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밖의 선 - 박원자 작가 (60ㆍ승진행)

작가 박원자는...숙명여자대학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불교에 입문했고, 동국대에서 역경위원을 역임했다. 1991~1992년 월간 〈해인〉에 ‘호계삼소’를 연재했고, 1996년부터 12년 동안 同誌에 ‘나의 행자시절’을 연재했다. 2008년 〈나의 행자시절 1ㆍ2ㆍ3〉, 2016년 〈스님의 첫마음〉을 출간했다. 그 외 〈혜암대종사 법어집/1995〉ㆍ〈이 땅의 유마 대원 장경호 거사/2005〉ㆍ〈길 찾아 길 떠나라/2007〉ㆍ〈누구 없는가/2009〉ㆍ〈인생을 낭비한 죄/2011〉ㆍ〈어떻게 살 것인가/2016〉 등의 저서가 있으며, ‘불교 입문에서 성불까지’를 지향하는 인터넷 도량 금강카페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20여 년 전이다. 10년 넘게 한 달에 한 번 스님들을 만나 뜨겁게 첫마음을 냈던 초발심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행운이던 때를 꼽으라면 단연 이 시간들이라고 말하겠다.”

불교와 첫 끈을 묶다
대학 3년때 ‘기초교리 강좌’ 수강
30대에 스님들 취재하며 초발심
12년간 ‘행자시절’〈해인〉에 연

출가 수행의 아름다움 알게 돼
25년간 130여명 수행자 만나

주변과의 갈등 ‘참회’로 풀어
매일 〈금강경〉 1독, 삼백배
회향작 〈부처님 일대기〉 구상

어느 작가가 최근 자신이 출간한 책의 머리에 적은 소회다. 그렇게 작가가 만난 스님들의 초발심 이야기는 모두 작가의 책 속에 아름다운 글자가 되어있다. 올해 여름 〈스님의 첫마음〉을 낸 작가 박원자가 그 글자의 주인이다. 25년 째 그 한 가지 원력에만 자신의 이름을 쓰고 있는 작가 박원자. 이제 그녀의 이야기도 아름다운 글자가 되기에 충분한 듯하다.

운문사 정진5-4차 천일염불선 입재 및 보리방편문 합독 행사.
“연재한 12년은 곧 나의 행자시절”
앞서 말한 책 〈스님의 첫마음〉은 법전ㆍ혜자ㆍ무여ㆍ혜거ㆍ월암 등 한국불교의 역사가 될 노장들의 행자시절을 소개한 책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 동안 한국불교 수행사와 생활상, 스승에 대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박 작가가 1996년부터 12년 동안 월간 〈해인〉에 연재한 ‘나의 행자시절’을 묶은 것이다. 2008년에 〈나의 행자시절 1ㆍ2ㆍ3〉으로 출간된 바 있다. 이번 책은 법전 스님을 비롯해 불필ㆍ명성ㆍ철산 등 새로운 스님을 모시고, 전작을 다듬어 낸 개정증보판 1권이다.

‘나의 행자시절’은 2008년 처음 책으로 묶어져 나왔을 때도 그랬고, 연재 당시 많은 독자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한 제목으로 12년을 살았다는 것이 그 사랑의 정표다. 그렇게 ‘나의 행자시절’은 지금의 작가 박원자를 있게 했다. 그 인연은 1991년부터 이듬해까지, 역시 월간 〈해인〉에서 연재했던 ‘호계삼소’를 박 작가가 쓰면서 시작됐다. 스님의 라이프스토리를 소개하는 연재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새로운 연재 ‘나의 행자시절’의 적임자를 찾고 있던 월간 〈해인〉의 편집장 스님이 ‘박원자’를 떠올린 것이다.

행자시절이란 출가자가 처음 맞이하는 뜨겁고 간절한 시절이다. 작가는 그 뜨겁고 간절한 시절의 이야기를 가뭄에 물을 받듯 받아와 식지 않는 글자로 옮겨 적었다. 그렇게 뜨거운 시절이 뜨거운 글자로 오롯이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 박원자 역시 수없이 출가하며 행자 아닌 행자로 살았기 때문이다. ‘나의 행자시절’ 속 글들의 주어가 ‘나’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12년을 연재해온 ‘나의 행자시절’은 작가 박원자의 ‘나의 행자시절’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그 고단한 시절의 이야기를 지치지 않고 받아 적을 수 있었던 것일까. 간단한 불연은 아닌 듯하다. 박 작가는 어떻게 불문 앞에 서게 된 것일까. 그녀의 ‘나의 행자시절’이 궁금해진다.

 

   
 2006년 11월 아미타불 염불선 천일기도 입재에서 해인사 원당암 법전스님과 함께 찍은 사진.

