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문수사 주지 지원 스님

▲ 지원 스님은...1966년 송광사 입산, 임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74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를 졸업했다. 84년부터 현재까지 문수사 주지를 지내고 있으며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조계종 사회부장, 사회문화특보, 제11대 종회의원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산문에 부는 바람’, ‘걸망도 내려놓고 마음도 내려놓고’, ‘이별 연습’이 있다.

-조계사 식당서 자비심 발현
조선족 자녀 장학금 전달 시작
(사)위드아시아 세워 세계구호
인도ㆍ캄보디아 등 자선활동

-근현대 소외계층 보듬어
일제징용피해자 진상규명 앞장
원폭 피해자 지속 후원 나서
2세 환우 기초생활 지원 추진

-실천과 수행은 하나다
포교 위한 ‘복지와 교육’ 강조
수행 이정표 효봉 스님서 찾아
“불교 책무 다할 때 미래 밝아”


14살에 끌려갔는데 너무 어려 손님을 못 받는다고 많이 맞았어.
바닷가에서 사촌과 같이 납치 됐는데, 그 애는 일본군 총 맞아 죽었어.
이런 말은 아무한테도 안하고 죽으려고 했는데, 너무 억울해서!
돌아와서는 시집도 못가고 평생 고생하며 살았어.

대일항쟁기 위원회에서 발행한 <들리나요? 열두 소녀의 이야기>의 한 구절이다. 이런 가슴 아픈 위안부의 사연이 전해지는 한 사찰이 있다. 바로 부산 남구에 위치한 문수사다.

남구에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과 UN 평화 기념관 그리고 UN 기념공원과 평화 공원이 위치한다. 특히 문수사 앞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추모탑에는 가슴 아픈 위안부의 증언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징용과 군속(군무원)으로 강제 징용된 사람들의 기억이 살아 생생히 전달되고 있다.

역사 가운데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책임을 묻고 인권과 평화의 문을 여는 이곳을 문수사는 바라보고 있다. 마치 그들의 이야기에 매일 귀를 기울이듯 말이다.

11월 25일 만난 문수사 주지 지원 스님은 이런 잊혀져가는 역사의 중요성을 설했다. 스님의 겨울 장삼은 덧댄 천으로 이곳저곳 기워 입은 흔적과 까맣게 변한 소매 끝은 낡아서 보기에도 길고 긴 세월이 느껴진다.

스님은 “‘기억’이 곧 시은(施恩)이다”라는 마음으로 겨울이 찾아오면 잊지 않고 낡은 장삼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스님이 꺼낸 장삼은 군대를 막 제대 했을 때 어느 노 보살님이 손으로 직접 지어준 것이다. 스님은 그 노 보살의 마음이 아직까지도 전해진다며 40년이란 긴 시간이 묻어 있는 소매 깃을 만졌다. 기억하고 입는 것으로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한다는 지원 스님, 그 기억의 방으로 들어가 미래에 대해 들었다.

▲ 2016년 8월 11일 부산 남구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추모공원에서 열린 ‘강제동원 희생자 전국합동위령제’에서 추모탑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다.

#근현대사 소외계층 보듬는데 앞장
지원 스님의 이력은 역사와 함께 한다. 한일합방 이후 강제동원 된 위안부와 군속 그리고 강제 징용자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활동부터 북한동포 및 원폭 피해자 돕기 등 우리가 외면했던 한국의 근현대사를 조명하는 곳곳에 스님의 활동은 스며들어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실제로 보고 듣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먼 타국으로 강제 징용 당해 탄광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들의 처참한 과거를 들으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수많은 유골이 일본의 이름 없는 사찰에 보관돼있는 것을 알고 더욱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스님은 일제강제징용피해자 지원재단에서 종교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사직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스님이 몸담고 있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일제 강점기인 1938년 4월 1일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진 시기부터 해방 전 까지 강제 동원 된 희생자들의 유족을 찾아 복지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정부가 지난 2005년부터 강제동원 피해 진상 조사를 실시해 2008년부터는 유족들에게 일정금액의 위로금을 지급하도록 했지만 충분한 복지지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2014년에 이사회를 설립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올해 8월 11일에는 처음으로 부산 남구 대연동 일제강제동원역사관 7층 옥상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전국합동위령제를 열었다. 또한 피해자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제학술대회와 복지 후원을 위한 새로운 특별법 제정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스님은 재단을 묵묵히 지원하는 한편, 앞장서서 강제징용 피해자를 돕기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1만 2000평 위에 세워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가운데 문수사 땅 4000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조속히 유족들을 위한 바른 복지가 이뤄지고 그분들을 기억하는 세대로 미래를 일궈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위드아시아 용호종합사회복지관이 2016년 5월 7~8일 진행한 마을장승축제에서 지원 스님은 효비빔밥 퍼포먼스를 통해 행복을 발원했다.

