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남편이기도, 아들이기도 한

남자, 시부모 봉양 몫이라 여겨
일방적 희생 강요고부갈등 시작
시부모-아내 내가 만든 인연명심
책임감 갖고 임하면 아내도 변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종손(宗孫)이란 단어가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종손이란 그 집안의 장남으로만 이어 내려오는 남자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어린 시절만 해도 이런 종손의 위세는 대단했다. 지금이야 명절에 사촌들 얼굴 보기도 어렵지만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형제 많은 가족의 종손 집에는 차례 지내러 오는 식구들의 수가 40~50명씩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문화가 존재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부모 봉양의 전통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장남이 모시고 살며, 집안의 제사를 도맡는 것이 가장 큰 의무 중 하나였다. 이러다보니 다른 형제들은 자신이 일부 부담해야만 하는 부모 봉양의 의무를 장남이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에 대해 존경과 예우를 표했고, 장남이나 종손의 한마디는 그야말로 그 집안의 법처럼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장남과 결혼한 맏며느리 또는 종부(宗婦)라 칭하는 장남의 부인은 부모의 일상사를 봉양하고, 모든 제사와 차례의 제수를 장만하는 것 등으로 평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장남의 동생들은 이 맏며느리에게도 깍듯한 존경과 배려를 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장남 중심의 가족 구조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부모 봉양에 대한 자녀들의 갈등 표출이다. 특히 동등한 상속권을 가진 자녀들이 이 상속권과 부모 봉양 의무의 상계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접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물질 갈등과 별도로 아버지들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즉 아내와의 갈등이다. 우리나라 장남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마음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모는 장남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인데, 문제는 이 마음 때문에 아내와 갈등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반면 아내들은 시부모에 대한 생각이 남편과 다른 경우가 많다. 즉 아내는 남편과 살기 위해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지, 시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남자는 시부모 봉양을 여자의 몫이라 여긴다.

시부모 봉양은 제일 큰 일이 식사와 일상사의 시중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며느리가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부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양의 가장 큰 노동인 식사와 시중은 아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니, 결국 며느리 몫이라 여긴다. 그리고 아들도 그런 부양의 행위는 자기가 아닌, 여자인 아내의 몫이고 남자는 아내가 부모 봉양을 열심히 해주면 고맙게 생각하고 도와주면 된다고 여긴다. 이렇듯 고부 갈등은 여자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뿌리 깊은 한국 전통사회의 선입관에서 비롯된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한마음아버지마당 프로그램 중 가족조각이라는 코너가 있다. ‘가족조각이란 한 명의 참가자가 같은 팀원들에게 평소 자신의 가족 모습과 분위기 등을 설명한 후 팀원들이 부모, 아버지, 아내, 자녀 역할을 맡아 평소 모습을 재연하는 역할극을 말한다.

가족조각의 주체가 되는 아버지는 역할을 맡은 팀원들에게 자신의 가족구성원과 같은 행동을 요구할 수 있다. 즉 사이가 안 좋은 아내가 남편과 등을 지고 선다든지,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는다든지, 고부간 갈등이 있는 경우에는 며느리와 시부모가 등을 돌리는 등 가족구성원과의 평소 관계를 정지동작으로 재연한다. 이후 각 역할 담당자에게 역할을 하면서 느낀 소감을 그 가족의 입장에서 솔직히 이야기한다. 바로 가족조각은 평소 아버지가 막연히 느끼는 가족의 이야기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들어봄으로써 마음을 공감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진행 중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어느 참가자의 소회가 기억난다. 그는 부모와 등을 지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조각 후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아내 역할을 맡은 분에게 너무 지겹고 힘들어요라는 말을 듣자 아내가 많이 힘들겠구나.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단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내 부모인데라는 양가감정도 들었다고. 그 모습에 이 세상 모든 것이 내가 있어 나투었다는 대행 스님의 법문이 떠올랐다.

고부갈등과 부모님의 봉양 문제로 발생하는 부부싸움은 부모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은 아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기대하지만 여자는 아들인 남편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자가 여러 이유로 나는 할 수가 없으니 당신이 해라고 하는 순간 아내의 마음속에서 바로 거부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아버지인 가 만든 일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했고, 내가 아내와 결혼해서 가족 관계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은 인연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내에게 내가 지은 인연을 대신 짊어지라고 하니 아내는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아내는 속으로 당신의 인연이니 당신이 해결하시오라고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풍으로 거동이 힘든 아버지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셔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당연히 누군가가 아버지의 병간호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혹시 아내가 한다고 할까 싶어 은근히 기대했지만 묵묵부답인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내가 병간호를 자청한 적이 있다. 솔직히 그 당시는 아내를 많이 원망했다. “이런 병간호는 며느리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 그런데 병간호를 하며 나밖에 없는 병실에서 묵묵히 홀로 지내다보니 마음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이건 네가 해야 하는 일이다. 네가 선택한 부모요, 네가 지은 인연이니 네가 인연을 녹여야 하거늘 누구를 원망하느냐?’

이 소리를 듣는 순간 그동안 쌓였던 아내에 대한 원망은 눈 녹듯 사라졌고, 오로지 내가 지은 인연을 이 기회에 녹여야겠다는 마음으로 두 달 간의 병간호를 마쳤다. 한데 아내의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당신이 이 일을 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 그런데 지성으로 간호하는 당신 모습에 정말 다시 보게 되었어.”

생전 듣지 못한 말에 당황한 채로 있었는데 옆에 있던 아들에게 아버지,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듣곤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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