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축서사 보광전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 法을 인격화한 법신
남향의 보광전에 동향으로 배치
화엄주불로 867년 조영한 법신불
광배 하단 물고기 유영하는 연지

법의 세 가지 용법
법(法)은 인도어 ‘다르마’의 한문 번역어다. 일본 불교학자 마즈다니 후미오는 〈현대불교 입문〉에서 불교 술어로써 ‘법(法)’은 대략 세 가지 용법을 지닌다고 분석했다. 첫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같은 용법에 쓰이는 우주만유의 존재 그 자체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출현 여부에 관계없이 존재 자체에 성립하는 법칙성, 셋째는 여래께서 무상정등각을 얻어 중생의 능력에 맞춰 설하신 가르침 등이다. 물론 그 셋은 서로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과정을 통해 진리법에 도달하는 것이다. 불교 궁극의 법은 상의성(相依性)의 연기법(緣起法)에 이른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인과 연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므로 일체는 공(空)하다. 그런데 〈잡아함경〉에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한 비구가 붓다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연기법은 당신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이 만드신 것입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또한 다른 자가 만든 것도 아니다. 연기법은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만유에 관통하는 법은 그 누가 창조하거나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시공을 초월한 근본적인 원리임을 일깨운다. 법은 곧 우주에 가득 찬 진리 그 자체다. 만유의 생명력이고 자비력인 까닭에 광명과 다르지 않다. 그 법, 진리, 광명을 인격화한 몸이 법신이고, 곧 비로자나불이다.

법신은 중생의 여래장과 일체
법신 비로자나불은 법의 인격화다. 왜 그토록 광대하며 근원적인 진리의 법을 인격화 하였을까? 매번 그것이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노자는 〈도덕경〉의 첫머리에서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고 했다. 근원적인 원리인 도를 인격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법을 인격화 하여 화엄의 주존불로 예경한다. 우주의 진리를 깨치는 힘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은 사유와 바라밀을 통하여 진리의 길에 이른다. 선정과 지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붓다께서 일대사인연으로 오셔서 몸소 생멸과 고행을 통해 그 길을 보이셨다. 우주에 충만한 진리는 결국 사람의 마음 능력에 따라 어둡고, 또 밝아진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의 밝은 마음이 곧 법이고, 진리 일 수 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마음이라는 한 물건을 지녔다. 번뇌의 불을 끄면 우주법계의 진리를 볼 수 있다. 만유의 실상, 그 본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자등명 법등명의 울림이 크다. 무명을 밝히는 광명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저마다 여래의 불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의 불성을 가졌으니 중생의 마음이 여래장(如來藏)이다. 석가모니께서 무상정등각을 얻어 마침내 비로자나 법신불과 일체가 되신 뜻도 어렴풋이 알 듯 하다. 법신불의, 일체 중생이 간직한 여래장으로 개념화가 충분히 가능하다. 법신의 인격화가 가능했던 것도 그 때문인가? 원효스님께서 〈대승기신론소〉에서 법신을 여래장으로 정의하신 뜻이 그것이던가? 우주에 두루 비추이는 ‘광명편조(光明遍照)’의 빛, 법신은 중생의 여래장과 일체가 된다.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싼 법신 비로자나불의 독특한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도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님을 일깨운다. 지권인을 한 여래형 비로자나불 불상이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새롭게 등장함으로써 한국 불교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독창적인 지권인 여래형 비로자나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통일신라 혜공왕 2년(766년)에 제작된 불상으로 9세기가 되어서야 제작하기 시작한 중국이나 일본의 비로자나불 불상 조성시기보다 반세기 앞서는 시기다. 또한 중국, 일본에서처럼 밀교양식의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형이 아닌 여래형 비로자나불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독창적인 불상이다. 9세기에 이르러 신라의 화엄종찰 영주 부석사를 중심으로 경북지방에 석조비로자나불 불상이 집중적으로 제작되고, 선종의 도입과정에선 전국적으로 철불이 크게 유행하였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석조비로자나불은 30여점에 이른다. 특히 의상스님의 법맥이 흐르는 영주, 봉화일대의 부석사, 축서사, 비로사, 성혈사 등에 지역적 집중성을 보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화엄사상의 뚜렷한 반영을 의미할 것이다. 부석사 자인당에 봉안한 두 석조비로자나불은 불상, 광배, 대좌가 온존한 형태로 남아있고, 또 축서사 불상과 대단히 유사해서 일맥상통한 통일적인 양식을 보여 주목을 끈다. 특히 축서사 비로자나불은 제작년도가 경문왕 7년(867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삼층석탑 사리석호 기록이 있어 이 일대 비로자나불의 기년작(紀年作)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축서사 비로자나불의 867년 제작년도 추정은 적묵당 앞에 있는 삼층석탑 탑신에서 명문이 새겨진 납석제 사리석호가 발견됨으로써 가능해졌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중인 사리기의 표면에는 16행 74자의 석탑 조성기가 새겨져 있다. 승려 언전이 진골 가문인 어머니로부터 시주를 받아 부처님의 사리 10과와 무구정경을 봉안하여 함통 8년(867년)에 탑을 세웠다는 명문이다. 이같은 탑신석, 혹은 불상대좌에서 통일신라시대 납석제 사리기가 발굴된 경우는 몇 몇 사례가 있고, 또 비로자나불 불상 조성과 맥락을 같이하는 까닭에 불상 조성시기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산청 석남암사지 불상대좌 납석제 사리호(766년), 포항 법광사지 삼층석탑 납석제 사리호(828년),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제 사리호(863년), 봉화 축서사 삼층석탑 납석제 사리호(867년) 등이 그 같은 사례들이다. 특히 석남암사지 비로자나불은 우리나라 최고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일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비로자나불상으로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

