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부처요괴에 잡혀간 현장법사

마음이 헤이해지면
꼭 발생하는 재앙
끊임없는 정진 의미

“우환 속에서 오히려 살게 되고, 안락함 속에서 죽게 된다”는 맹자의 말, 참으로 되새길 만한 말이라 했지요? 우리는 늘 안락함을 바랍니다. 그것을 추구함은 나쁠 것이 없지요. 행복이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경향입니다. 그리고 안락함이란 행복의 기본 조건인 셈이지요. 그런데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진리가 있지요. 안락함도 무상합니다. 변합니다. 계속 안락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안락함에 빠져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 불행이 그 속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우환 가운데 있으면 괴롭기는 하지만 경계하려는 마음이 있기에 더 큰 불행이 닥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우환을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서 자신의 성장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환 속에 있더라도 절망하지 말 것이며, 안락 속에 있더라도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환 속에 있을 때는 그 우환의 해결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또 맹자의 좋은 말씀이 있네요.

“하늘이 장차 어떤 인물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 뼈와 힘줄을 수고롭게 하며, 그 몸뚱이를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만들고 그가 하는 일을 뒤흔들고 어지럽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단련하고 그 성품을 참을성 있게 만들어서 그가 하지 못하였던 것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또 힘든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는 말입니까? 힘든 일을 겪을수록 자신의 능력이 커 나가고,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웬만한 어려움은 다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와 반대로 어떤 좋은 환경에서 안락을 누리면서, 그 안락함이 계속되리라는 믿음으로 태만하게 있는 이들은 자신의 향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태만함을 타고 숨어들어오는 큰 불행을 당하게 마련이지요. 그에 대한 아주 적합한 표현이 <주역>에 있네요.

“위태로울까 걱정하는 자는 그 지위를 보전하고, 없어질까 근심하는 자는 그 있음을 보존하며, 어지러울까를 걱정하는 자는 그 다스림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군자는 편안하여도 그 위태로울 수 있음을 잊지 않고, 보존되어도 그 없어질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며, 다스려져도 어지러울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현장법사 일행은 조금 마음이 풀어졌지요? 변방이지만 인도 땅에 도착해서 아주 환대를 받습니다. 거기에 정월 대보름이라는 명절을 만나 아주 흥까지 났네요. 그래서 연등놀이까지 구경하면서 편하게 쉽니다. 그런데 이 고장 풍습이 좀 특이합니다. 연등축제인데 보통 축제가 아니군요.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특별한 양젖기름을 쓰는데, 그 양이 보통이 아닙니다. 서유기에 나오는 대로 옮기면 큰 항아리 세 개를 기름으로 가득 채우는데, 양으로는 천 오백 근이요, 이용으로 따지면 오만 냥 가까이의 돈이 든다 하네요. 큰 항아리 세 개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심지를 박아서 태우는데, 밤에 부처님이 다녀가시고 나면 그 많은 기름이 다 없어진다네요. 참으로 신기한 이야기죠?

그런데 정말 신기하기만 한가요? 이상하지는 않아요? 무슨 부처님이 기름 잡수시는 부처님인가요? 기름귀신 부처님? 이런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와! 신기하구나. 부처님의 영험이로구나!”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시면 바로 미신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진짜 부처님이라면 무슨 기름을 그렇게 거둬가겠냐는, 아주 이성적인 의심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기름 대느라고 그 지역 주민들이 엄청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건 서유기의 실제 상황입니다. 그 지역 주민이 기름 부역 때문에 매우 시달린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현장법사, 부처님 오신다는 말에 그냥 좋아서, 다른 사람들은 다 부처님 오실 때 일어나는 조짐이라는 거센 바람을 피해 숨는데도 꿋꿋하게 부처님 친견한다고 버팁니다. 참으로 장한 현장법사! 그런데 장하다고 칭찬만 하기는 좀 어리석은 신심을 지닌 현장법사!

과연 바람 속에 세 분의 부처가 나타나고, 현장법사는 허둥지둥 참배를 드리는데, 이 부처님들 현장법사를 칭찬하기는커녕 휙 낚아채서 사라지네요. 그 전에 손오공만은 그들이 진정한 부처가 아닌 줄을 알아채고 저지를 하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지요. 깜짝 놀란 저팔계와 사오정이 사방을 헤매면서 현장법사를 찾는데 그 때 손오공이 하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얘들아, 여기서 부르며 찾아도 소용없다. 사부님은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樂極生悲)’는 말대로 요괴에게 잡혀가버렸다.”

바로 요괴의 재난을 당하게 된 것이 편안할 때 방비하지 않고 해태해짐으로써 온 것이라는 것을 슬그머니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사고가 터졌을 때 나타난 수호신장들은 아주 대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삼장법사는 선을 닦는 마음이 늘어지고 지금 이 고을에서 노는 것에 빠지셨지요. 길한 태(泰)괘가 넘어가면 불길한 비(否)괘가 옵니다. 즐거움이 지나치면 슬픔이 생기고요. 그래서 요괴에게 잡혀간 것이지요.” 그리고 이 챕터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시로 이 사태의 본질을 묘사하고 있지요.

