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밖의 선 - 김경호 전통사경 기능전승자(53ㆍ한국전통사경연구원 원장)

 

김경호 원장은…1963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학교 대학원미술사학과(사경 전공, 문학 석사)를 졸업했다. 2010년 전통사경 기능전승자(고용노동부지정 제2010-5호)로 지정됐다. 2000년 서울 동국대문화관에서 첫 번째 개인전(외길 김경호 사경전)을 시작으로 20여 회의 개인전 및 초대개인전을 열었다. 연세대학교 사회교육원과 동국대학교 사회교육원 사경지도자과정 강사를 지냈다. 제1회 불교사경대회 대상 등 다수 수상했으며, 시집 〈학의 울음>과 한국 최초의 사경 개론서 〈한국의 사경>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섭씨 40도의 방, 푸른빛 감지(紺紙), 그 위로 금니(金泥)를 머금은 0.1mm의 붓이 머무는 듯 지나간다. 붓이 지나간 자리엔 〈법화경 약찬게〉, 〈화엄경 보현행원품〉 변상도 등 부처님의 법신사리가 장엄된다. ‘금니사경’이다. 붓의 주인은 고려전통 금니사경의 맥을 잇고 있는 전통사경 기능전승자(고용노동부지정 제2010-5호) 김경호 한국전통사경연구원 원장이다. 40여 년 사경을 해온 그는 20여 년 전부터 40℃의 방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옮겨 적고 있다. 그의 사경은 단순히 감지 위의 금니가 아닌 예술로 평가받고 있으며, 수행과 신행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는 오늘도 40℃의 방에서 금빛 붓을 든다.

불심으로 잡은 사경붓

선사 게송 적으며 사경 시작
고교 때 룸비니불교학생회 활동
세 번의 출가 시도, 부친의 만류 


고려전통 금니사경 연구 복원

20여 차례 개인전 열어
40℃에서 하루 8시간 씩 작업
9개월 이상 걸린 작품도 다수

회고전 열고 현대화 작업 모색

2006년 〈한국의 사경> 출간
2010년 전통사경기능전승자 지정
남은 원력은 사경문화 확산

40년 금강의 세계를 그리다 
2016년 10월 5일, 서울 아라아트센터. 전시장 벽면엔 금빛과 먹빛이 빚어낸 글씨와 그림이 가득 걸려 있다. 백 원짜리 동전만한 무궁화 꽃잎엔 금빛 실선 2만 5천 개가 지나가고, 5cm가 조금 넘는 7층 보탑들의 한 층 한 층에는 7만 자의 묘법연화경 한 자 한 자가 들어있다.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그의 글과 그림은 부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형상화 한 변상도이다. 한국전통 사경의 맥을 잇는 외길 김경호 원장의 40년 사경 인생과 작품을 총망라하는 회고전, ‘잉불잡란격별성’이 열렸다.

회고전에는 감지금니일불일자 ‘화엄경약찬게’, 감지금니7층보탑 ‘묘법연화경 견보탑품’, 감지금니 ‘아미타경ㆍ아미타불48대원’과 1996년 제작되어 21년 만에 공개되는 역작 ‘백지묵서 금강반야바라밀경(15m×3m)’ 등 김경호 원장이 가려 뽑은 최고의 작품 30 점이 전시됐다. 금빛의 그의 글씨(불경)와 그림(변상도)은 고려전통 금니사경의 맥을 잇는 것으로서, 작가가 매일 8시간 이상 작업하여 길게는 9개월에 걸쳐 완성한 작품들도 있다. 그 규모와 정성은 가히 감동적이다.

 

한국 유일의 전통사경 기능전승자인 김경호 원장은 지난 20여 년간 신라와 고려시대 등 우리나라 1700년 불교 역사에서 이어져 온 ‘사경’을 연구해 왔다. 그는 1997년 조계종총무원과 동방연서회가 공동주최한 제1회 불교사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사경가로서의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0년 서울 동국대문화관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전 ‘외길 김경호 사경전’을 시작으로 미주한인이민 100주년 기념 초대전(로스엔젤레스), 한국문화원 초대전(뉴욕), 불교중앙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특별초대전, 한국과 세계의 불경전 특별초대전, 대장경천년 세계문화축전 금사경 특별초대전 등 국내외에서 갖은 20여 차례의 개인전과 초대개인전을 통해 사경이 단순히 경전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닌 창조적 예술의 세계이고, 여법한 수행의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붓글씨 쓰는 아이
전통사경 기능전승자 김경호, 그는 어떻게 사경을 시작한 것일까. 그 인연은 ‘붓글씨’, 즉 서예였다.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부터 붓을 잡았다. 그에겐 먹을 갈아 글을 쓰는 부친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농부였으나 학문에도 밝았다. 부여받은 삶은 들판에 있었지만, 지역 향교의 전교를 지낼 만큼 부친의 선택적 삶은 학문과 풍류에 닿아 있었다.

