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블링키 팔라모 (Blinky Palermo)

블링키 팔라모의 1964년 작품 〈Komposition mit 8 rote Rechtecken〉. 계산된 시간과 공간이 아닌 마음을 통하여 느껴지는 ‘지금’을 표현하고 있다.
현실은 사실일까? 진실일까? 현실을 대하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인식이 되며 동일한 현실 속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진실한 인식을 하는 방법들을 찾아 나선 작가가 있다.

선사상 접하며 인식의 확장
현실의 표면 아닌 본질 추구
추상미술로써 현실을 표현해
‘卽心是佛’의 메시지 읽어야

블링키 팔라모(Blinky Palermo, 1943~1977, 독일)는 미니멀적 추상미술의 선두주자에 들어가는 작가이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며 세상 속에 묻혀있던 그의 작품들이 1980년대 이후 많은 찬사를 받으며 다시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요셉 보이스의 제자이며 몬드리안의 미학적 개념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그는 예술의 정신성에 대하여 많은 고뇌를 하게 된다. 현실은 모두가 진실일까 하는 그의 생각들은 선사상을 수용하며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게 된다. 자신 앞에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들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식하게 되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현실이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자신만의 방식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팔라모에게 현실은 리얼리티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가장 진실한 현실이며 그 현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며 이를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Komposition mit 8 rote Rechtecken, 95.7x110cm, 1964〉(8개의 사각형 빨강색의 구성)은 그의 초기 작품이며 작가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각각 크기가 다른 8개의 사각형들이 한 화면에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색은 동일하나 사각형의 크기와 모양은 다르다.

현실을 인식하는 자신의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브 클라인(Yves klein)과 동시대에 살았던 그는 유럽 추상미술에서 미니멀적 표현의 선두그룹에 있으며 새로운 예술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한 개념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추상미술이 탄생하는 배경도 대상의 외형에 더 이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부터이다. 기존의 예술은 대상을 변형·왜곡·해체시킴으로 해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면 추상미술에서는 대상을 관조하여 느껴지는 관점들을 단순한 색채와 기호, 도형으로 상징화하여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서로의 마음으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표현된 대상의 표면적 관점이 아닌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적 관점들이 형식을 떠나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사들이 선문답을 하나 현실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선문답은 지극히 리얼리티이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팔라모 역시 여기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현실을 떠나지 않았으나 현실에서 보이는 대상이 아닌 본질을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가장 리얼리티를 이야기 하고 있는 그의 작품이다.

혹자는 추상미술을 비판하며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현실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본다. 모두가 지금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인식과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추상적이다”라고 필자는 말한다.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의 개념처럼 정해진 것이 없는데 마치 모든 것이 정해진 것처럼 인식하고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현실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예술가의 정신이 작품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현실은 리얼리티 그대로 자신의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다. 자유를 추구하며 인식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추상미술이다.

필자가 팔라모의 작품을 독일 쾰른에 있는 루드비히 박물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 감동은 마치 오랜 도반을 만난 것처럼 그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처음 보는 작품인데 너무나 친숙하고 마지 필자가 한 것처럼 동일시되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떠한 설명이나 부차적인 이론적 접근이 아닌 본질적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가?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계산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 마음을 통하여 느껴지는 ‘지금’이 바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이러한 시공간의 초월성이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 〈Himmelsrichtungen I, 26.7x21cm(je), 1976〉(천국방향)을 살펴보자. 앞의 작품에서 현실을 보는 관점을 보여주었다면 이 작품은 현실 속에서 인식하는 또 다른 관점 즉, 생각의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천국을 보았는가? 아니면 어디에 천국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당시 독일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찾게 되는 또 다른 철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바로 불교와 선사상이었다. 때문에 초기에 그들은 불교나 선사상을 이해하는 것도 자신들의 방식을 통해서였다. 예를 들면 기존에 자신들이 인지하고 지향하였던 신학, 철학적 관점에 불교의 개념들을 도입시킨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인지한 불교나 선사상은 또 다른 관점의 신학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변화하여 불교와 선사상의 진정한 가치와 개념들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보았을 때 팔라모가 제시하는 천국은 기존의 천국의 개념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 누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비현실적인 관점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1976년 작품 〈Himmelsrichtungen I〉은 ‘누가 천국을 보았는가? 아니면 어디에 천국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4개의 동일한 크기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색이 교차되어 표현되고 있다. 서로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다르게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외형적인 변화는 더욱 그러하다. 이는 그의 인식의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초반에는 동일한 화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통하여 현실을 인식하는 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반의 작품들은 더 나아가서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현실의 가치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공은 비어 있으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각 개인의 경험이나 지식을 통하여 분석하고 개념화한다. 허공은 그 어떠한 분석이나 개념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보이는 하늘은 하늘이다. 하늘이 아닌 것도 아니고 하늘이 높은 것도 아니고 푸른 것도 아니다. 그냥 하늘은 하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어떠한 이유를 들어서라도 허공을 또 다른 허공으로 만들어 자신의 생각으로 규격화한다. 그러한 틀을 세상에 제시하며 자신이 보여주는 틀이 허공이라고 교육하고 강요하고 주입시킨다. 때문에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경우가 많다. 즉,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현실이라는 틀 속으로 모든 것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팔라모는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실을 인지하는 방법에서 과거의 방식을 따르고 있지 않을 뿐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개념은 지극히 지금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리얼리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선사들이 선문답을 할 때 역시 지금 현재의 현실을 떠나지 않으나 이를 인지하지 못하면 과거의 지식이나, 이성적 방법으로 그 답을 구하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답은 언제나 현실에 존재한다. 현실을 떠난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팔라모의 작품을 보면 그 역시 필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짧은 생을 살다간 팔라모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현존하고 있다. 작품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와 소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던 예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실을 지극히 리얼리티하게 보여주고 있는 그는 하지만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의 방식으로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현실의 존재성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가 선택한 것은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선사들의 방식을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마조선사가 말씀하신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모든 것은 현재의 마음을 떠나서 구하지 않는 것처럼 팔라모의 작품들도 현재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면에 나타나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들은 같지도 않으면서 다르지도 않다. 또한 현실을 떠나지도 않고 지금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추상미술이 추구한 것은 바로 현실이었다는 것을 팔라모의 작품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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