직선에 가까운 삼도(三道)를 표현하였다.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은 목 밑에서 팔꿈치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늘어지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은 배 밑에서 한 가닥이 완만하게 펼쳐지면서 옆으로 두 가닥이 오른쪽 바닥으로 접혀 있고, 반대쪽 대의자락도 대칭을 이루듯 세 가닥의 옷주름이 늘어져 있다. 측면에 늘어진 대의자락은 어깨선을 따라 두 가닥의 옷 주름이 팔(八)자형으로 완만하게 펼쳐져 내려오다가 앞 주름은 손목으로, 뒤 주름은 엉덩이 방향으로 접혀 있다. 가슴에 입은 승각기는 상단을 수평으로 접고 앞으로 둥글게 처리하였다.

   
 
석가불은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하고, 왼손을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인(手印)은 조선후기 기년명 불상 가운데 석가불이 주로 취한 자세이다. 협시불인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본존인 석가불과 같이 조선 후기 전형적인 불상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석가와 약사불은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인상이 비슷하지만, 아미타불은 둥근 얼굴형과 인상에서 앞에서 언급한 불상과 차이가 있다.

또한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은 석가불과 약사불이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처리하였지만, 아미타불은 가슴까지 내려와 물방울 같은 U자형으로 마무리하였다. 왼쪽 무릎을 감싸고 있는 소매 자락은 석가와 약사불이 조각되지 않은 반면, 아미타불은 끝자락이 날카롭게 처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미타와 약사불의 배 부분에서 편삼과 대의자락이 접히는 표현이 나타나야 하는데, 약사불 같이 거의 수평으로 단(段)을 이루며 접힌 형태는 조선후기 기년명 불상에서 볼 수 없는 요소이다.

특히, 협시불이 좌우대칭을 이루지 않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자세와 방향도 같아 기존의 삼존불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요소이다. 따라서 목조삼세불좌상은 신체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착의법이 약간 달라 석가와 약사불은 같은 수화승이 만들었지만, 아미타불은 조형 감각이 다른 작가가 주도적으로 만든 불상일 가능성이 높다.

동화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은 각각의 불상에서 조성발원문과 대좌 묵서가 남아있는데, 석가와 약사불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은 연화질(緣化秩)과 시주질(施主秩)이 각각 1명씩 다르지만, 아미타불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과 비교해 보면 재목(材木), 복장(腹藏), 개안(開眼), 칠보(七寶), 공양(供養), 면금(面金), 이면(裏綿), 오향(五香), 체금시주 등이 다르다.

또한 대좌에 적힌 묵서는 세 구가 모두 동일한 내용인데, 조성발원문과 비교해보면 화원(畵員) 마지막에 해원(海元) 스님, 별좌(別座) 마지막에 해견(海堅) 스님이 더 언급되어 대좌 조성에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목조삼세불좌상의 조성발원문에 언급된 인명은 총 57명으로, 석가불(42명), 아미타불(39명), 약사불(42명)이 언급되어 있다. 불상 조성에 참여한 스님은 26명으로 재가자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불상 제작의 대화사 법홍(法弘) 스님은 현판 ‘낙안군개운산동화사중창기(樂安郡開雲山桐華寺重?記)’에 의하면 전남 영암 출신으로 영암 도갑사, 장흥 보림사와 천관사, 광주 서석사 등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만년에 동화사에서 복원에 주력한 스님이다. 재가자 중에는 이순형(李舜亨)이 조선 시대 각 아문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육품 관직인 주부(主簿)로, 안지윤(安之尹)이 생원으로 언급되었을 뿐, 대부분 지역 주민이 불상 조성을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끝〉

최선일 문화재청 감정위원  motp79@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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