다섯 살배기 김경호는 부친의 붓글씨 한글 교본으로 글을 떼고, 어깨 너머로 보이는 뜻 모를 글자(한자)들을 바라보면서 컸다. 어린 김경호는 그 때부터 글씨와 가까웠다. 붓과 가까웠다. 일찍이 붓과 글씨에 가까웠던 어린 김경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를 시작한다. 서예반 선생님이 김경호를 알아본 것이다. 김경호는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 친구와 함께 매일 두 시간 씩 붓글씨를 썼다. 한글은 물론 이미 한문까지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 대회는 물론 서울의 큰 서예대회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수상을 한다. 중학교에 진학한 김경호는 미술반에서 미술과 함께 서예공부를 계속 이어간다. 그렇게 그의 글씨는 날로 깊어 갔다. 김경호는 이제 글자가 아닌 ‘글’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의 붓 끝에 담고 싶은 글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집안에 있던 몇 권의 책에서 선사의 게송을 보게 된다. 일구 일구가 김경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다. 불경과 불서 역시 귀한 시절이었지만 그의 부친과 모친이 모두 불자인 덕분에 그는 선사의 게송을 볼 수 있었다. 그날부터 김경호는 게송을 쓰기 시작한다. 김경호의 사경은 그렇게 시작됐다.

 

좌절된 출가의 꿈, 그리고 또 다른 출가
“선사가 되고 싶었어요.”
김경호는 매일 선사들의 게송을 읽고 쓰면서 걸림 없는 선(禪)의 세계를 보게 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 게송들은 종이가 아닌 그의 삶 깊숙한 곳에 들어와 쌓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익산룸비니불교학생회를 찾아 불교 공부를 시작한다.

“불교가 궁금해졌어요. 그저 어머니 따라 절에 다니는 일과는 다른 것이었어요. 알고 싶어졌던 거죠. 그때 불교공부 많이 했어요. 학교 공부보다 불교 공부가 더 좋았어요. 〈벽암록〉이 좋았고, 〈법성게〉가 좋았어요. 〈법성게〉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불교가 좋아진 김경호는 마침내 출가를 결심한다. 그리고 실천에 옮긴다. 그는 ‘행자 김경호’를 그리며 야간열차를 타고 대흥사로 향했다. 고2 때의 일이다. 하지만 ‘행자 김경호’ 그 이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행자 김경호는 부친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의 출가에 대한 생각은 가벼운 결심이 아니었다. 간절히 불가의 가계에 들고 싶었다. 그는 두 차례 더 출가를 단행하지만 번번이 부친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도 부처님이 좋고 부처님 말씀이 좋고 절이 좋다. 네가 불교 공부하고 불교 좋아하는 것은 괜찮지만 출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부친의 간곡한 만류로 출가에 대한 원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원은 훗날 더 큰 원을 낳았다. ‘사경’이 그것이다.

‘글씨’는 운명
출가의 원을 접고 학교로 돌아온 그는 한 동안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마음을 잡아준 것은 ‘시(詩)’였다.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시를 배우게 된다.

“제가 처음 출가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 국어 선생님께 시를 한 편 지어 올리고 기차에 올랐는데, 돌아온 저에게 선생님께서 계속 써보라고 하셨어요.”

모든 것은 인연법이었다. 김경호에게 시인의 피가 있음을 알아본 국어 선생님은 당시 금서였던 시집과 관련 노트를 구해다 주는 등 그에게 깊은 정성을 쏟았다. 그 인연으로 김경호는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시를 공부한 것 역시 훗날 그가 게송을 번역할 때 많은 도움이 되어 준다.

대학을 마치고 군복무를 시작한 김경호는 다시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필체가 좋았던 그였기에 그는 군에 필요한 온갖 글씨를 써야했다. 그 시절만 해도 손수 써야 하는 글씨들이 많았다. 상장을 비롯해서 보고용 차트, 문서, 간판, 하다못해 문패까지 써야 했다.

