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자기가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습니까?

집착을 하지 마라.
집착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놓게 된다.
그냥 용광로에 놓는 작업만 하라.

오늘 여러분이 너무 많이 기다리신 것 같습니다. 나도 안개가 끼어서 공항에서 무척 기다린 데다 비행기 타고도 지연이 돼 가지고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렸어요. 일찍 나와서 세 시간씩 기다린 사람도 있고요. 그래서 여러분도 기다리게 됐네요. 여러분이 기다릴까 봐 딱해서 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면 여러분도 지루하겠죠?

우리가 기다린 지루함은 한생각으로 돌려놓고 한마음 한뜻으로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한생각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그 점을 함께 논의해 봅시다. 설법이라기보다는 대중 토론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모든 일들을 하고 또 서로 주고받으면서 먹고사는, 공생으로서 공용하고 있죠. 그러니 가정에서의 어려움이나 다른 모든 문제를 각자 마음에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묘법이 바로 우리들의 법이자 부처님 법이고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님 법이 따로 있어서 생활과 동떨어져 있다고, 부처님 도량에 가야만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각자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그 체 없는 마음은 우주를 싸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청정함도 바로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고, 또 걸림 없는 것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고, 또 하나도 버리지 않는 법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고, 즉 말하자면 갖추어 가지고 있다 이 소립니다. 또 일심으로써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데 그것도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모든 재료를 가지고 있고 모든 법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니 아주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자유자재권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부처님 법은 자기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중생이니까 부처님의 그 묘한 법, 광대무변한 법은 모른다.’라고 생각을 하시죠? 여러분이 고등 동물로서, 한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은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수억겁에 걸쳐 ‘아, 이런 거는 잘못된 건데….’ 하고 반성하고 고치면서 살아오던 과정이 있어서 현재 인간에 이르기까지 진화되면서 마음을 그렇게 지혜롭게 썼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이 지혜롭지 못해서 아직도 짐승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물도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인간까지 됐으니 인간 자체가 모두 부처님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마음 한번 돌리면 부처입니다. 그 부처의 마음을 내가 갖추어 가지고 있고 청정함도 나한테 있고 걸리지 않는 것도 나한테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된다면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나 그 도리를 몰라서 바깥으로 끄달리고 윤회에 끄달리고 업보에 끄달리고,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는 그런 팔자 운명에 끄달리고, 부적을 써 붙여야 잘된다는 것에 끄달리고 ‘내가 그냥 이사를 가면 사단이 나지. 무슨 일이나 생기면 어쩌나.’ 하는 데 끄달리고, 무꾸리를 해서 좋다고 그러면 좋은 줄 알고 언짢다고 하면 언짢은 줄 알고 남의 말에 끄달린다면 중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간 된 도리로서 다 갖추어 가지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그렇게 약하고, 고차원적인 인간으로서 행을 못하시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여러분한테 “한생각의 도리를 알면 부처인 것이다. 그런데 그 도리를 모르면 인과응보에 끄달리면서 일체 모든 것이, 발 하나 떼어 놓는 대로 고(苦)니라. 네가 고덩어리니라.” 그러셨죠. 그래서 여러분한테 한 말씀 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한 말씀 올리고 여러분이 또 질문도 하시고 이러세요. 오래간만에 만났고 하니 오늘 툭 털어놓고 우리 서로 질문하고 이래 봅시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도 ‘고덩어리에 집착을 하지 않는다면 멸해 버리느니라. 그러면 도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주 간편하게 아세요. 그걸 그냥 어렵게 생각을 하신다면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니 내가 난 게 고덩어리니라. 왜 고가 됐느냐. 내가 나기 이전의 수없는, 물질에 끄달리면서 살아 내려온 그 습이 뭉쳐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에 살면서 지은 인(因)으로 인해서, 즉 말하자면 형제의 인, 부모의 인, 자식의 인…. 착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그 인에 의해서 과(果)가 되고 인과가 돼 가지고 여러분이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태어난 겁니다. 부모도 바로 인연에 따라서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인과가 뭉쳐서 고가 된 겁니다.