 
 
불교, 아마도 숙연
“불교, 그건 제게 아마도 숙연이었던 것 같아요.”

박 작가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 게시판에 붙은 한 장의 포스터가 숙연의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포스터는 한국불교연구원의 ‘불교교리 기초강좌’의 수강생 모집 포스터였다. 중국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박 작가는 졸업논문의 주제를 ‘위진남북조시대의 중국문학에 나타난 불교사상’이라고 정했다. 하지만 당시 박 작가는 불교의 ‘불’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난센스였다.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문학에 종교와 철학이 어떻게 반영됐는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중국문학’ 다음엔 왠지 ‘불교’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논문의 주제로 정했는데 막상 정하고 나니 막막해졌죠.”
그 막막함을 풀어준 것이 바로 그 포스터였다. 박 작가는 포스터를 보게 됐고, 그 길로 한국불교연구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불교에 빠진다. 그것도 푹~ 빠진다.

“스물 셋 살면서 그렇게 재미있게, 푹 빠져서 들었던 강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싶었어요. 처음 세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새로운 ‘세계’였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는 마치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녀의 빈 곳을 채워주며 그녀의 것이 됐다. 박 작가는 불교의 세계를 알게 된 순간 안경을 하나 쓴 것 같았다고 했다. 그 동안 잘 보이지 않던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에게 불교는 새로운 ‘안경’이었던 것이다. 꽃이 부럽지 않은 스물 셋, 그녀는 그렇게 불교를 만났다.

 
   
 2016년 2월 8회에 걸친 대승기신론 강좌를 수강하고 나서 수강생들과 함께 찍은 모습.
 
 
‘나’를 찾아서 … ‘초발심’ 알게 돼
“중학교 때부터 신문 기자가 꿈이었어요. 그런데 못했어요.”

박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 대신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정을 만들고 자식을 키우며 일반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박 작가는 삶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게 된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그 의문은 ‘나’에서 시작됐다. 나는 누구인가. 삶은 무엇인가. 참으로 오래된, 깨지지 않는 그 질문에 박 작가도 그냥 지나쳐가지 못하고 걸린 것이다. 스물세 살에 만난 불교 때문일까. 뒤늦은 의문은 간단하지 않았다. 삼십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의문은 더욱 깊어졌고 답은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박 작가가 만난 것이 ‘나의 행자시절’이다.

“이십 대 초반에 불교에 입문했지만 제가 초발심을 낸 것은 스님들을 취재하기 시작한 삼십 대부터였어요.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그때 스님들을 만났고, 그분들의 뜨거운 구도와 인생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며 나의 고뇌도 엷어지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랬다. 그때가 바로 박 작가가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행운이었던 때를 꼽으라면 단연 이 시간들이라고 말하겠다”고 했던, 스님들의 초발심 이야기를 들으러 다니던 그때다. 스스로 던진 의문들로 꽁꽁 묶여있을 때였다. 노장들이 들려주는 ‘나의 행자시절’ 속의 일 구 일 구는 스물세 살 때 만났던 불교처럼 그녀의 결박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박 작가는 스님들이 온 몸으로 살아낸 그 절실한 시간의 기록들을 더욱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출가라는 특별한 길에서 첫마음을 어떻게 냈고 지켜갔는지 들으러 간 저에게 스님들은 깊고 뜨거운 인생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스님들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내가 그 시절, 그 자리에 가 있었어요.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했고, 엄격하고 바른 스승 앞에 있었고, 때로는 치열하고 지난한 구도의 현장에 몸담기도 했어요. 그래서 스님들을 취재하고 돌아와 글을 쓸 때면 어느덧 내가 스님들이 되어 있었어요.”

그랬다. 박 작가는 한 사람의 스님을 만날 때마다 출가했다. 그렇게 그녀는 ‘첫마음’의 아름다움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첫마음을 낼 때가 깨달음의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 역시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용성선원에서 정좌와 와명상으로 정리하고 비운 후 모습.
나의 신행, 나의 수행 … 절(拜)
출가 수행자의 첫마음에서 오래된 의문을 풀기 시작한 박 작가의 수행은 좀 더 구체적인 길을 찾는다.

“뭔가 이제 알았다고 생각하고 뒤돌아서면 어느 새 또 다른 의문이 다가왔어요. 그렇게 또 다른 의문의 시작은 ‘주변’과 ‘타인’이었어요. 언제부턴가 모든 것들이 제가 살아가는 데 걸림돌처럼 느껴졌어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됐어요. 부모와 남편, 자식까지, 모든 주변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박 작가는 이제야 조금 뭔가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앎’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고(苦)의 바다에 있었다. 그 고의 시작은 ‘미움’이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모두 미웠다. 이 또한 답이 없는 숙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 작가에게 한 소식이 들려온다. 병마를 극복한 후 참회와 하심만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음을 알았고 진정한 지혜와 자비 그리고 용기는 참회에서 나온다는 어느 스님의 고백이었다. ‘참회’와 ‘하심’이었다. 모르는 말도 아니었다. 늘 듣고 쓰던 말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수행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미 자기 안에 다 있는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법이 그런 것이었다.

