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도덕적 위기에 대한 개탄의 소리는 귀에 면역이 될 정도로 요란하다. 너나 할 것 없이 도덕성 회복의 목청을 돋우고 있으나 찢어진 거미줄을 손가락으로 수리하려는 짓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긴 가뭄에 소나기처럼 이 절망감을 녹여 주는 아름다운 의인(義人)들의 이야기,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기독교 복음서에서 유래됐다. 강도를 만난 한 유대인이 부상을 당한 채 길 위에 쓰러져 있었지만, 유대교 제사장 등은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 이때 유대인이 천시하는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해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의인,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큰 관심은 우리 사회의 비도덕성에 대한 아픔에서 나온 것이리라. 얼마 전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 화재 참사 당시, 부상자 4명을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긴 동해 묵호고 A교사가 화제가 되었다.

또한 어느 대기업 계열 공익재단이 그를 의인상수상자로 선정했지만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수상과 상금 5000만원을 한사코 거절했다. 가슴이 뭉클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A교사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우리 사회에 대해 큰 화두를 던지는 것이리라.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바르고 행복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초가 바로 윤리 도덕이다. 이러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수레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한다.

첫째는 개인의 도덕성에 기초한 개인 윤리적 차원이고, 둘째는 사회 구조와 제도에 관심을 두는 사회 윤리적 차원이다. 근래 의인에 대한 처우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대한 논의들은 사회 윤리적 차원의 논의들이다. 이러한 접근은 현대사회가 지닌 구조와 기능의 복잡성으로 인해 사회의 도덕성을 개인의 도덕성에만 의지할 수 없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서교동 아파트 화재 당시 초인종으로 주민을 깨우고 자신은 숨을 거둔 안치범의 고귀한 행동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현대사회에서 의인이 되기가 쉽지 않다.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형태의 위험과 피해를 감수해야 할 용기와 정의감을 필요로 한다. 이에 의인들이 입은 각종 피해와 손실을 보상하여 줄 수 있는 효율성과 수월성을 갖춘 법적, 제도적 장치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의인 선정에 대한 절차의 까다로움, 피해 보상에 대한 규정의 비체계화 등으로 인해 많은 혼선과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초인종 의인 고 안치범 씨의 경우도 의인 선정을 하기 위해 가족이 그 증거자료를 만들어 제출해야 한다고 하니 그 가족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참으로 민망스럽다.

의인에 대한 처우 문제와 함께 착한 사마리안 법에 논쟁도 일어나고 있다. 이 법은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조해 주어도 자기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조해 주지 않은 사람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법이다. 60대 운전사가 운전 중 심장마비로 졸도했는데 승객은 신고도 안 해주고 공항으로 떠나 결국 그 운전사가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물론 착한 사마리아인 법과 유사한 내용의 조항을 가진 법은 형법을 비롯해 산재해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독립된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 의무와 행위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개인의 인권을 훼손하고 남용될 가능성은 없는가 하는 비판도 높다. 의인과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당위적이고 규범적인 틀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되며,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 착한 존재이고, 착하면서 이기적인 매우 복합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인과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붓다의 연기론과 자비 정신을 윤리이론으로 정립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Emmauel Levinas)타자 윤리가 생각난다. 그는 다른 존재 덕분에 라는 존재가 성립한다고 보면서 타자의 존재 자체를 윤리라고 주장한다. 그의 타자 개념은 자기중심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현대인에게 자아 중심이 아닌 타자 중심으로 보는 시선을 강조한다.

연기와 자비의 강물로 이 메마른 땅에 생기가 가득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붓다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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