아름다운 목조광배의 비로자나불
축서사 비로자나불에서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대목은 화강암 육신에 두텁게 입힌 흰색 호분의 인상이다. 성혈사 비로자나불과 괴산 각연사 비로자나불에서도 그 같은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대구 동화사 비로자나불의 경우 10여 년 전에 호분을 벗겨 화강암 질감을 회복했다. 전체적으로는 불상과 대좌, 목조광배, 닫집의 조화로움으로 거룩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화강암 불상과 대좌는 통일신라시대 본래의 조형이지만, 목조 광배와 닫집은 조선시대 후대의 것이다. 원래의 석조광배 파편 일부는 적묵당 앞 삼층석탑 기단에 얹어 두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의 편액은 보광전이다.

80권본 화엄경에서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신 곳으로 칠처구회(七處九會)로 묘사한다. 일곱 곳에서 아홉 차례 설법하신 연유에서다. 2회, 7회, 8회의 설법을 펴신 곳이 보광전이다. 보광전은 화엄의 법당이다. 그런데 법당은 남향이지만 비로자나불은 서쪽 편에 동향으로 모시고 있다. 인근의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 배치와 같은 방식이다.

두터운 호분 너머로 정으로 쪼아낸 의습과 문양이 돋아나 있다. 법의는 두 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리는 통견(通肩) 양식이다. 옷깃에는 꽃문양을 베풀었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주름은 평행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손 아래 저부조로 새긴 우아한 곡선의 띠매듭이 인상적이다. 비로자나불의 입가에는 옅지만 다정한 미소가 흘러 따스함이 흐른다. 법신은 곧추 세워 수직적으로 당차고, 결가부좌의 하반신은 수평으로 처리해서 대조적이다. 남향이라 법당에 빛이 충만하다. 문수선원의 선풍이 밴 고요함 속에 작고 낮은 법당은 온화하기 그지없다. 법당의 거룩함은 불상 뒤 목조 광배와 닫집장엄 속에서 우러 나온다.

검붉은 빛과 황토빛의 묵직한 질감의 광배는 그 자체가 예술적 감동과 종교적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관상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어 보인다. 밝거나 명랑하기 보다는 두텁고 차분하다. 색채의 아름다움과 함께 조형의 오브제들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두광의 둥근 광배의 중심부는 범자 ‘옴’자를 각인했다. 그 둘레에 卍자를 곳곳에 새겨 자비력을 확산시키고 연꽃을 피워 화엄의 연화장세계를 상징적으로 완성해 두었다. 가장자리는 강력한 빛에너지가 붉은 파장으로 너울대는 형세로 처리해서 하나의 우주법계를 연상케 한다. 아래 부분은 물고기 떼들이 연꽃 사이를 유영하는 연지로 묘사하고 있다. 광배 그 자체가 빛으로 충만한 자비력의 세계이고, 화엄세계다. 비로자나불과 광배가 서로의 일체가 되어 우주법계에 충만한 화엄의 빛을 직지하고 있다. 문자와 언어를 여읜 조형의 빛이 교외별전의 빛일 것인데, 그 빛을 관(觀)하는 마음이 화엄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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