나태 방일하고 단속하지 않아 삼매를 닦는 마음 어지러우니(懶散無拘禪性亂)
재난의 위태로움 당연하구나, 도를 향한 마음 어두어졌네(災危有分道心蒙)

“이제 인도에 다 왔구나!”하는 안심에 풀어져버린 일행의 태도가, 그리고 그 고을에서 받는 환대에 취해 도를 향하는 마음이 해태해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칠계님? 앞에 태괘니 비괘니 하는 말은 무슨 말이냐구요? 애고, 그거 설명하려면 좀 길어지는데…. 짧게 말해볼게요. 주역의 괘 이름입니다. 태괘는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밑에 있는 괘지요. 비괘는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밑에 있는 괘고요. 그런데 태괘는 통한다는 뜻이 있고, 비괘는 막힌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상하다구요? 왜 하늘땅의 위치가 뒤바뀐 괘가 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정상적인 것이 막힌다는 의미를 가지느냐구요? 그것이 바로 주역의 깊은 뜻입니다. 높은 이가 낮은 이 아래로 자신을 숙이고, 낮은 이는 높은 이를 받들어, 이 둘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모습이 태괘라는 것이지요. 비괘는 그 반대이구요. 사람 사는 세상도 그렇게 되어야 한 대요. 높은 자들이 자신은 본디 높은 자로 태어났다 생각하여 위에서 뻐기고, 낮은 자들은 윗사람의 어려움 같은 것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뒷담화만 하고…. 그러는 모습이 바로 비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세상이 태괘의 모습으로 되어야 하겠지요. 여기서는 그렇게 어렵게 따질 것 없이 태괘는 운이 열리는 모습이고 비괘는 운이 막히는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운이 풀릴 수만도 없고, 늘 막히기만 하는 일도 없다는 것! 이것을 명심하고 넘어가야 하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삼쾌선생은 좀 보탤 말이 있네요. 단지 마음이 해태해지고 노는 것에 빠져서 이런 재앙을 만났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제대로 참 부처와 가짜 부처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함이 이 재앙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을 꼭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앞에서 몇 번 계속 물음을 던졌지요? “부처님이 무슨 기름귀신이냐?”하는 불경한 표현까지 써 가면서요. 그런 물음을 던질 줄 아는 바른 안목, 그것이 없어서 이런 위태로움을 당했다고 하는 겁니다. 백성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면서 기름을 거둬가는 부처님이라면 당연히 의심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부처님이 무슨 기름이 그렇게 필요하다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지도 않고 그런 짓을 할까”하고 물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상식에 어그러지는 행태가 있으면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몰상식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정말 몰상식한 일들이 종교라는 이름을 빌어, 신앙심이란 미명 아래, 영험이라는 너울을 쓰고 버젓이 행해지는 일들이 참으로 많거든요.

현장법사는 참으로 믿음으로 충만한 분이지요. 그런데 그 충만한 믿음에 걸맞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네요. 삼쾌선생도 자연스럽게 물었던 그 의문들을 가지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정말 문제지요. 그런 의문을 가졌지만 그 지나친 신심이 그 의문을 눌러버렸다면 그것도 또 문제구요. 아무튼 문제, 문제…. 그 문제가 바로 현장법사가 재앙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그런 문제가 된 상황에는 “이제 다왔구나”하는 안심에서 온 방일함이 놓여 있겠지만요.

요괴를 물리치는 이야기는 앞에서 많이 했고, 이번 요괴 물리치는 이야기도 비슷한 대목이 많아서 간단히 요약하고 넘어갈게요. 이번 요괴는 외뿔소 요괴들입니다. 벽한대왕, 벽서대왕, 벽진대왕이라는 이름을 가졌지요. 각각 추위를 물리친다, 더위를 물리친다, 더러움을 물리친다는 아주 멋진 의미를 가진 요괴들이네요. 오랜 수행을 통해 신통력을 갖게 되었는데 본디 양젖기름을 좋아하여,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부처님 노릇을 하면서 기름을 갈취해 왔던 것이지요.

상당한 신통력을 가진 요괴라서 쉽사리 이겨내지를 못하고 결국 태백금성의 조언을 받아 하늘의 신장을 원군으로 청합니다. 그때 원군으로 원 신장들은 하늘의 별자리인 이십팔수 가운데 목(木)과 연관된 네 별자리의 신입니다. 즉 각성(角星), 두성(斗星), 규성(奎星), 정성(井星)이지요. 이십팔수의 별자리들에 대해서는…. 하하, 이건 자습과제로 남겨 두겠습니다. 이 이야기 하려면 또 한참 헤매야 될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자습이야말로 공부의 궁극 아니겠습니까? 요즈음은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으니까, 공부의 궁극을 체험하시기를….

그리고 네 신장들 도움으로 요괴들을 토벌하는데, 이번에는 요괴 가문에서 보살 가문으로 이적한다는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두 죽어버리네요. 한 요괴는 토벌과정에서, 나머지 두 요괴도 결국 화가 치민 저팔계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라 하지만, 어떤 때는 악을 척결하는데 용서가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탐욕의 상징인 저팔계에서 좀 날뛰기는 하지만 눈 밝고 재주 많은 손오공으로 마음이 끌리게 된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좀 생각해 볼 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자습과제입니다. 공부의 궁극, 자습! 그 속에 여러분들의 무한한 발전이 있습니다. 결코 삼쾌선생이 게으름 피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면서! 오늘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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