#1999년 위드아시아 발족
그렇다면 이런 스님의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스님의 활동은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조계종 사회부장으로 서울 조계사 일대에서 활동하던 지원 스님은 조계사 근처 식당을 자주 찾았다. 식당에서 궂은일을 담당하던 아주머니들의 어눌한 말투는 스님의 관심을 끌었다. 스님은 그들의 사연을 자주 듣게 됐다.

“사연을 들어 보니 흑룡강에서 온 조선족들이였습니다. 아픈 남편을 대신해 넘어 온 사람부터 자녀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는 등 다양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녀들 교육을 위해 한명 두 명 장학금을 전달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스님 혼자서는 많은 비용의 장학금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수혜를 바라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포기하지 않고, 사람을 모으고 단체를 조직했다. 그렇게 시작된 단체가 바로 NGO인 위드아시아다. 아시아와 함께한다는 뜻의 위드아시아는 1999년 발족됐다. 장학금 전달을 위한 시작이었던 만큼 위드아시아가 가장 먼저 추진한 사업도 교육 사업이었다.

“당시 참여불교운동본부의 진관 스님과 논의해 단체를 법인화 하고 구체적인 사업을 기획해나갔습니다. 단체를 조직하니 보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어요.”

위드아시아는 인도 산티니케탄 지역 달라마을에 ‘위드아시아 제1중학교’를 건립한데 이어 전 세계에서 다양한 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도 유피주 에타하마을 불가촉천민지역에 ‘타타가타 학교(Tatagata Public School)’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인도 동부 몰가브니 지역에서 원주민 자립을 위한 소 육성 및 마을도서관 지원 사업, 라오스 비엔티엔 초등학교 개보수 사업, 태국 치앙라이 산악지역 내 소수민족(라후족) ‘문수초등학교’ 건립 및 마을 개선사업, 캄보디아 쁘 레이벵주 쁘레이끄랑마을, 끄로읏마을 화장실 개선 사업, 캄보디아 뿌레이벵주 찌삐여이 마을 ‘우리공부방’ 건립, 캄보디아 뿌레이벵주 뿌레이끄랑 마을 ‘Dream나래’센터 운영 등 사업은 날로 확장됐다. 교육 사업은 국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빛을 발했다. 현재 위드아시아는 서울 금천구 구립도담어린이집과 부산 용호어린이집도 수탁 운영 중이다.

이는 교육의 힘을 믿고 또한 교육을 통한 포교의 길을 믿기에 가능했다.
“교육과 복지를 큰 축으로 삼아 포교 활동을 펼칩니다. 이 시대에 맞는 포교는 나눔에서 비롯되며 교육은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입니다. 사찰에 더 이상 아이들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포교 대상이 있어야 포교를 할 것이고 부처님 말씀을 전달 할 텐데….”

이어 스님은 “앞으로 더욱 더 사찰 안에서 만의 포교는 힘든 시기가 올 것”이라며 “교육이 답이다”고 말했다. 스님은 사찰 수익을 사회로 환원하고 복지와 나눔이 바탕이 된 교육으로 우리의 역할을 다질 시기라고 역설했다.