“참회와 하심, 참 쉬우면서 어려운 일이죠. 두 법어가 나를 때렸지만 어떻게 매를 맞아야 할지 몰랐어요.”
박 작가는 어느 날, 문득 절이 하고 싶어져 가까운 절을 찾았다. 그리고 삼천배를 했다. 처음 해보는 삼천배였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그 날은 성도재일이었다. 그녀가 얻은 답은 ‘절(拜)’이었다.
“절을 하면 마음이 정화돼요. 마음이 깨끗해지면 이내 고요해지죠. 고요해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져요. 그리고 밝아지면 보여요. 잘못됐던 ‘나’가 보여요. 보이니까 참회하게 돼요. 그리고 참회는 하심에서 출발해요.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라는 생각이 들고나니 모든 게 다 편안해졌어요.”

박 작가는 참회를 통해 달라지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동안 미움의 대상이었던 주변을 찾아 직접 참회했다. 남편에게 참회하고 어머니, 친구 등 모두에게 참회했다. 박 작가는 그 후로 매일 〈금강경〉을 일독하고, 삼백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천팔십배와 삼천배도 기도 때마다 수시로 한다. 그녀의 두 딸도 틈만 나면 백팔배를 한다. 이제 남편은 그녀가 운영자로 있는 금강카페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에서 함께 수행하는 도반이다. 금강카페는 청화 스님의 염불선 수행을 이어 정진하는 모임이다. 그렇게 한 사람이 찾은 길 위엔 여러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구도(求道)’인 듯하다.

회향작은 ‘부처님 일대기’
“출가의 핵심은 수행이고, 수행의 핵심은 변화에 있다고 생각해요. 수행이 인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시키며 역동적으로 살아가게 하는지 계속 전하고 싶어요.”

박 작가의 원력은 많은 수행자의 삶을 대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수행자 한 사람의 빛나는 삶이 여러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은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박 작가 앞에 앉은 스님들은 모두 기꺼이 입을 연다. 말을 아끼는 수행자들이지만 그녀 앞에선 아끼지 않는다. 박 작가가 2009년에 출간한 법전 스님의 일대기 〈누구 없는가 / 김영사〉를 준비할 때였다. 법전 스님은 말씀이 없기로 유명했다. 많은 대중이 걱정했다. “책 한 권이 과연 나올까.” 책은 나왔다. 그 무거운 입에서 책 한 권이 나온 것이다. 그 무거운 입을 열었던 비결은 그녀가 온몸으로 그 이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그 뜨거운 이야기들을 불러낸 것이다. 박 작가는 회향작으로 ‘부처님 일대기’를 생각하고 있다. 부처님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것이다.

“‘나의 행자시절’을 썼을 때처럼 부처님을 인터뷰하고 싶어요. 부처님 앞에 앉아 부처님의 첫마음을 내던 그 순간부터 첫마음을 이룬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걸었던 부처님의 시절을 받아 적고 싶어요.”

그렇다. 박원자의 원력이라면 기다릴 일이다. 기다려지는 글이다.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그 길이 박원자의 글자로 옮겨진다면 많은 불제자들이 또 다른 모습의 길을 걸어볼 수 있을 것이다. 말 없는 스님의 입을 열었던 박 작가는 이제 아득해진 부처님의 입을 열어보려 한다. 참으로 신나는 원력이다. 기다려진다.

수행자의 삶 간절히 들여다 보다
“밖에 있기로 했어요.” “차라리 출가를 하지.”

누군가 박 작가에 말했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이름만 없지 몸과 마음이 모두 산문에 있었던 박원자였다. 들을 만한 말이었다. 박 작가도 한참 출가 수행자의 아름다운 삶에 마음이 가 있을 때, 출가에 대한 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끝내 출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130명이 넘는 스님의 삶을 간절한 마음으로 들여다 본 영원한 행자다.

“출가라는 귀한 길은 몇 생을 걸친 서원으로 이뤄진다고 했기에, 금생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가족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또 각자의 역할이 있으니 까요. 세간에서 스님들의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기록해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한 소임이라고 확신했어요. 그래서 그냥 밖에 있기로 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밖’에 있기로 했다. 밖에서 열심히 안쪽을 보기로 했다. 그녀는 오늘도 산문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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