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母列傳 - 법림(法琳)·영탄(靈坦) 스님

▲ 1686년 상주 용문사에서 조성된 목조여래좌상(사진 왼쪽)과 목조보살좌상(사진 가운데)의 모습. 두 불상은 2013년 영동 중화사의 화재로 소실됐다. 사진 오른쪽은 서울 심곡암 목조보살좌상으로 법림 스님과 영탄 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2013년 7월 10일 원인 불명의 화재로 충북 영동 중화사 대웅전(도문화재자료 제33호)과 목조불상(도유형문화재 제288호) 등이 소실됐다. 이 가운데 목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좌상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법림 스님과 영탄 스님이 만든 제작연대가 밝혀진 불상이다.

17세기 후반 불상과 불화 제작
유일한 중화사 목조불상들 소실
영탄 스님 혜희 계보의 조각승
심곡암 보살상, 법림·영탄 作 추정

법림(法琳) 스님은 불상과 불화를 조성한 승려 장인으로, 여러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수화승으로 만든 기년명 불상은 1점 밖에 조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부화승 영탄(靈坦) 스님은 혜희(惠熙, 慧熙) 스님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불상에 보조 작가로 참여한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 법림 스님과 영탄 스님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단편적인 문헌 기록을 통하여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스님들이 만든 중화사 대웅전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1686년에 경상북도 상주 서령 백화산 용문사 법당에 봉안하기 위하여 석가삼존상과 관음보살상과 관음도를 법림 스님, 영탄 스님, 학찬(學贊) 스님, 천순(天順) 스님, 일옥(一玉) 스님, 천오(天悟) 스님이 제작하였다.

이 불상과 불화가 조성된 경북 상주 백화산 용문사는 1617년에 이준(李埈)이 편찬한 상주 읍지인 <상산지(商山志)>에 “용문사는 경상북도 상주군 백화산 중에 … 지금은 없다(在慶尙北道尙州郡白華山中 … 今無)”라고 적혀 있어 임진왜란 기간 중에 소실되어 폐사(廢寺)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686년에 불상과 불화를 만든 것을 보면 17세기 후반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 가운데 석가와 미륵·제화갈라보살을 조성한 것은 대웅전이나 응진전 등에 봉안하기 위함이다. 불상 조성에 참여한 스님은 노덕(老德) 원익(元益) 스님, 인기(印機) 스님, 의청(儀淸) 스님이고, 증명(證明)은 처영(處英) 스님, 지전(持殿)은 명운(明運) 스님 등이 참여하였다. 특히, 중형 불상 조성에 소임을 맡은 스님과 시주한 신자를 합쳐 총 262명이 참여한 것은 사찰의 규모와 경제 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이다.

우선, 법림 스님은 수화승으로 1684년에 경남 산청 율곡사 괘불도(掛佛圖)을 조성하고, 1686년에 경북 상주 용문사 목조삼존불좌상과 관음보살좌상 및 관음도를 제작하며, 1709년에 경상도 용궁(龍宮) 용비산 장안사(長安寺) 종각 중수(重修)에 도감(都監)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법림 스님의 활동 시기는 1684년부터 1709년까지 밝혀졌고, 경북 예천 장안사에 거주한 승려장인으로 보인다. 스님이 1680년대 수화승으로 불화와 불상을 제작한 것을 보면, 1640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나 수련기를 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화승 영탄 스님은 1677년에 수화승 혜희 스님과 지금의 전북 완주 대둔산 용문사에 목조약사불좌상(현재 전주 일출암 봉안)을 제작하고, 1686년에 부화승으로 법림 스님과 상주 용문사 불상 등을 조성하였다.

영탄 스님의 스승으로 여겨지는 혜희 스님은 17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작가로 태전(太顚) 스님과 법령(法靈, 法令) 스님의 계보에 속한다. 혜희 스님이 1640년부터 1677년까지 활동한 것을 보면, 영탄 스님은 상당히 많은 나이에 얻은 막내 제자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영남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태전(-1600-1615)→법령(-1615-1641-)→혜희(-1640-1677-)→영탄(-1677-1686-)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 일옥(一玉) 스님은 1686년에 상주 용문사 목조삼존불좌상과 관음보살상 및 관음도를 조성하고, 1698년에 장릉 봉릉 조성소 화승(畵僧)으로 참여한 것을 보면 주로 불화승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천오 스님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불화승으로, 1686년에 수화승 법림과 상주 용문사 불상과 불화를 제작한 후, 1718년에 수화승으로 경북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삼신불회도(三身佛會圖)와 삼장도(三藏圖,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소장)를 조성하였다.

중화사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양 협시보살을 배치한 삼존불좌상이다. 본존과 왼쪽협시보살은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이고, 오른쪽 지장보살상은 근래에 제작된 것이다.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불상은 2007년에 개금작업 중에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었다.