스님이 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교육만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불교가 종교를 벗어나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이를 통해 포교도 자연스럽게 이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폭의 아픔을 위로하다
위드아시아의 사회적 역할은 교육 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를 위한 후원에 까지 미치고 있다. 지난 8월 6일 합천 평화의집은 경남 합천군 율곡면에서 ‘한국 원폭 2세 환우 생활쉼터’ 개관식을 진행했다. 한국 원폭 2세 환우 생활쉼터는 2층짜리 주택 1층의 200㎡(약 60평) 규모로 방 네 칸과 부엌, 거실 등을 갖췄다. 민간차원으로 운영되며, 4명의 원폭 2세 환우들이 생활할 예정이다. 또 향후 홍보를 통해 생활자를 늘린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위드아시아는 2010년 원폭 2세 환우들을 위한 쉼터 합천 평화의집을 설립했다. 평화의 집은 이후 원폭 2세 환우와 함께하는 봄, 가을 평화나들이, 67주기 한국원폭희생자 추모제 ‘해원을 넘어 평화의 언덕으로’를 개최해 원폭 피해자의 현실을 알렸다. 위드아시아는 2012 합천 비핵·평화대회를 개최해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한국 원폭 2세 환우와 가족을 위한 ‘김장잔치’ 등도 열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을 당시 70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그 때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있었던 한국인을 추정하면 7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1세대가 많이 돌아가셨지만 원폭의 아픔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스님은 원폭 피해자의 후손들을 위한 활동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스님은 원인 모를 질병과 장애에 단지 자신의 책임인 것으로 여기고 살아온 그들을 위해 복지와 의료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올해 원폭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 됐습니다. 하지만 그 혜택은 보잘 것이 없어요. 반드시 있어야 할 의료혜택과 기초적인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복지에 대한 내용이 빠진 것이죠. 지속적으로 요청할 것입니다. 원폭 2세대들은 단순히 몸이 아픈 것이 아닙니다. 교육의 기회도 박탈당했고 그러니 생활을 위한 취업을 꿈꿀 수도 없습니다.”

위드아시아는 원폭 피해자를 위한 활동 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한 비핵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핵이 얼마나 위험한지 증인들을 초대해 직접 알리고 세계평화를 위해 그 내용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합천 지역에서 특히 많은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일본의 나가사키, 히로시마를 옮겨두었다고 생각하심 됩니다. 앞으로도 세계 평화를 위해 생명의 존엄함을 알리고 피해자들의 지원을 위해 노력 할 것입니다.”

▲ 부산남구불교연합회(회장 지원)는 2016년 5월 10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군포교 활성화를 위해 해군작전사령부 해운사에 위문품을 전달했다.

#바른 수행의 좌표로 미래를 제시

스님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어릴 적 출가 후 만난 은사 스님과 지중한 인연이 준 가르침에 감사했다.

“제 은사는 송광사 법흥 스님이십니다. 법흥 스님은 효봉 스님의 상좌이시니 저는 효봉 스님의 손상좌이지요. 저에게 큰 인연으로 가르침을 주신 스님들이십니다. 그 가운데 통도사 방장이신 벽안 스님을 시봉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회향의 삶을 지표로 삼고 살아 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을 큰 스님들과의 인연에서 찾았다. 또한 이번에 집필한 책<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는 통합종단 초대종정을 역임한 효봉 스님의 선사상과 삶을 담아두었다. 자료를 모아 정리하기 까지 총 8년간의 시간이 걸렸다. 효봉 스님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상황이라 더 귀중한 자료로 남게 됐다.

“대선사의 철저한 불교정신과 구도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에 대한 회향의 삶과 죽음 앞에서도 좌탈입망으로 화두를 놓지 않으셨지요.”

스님은 수행자에게 고인들의 수행궤적이 곧 이정표가 된다고 설명했다. 책을 집필한 이유가 수행의 정로(正路)에 목 말라하는 중생들을 위한 큰 실천행이 된다는 것이다.

“효봉 스님은 출가 전에 한국인 최초의 판사셨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과정 중 사형을 언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진범이 있었던 거죠. 그 후 스님은 법복을 벗고 엿장수와 옷을 바꿔 입고 3년 동안 전국을 떠돌다 금강산으로 입산 했습니다. 그 때 당시 금강산 석두 스님을 만나 늦게 출가를 하셨죠.”

스님은 잠시 눈을 감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한번 앉으면 일어나지 않고 공부하셨던 모습을 마치 본 것처럼 대화를 풀어갔다.

“1946년에는 해인사 방장으로 추대 되어 불교 중흥을 위한 의지를 다지며 불교 정화 등 다양한 활동도 펼치셨습니다. 올해가 효봉 스님 열반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렸던 제가 불가와 인연을 맺은 지도 50년이 되었지요.”

되돌아보면 지난 세월이 아쉽고 아득하다는 스님은 은사인 법흥 스님, 벽안 스님, 문수사를 창건 한 덕암 스님까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외우듯 법명을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길손이 길이 잃어 갈 수 없을 때 만난 이정표를 되새기듯 말이다.

이 시대 역사로 인해 생긴 많은 숙제들이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길을 잃은 자를 위한 이정표로 오늘 스님은 또 다시 과거와 조용히 손을 잡는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용기와 나눔 그리고 실천이라는 답을 내민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