“군 복무하는 동안 한 200만 자는 쓴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들 역시 훗날 제가 사경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흔한 말로 ‘글씨’는 김경호의 ‘팔자’였다.

 

다시 붓을 잡다
전역한 후 김경호는 서예학원을 열었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삶보다는 서예가로서의 삶에 기울어있었다. “서예를 하면서도 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꾸준히 썼죠. 시집도 냈으니까요.”

김경호 원장은 낮엔 학원생에게 서예를 가르쳤고, 나머지 시간엔 사경을 했다. 좋아하는 법성게를 쓰고, 경전들의 경구들을 옮겨 적었다. 붓으로 한 자 한 자 부처님 말씀을 옮기며, 이루지 못한 출가의 서원을 대신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사경을 생각했다. 단순히 글씨를 옮겨오는 것이 아닌 밀도 있는 신행과 예술로서의 사경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각지의 박물관을 돌며 선조들의 사경을 더듬어 가던 김경호 원장은 고려전통기법인 금니사경을 보게 된다. 사경 없이는 불교가 전래, 전파될 수 없었기 때문에 사경이 없는 불교란 생각할 수 없다. 사경이 부처님의 말씀을 옮겨 적는 일이므로 옮겨진 글은 법신사리가 되는 것이고, 그 일련의 일들은 불사가 되는 것이다. 곧 신앙의 한 가지인 것이다. 이러한 법신사리에 대한 신앙이 금ㆍ은사경이라는 ‘장엄경’의 연원이 된 것이다.

김경호 원장은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금니사경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금분과 종이(감지)를 연구하고 각 시대별 사경을 연구해 나갔다. 하지만 연구는 쉽지 않았다. 이름 없는 사경가에게 선조들의 사경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며, 그와 관련된 문헌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발로 찾아가 옛날 것을 보고, 돌아와 붓을 드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렇게 발로 걸어 지도를 그리듯 그는 1700년 사경 역사를 그렇게 더듬어 갔다.

“최소한 섭씨 35도는 넘어야 하고, 40도는 되어야 금니가 마르지 않고 붓을 제대로 따라가요. 더 높으면 더 좋은데 42도 이상은 힘들더라고요.”

섭씨 40도의 방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야말로 금니사경은 고행이었다. 40도라는 온도도 넘어서야 하고, 한 자 한 자 글을 놓아야 하는 길고 긴 시간도 넘어서야 한다. 또한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촘촘한 붓과 붓의 간격을 견뎌내야 한다. 한 순간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랬다간 긴 시간의 고행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2006년 마침내 그는 한국 최초의 사경 개론서인 〈한국의 사경〉을 출간하며 잊혔던 우리 사경의 맥을 찾아낸다. 그는 2010년 전통사경 기능전승자(고용노동부지정 제2010-5호)로 지정된다.

“사경은 단순히 베끼는 것 아니죠”
“사경을 하는 것은 수행을 하는 것이죠. 그것도 아주 밀도 높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한 글자 한 글자 붓 끝에 머물다보면 시간은 일 구 일 구 법으로 변하고 법으로 변한 시간은 이내 지혜로 다가오죠.”

그랬다. 사경은 단순히 경전의 글자를 베끼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인 예술의 세계이며, 불법을 구하는 불제자들에겐 깊은 수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경호 원장은 사경을 하기 전, 먼저 몸과 주변을 정돈하고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참선과 간경을 한다. 그리고 붓을 들면 한 자 한 자 붓 끝의 글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 모든 망상을 걷어낸다. 한 순간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지면 그 순간 사경의 의미는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사경은 개인적인 수행의 방편이면서, 나아가 법당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는 일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어 가꾸는 ‘불사’인 것이다. 김경호 원장은 사경이 다른 불사와 수행처럼 그 저변이 넓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원이라고 했다. 김경호 원장의 40년 사경 인생은 어려운 길이었다. 그의 호가 ‘외길’인 것처럼 외길을 걸었다. 그의 남은 원이 또 다른 외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지난 10월 5일에 있었던 회고전의 의미를 ‘회향과 모색’이라고 했다. 전통의 기법을 넘어선 현대화 작업을 선언하기 위함이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전통작업을 ‘의미’로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 모색의 하나로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전세계 유명 박물관에 유치하려고 한다. 한국 사경의 세계화를 위함이다. 그와 인터뷰를 하던 날, 그는 며칠 후에 예정된 뉴욕 출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서실 한 쪽 작은 방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작은 서실과 멀고 먼 이국땅에서 위대한 인연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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