목조석가불좌상은 전체 높이가 135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중형 불상에 속하는 작품이다. 불상은 얼굴을 앞으로 약간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신체와 얼굴이 1:0.35의 비율로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불상과 비교하면 신체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색난 스님 작 강진 옥련사 불상(1684년), 단응 스님 작 예천 용문사 목각탱(1684년), 마일 스님 작 안성 칠장사 불상과 신체 비례, 착의법 등을 비교하면 차이가 난다.

앞으로 숙인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가 표현되고, 정상부에 좁고 높은 원통형 정상계주와 이마 위에 가늘고 좁은 반원형 중간계주가 있다. 계란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콧등이 평평한 삼각형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표현했다. 이러한 어린 소년의 해맑은 얼굴의 인상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색난이나 단응 및 금문이 제작한 불상과 많은 차이가 있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고 바닥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바깥에 걸친 두꺼운 대의는 변형통견으로, 대의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짧게 걸친 후,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하반신에 펼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은 복부에서 한 가닥이 넓게 초승달처럼 펼쳐지고 끝단이 지그재그로 처리되고, 그 옆으로 낮게 깔린 옷 주름이 네 가닥 펼쳐져있다. 이와 같은 하반신의 옷자락 처리는 조각승 색난이나 승호가 제작한 불상과 많이 다르다. 대의 안쪽에는 편삼을 입지 않아 맨살이 드러나는데, 여래상이 편삼을 걸치지 않은 착의법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석가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는 수평으로 접어 단순하게 처리했다.

대좌는 팔각대좌 위에 연화좌를 올려놓은 단순한 구조이다. 목조보살좌상은 본존과 같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염보주로 장식된 커다란 보관 안쪽의 머리카락은 두 갈래로,나머지 머리카락은 보관 밑으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인상과 대의처리는 본존과 동일하지만, 손의 위치는 본존과 달리 왼손을 어깨까지 들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인상과 양식적 특징을 갖춘 보살상이 서울 성북 심곡암에 봉안되어 있다. 사찰 측에 의하면 “요사체에 봉안된 보살상은 심곡암이 창건된 1930년대부터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심곡사 목조보살좌상은 높이가 88.3㎝로, 보관(寶冠)이 없어진 상태이고, 정수리에는 둥글게 말린 높은 보계(寶?)가 있다. 머리카락은 귀를 따라 앞뒤로 흘러내리다가 귀 볼에서 한 가닥으로 꼬여 어깨 위에서 세 가닥으로 둥글게 말린 후에 두 가닥으로 늘어져 있다. 옆으로 약간 퍼진 얼굴에 반쯤 뜬 눈은 수평으로 처리하고, 코는 원통형으로 곧게 뻗어 있으며, 입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보살상의 착의법은 변형편단우견(變形偏袒右肩)으로, 바깥에 걸친 대의자락이 오른쪽 어깨에 짧게 U자형으로 내려오고, 나머지 옷자락은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흘러내려 복부에서 편삼과 자연스럽게 겹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은 복부에서 한 가닥이 넓게 초승달처럼 펼쳐지고 끝단이 지그재그로 처리되고, 옆으로 낮게 깔린 옷주름 네 가닥이 표현되어 있다. 보살상 뒷면은 목 주위에 넓게 대의자락이 접혀져 있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엉덩이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수평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고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위로 엄지와 중지를 붙이고 있다.

이 두 보살상을 비교해 보면, 높이는 영동 중화사 보살상이 89.0㎝이고, 서울 심곡암 보살상이 88.3㎝로 거의 차이가 없다. 영동 중화사 보살상은 보관이 있고, 서울 심곡암 보살상이 보관이 없지만, 조선후기 제작된 보살상은 상투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높이에 보관의 유무가 관련이 대부분 없다. 그리고 보살의 인상은 안면의 높이와 폭이 거의 동일한 치수로 넙적한 얼굴에 가늘게 뜬 눈, 코등이 평평한 코, 넓은 인중, 미소를 머금은 입에서 풍기는 인상이 유사하다. 두 보살상의 착의법은 들고 있는 손의 위치가 다르지만,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 자락이 U자형으로 짧게 늘어진 형태와 그 뒤로 한 가닥의 주름이 접힌 점, 왼쪽 어깨에 수직으로 내려오는 대의 자락의 끝부분에 사선으로 접힌 끝자락 형태, 편삼이 복부에서 대의자락 안쪽으로 들어가는 형태 등이 유사하다.

또한 서울 심곡암 보살상과 중화사 여래상은 왼쪽 어깨에서 수직으로 늘어진 대의 자락의 상단에 수직으로 접힌 옷자락이나 넓은 대의자락 뒤에 가늘게 하나의 선으로 옷주름이 처리된 점, 왼쪽 겨드랑이로 접힌 한 가닥의 옷자락 등도 같다. 뿐만 아니라 중화사 여래상과 보살상, 서울 심곡암 보살상은 하반신에 걸친 옷자락도 끝부분이 각진 형태를 하면서 복부에 앞으로 넓게 펼쳐진 옷자락 끝단이 지그재그로 처리되었다.

따라서 서울 심곡암 목조보살좌상은 수화승 법림 스님과 영탄 스님이 1686년에 상주 용문사에 봉안하기 위해 만든 관음보살상이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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