그러면 고가 어디 붙어 있느냐. 바로 여러분 속에 지금 운행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속에서 천차만별로 요렇게도 생기고 길쭉하게도 생기고 모습이 죄 다르게 지금 살고 있습니다. 지금 외부에서 사는 짐승들도 천차만별로 다른 모습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인간도 천차만별이고 짐승도 천차만별이고 사생이 다, 알로 낳는 거든지 태로 낳는 거든지 습한 데서 낳는 거든지 화해서 낳는 거든지 다 천차만별로 색깔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마음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고 이렇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내 몸 안에 지금 수십억 마리가 돌고 있는데 그게 인과로 뭉쳐진 겁니다. 그래서 몸뚱이는 어머니 아버지의 그림을 그려 가지고 나왔지만 그 속은 내가 과거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던 그 인으로 인해서, 업보로 인해서, 살던 습으로 인해서 온 인과가 뭉쳐서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악한 마음도 나오고 선한 마음도 나오고 증오하는 마음도 나오고 별 마음이 다 나오는데 그 마음에 의해서, 사업을 하는 데도 잘못되는 수가 있고 잘되는 수가 있고, 장사를 하는 데도 잘되는 수가 있고 잘못되는 수가 있는 겁니다. 그건 누가 갖다 주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행에 따라서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겨 놓고 하신다면 행과 마음과 말과 뜻이 바로 합류화돼 가지고 스스로 속이 상하질 않고 편안하기 때문에 말도 편안하게 나와서 남도 편안하게 해 줘요. 그러면 빚진 사람이 갚지 않다가도 자기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면서 ‘아, 저 사람에게 빨리 갚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빨리 갚게 되는 거고 빨리 받게 되는 거죠. 장사도 그렇습니다. 회사도 그렇습니다. 모두를 거느리는 회사의 사장이나 이런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써야만이, 또 말을 어떻게 해 줘야만이, 행을 어떻게 해야만이 직원이 자기 뼈를 깎아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는가? ‘내 사장을 살려야지. 이 회사를 위해서 저분은 참 애쓰셨는데….’ 이렇게, ‘저분은….’ 하는 이러한 마음이 스스로 생기게 해야지 강요해서 되는 건 아닙니다. 말을 하다 보니까 지금 삐뚜로 나갔습니다. 허허허….

그런데 삐뚜로 나간 게 아니라 그것도 생활선으로 통하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은 행하는 것을 가르치셨고 또 마음과 행으로써, 즉 말하자면 실천궁행을 하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에 빠지거나 유(有)의 생활에 빠진다면 이건 저울이 맞질 않는 거죠. 양면이 다 맞아서 우리가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부처님 법이 돼야 되겠죠. 동떨어져서는 되는 게 아닙니다.

아까 ‘몸뚱이의 고’라고 했는데, 그래서 고집멸도 사제법은 “집착을 하지 마라. 집착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놓게 된다. 그냥 용광로에 놓는 작업만 하라. 그러면 스스로 바로 재생이 돼서 나간다. 그것이 집착을 하지 않고 놓는 것이다. 그러면 멸한다. 멸하면 도니라.” 이겁니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그리고 또 이것을 얘기해 드리죠. 내가 지금 몸에 들어 있는 그 인과응보에 의한 의식 자체를, 수십억 마리를 끌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부처라기보다는 여러분의 지배인이라고 생각합시다. 지배인이 모든 부하를 인솔하는데 마음을 잘 써 주면, 둘이 아니게 써 준다면 그 수십억 마리가 모두 한마음으로 따라 줍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간장 공장, 위 공장, 이 공장 저 공장, 이렇게 여러 군데에 공장이 있어도 마음은 체가 없으니 지배인의 한마음이라면, 내가 지금 살면서 한마음을 잘 쓴다면 이 속에 있는 그 수십억 마리가 한마음으로 뭉쳐 줍니다. 그래서 묘법인 것입니다. 이거는 현실입니다. 이런 공부를 해서 미래에 천당에 간다, 승천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 자체입니다. 그래서 과거도 따로 없고 미래도 따로 없고 현실 일도 찰나 생활이기 때문에 ‘무(無)’다 이런 겁니다. ‘공했다’ 이런 거 말입니다.

여러분한테 어떻게 하면 알기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 하고 무척 고민하면서 여러분을 대하는 겁니다. 책을 보고 이론으로써, 학식으로써, 지식으로써 여러분한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걸 연구해서 체험하고 실질적으로 내가 행해 본 그 자체를 얘기하는 겁니다. 악업과 선업이 한데 뭉쳐 있는데 악업도 여러분의 법이 아니요, 선업도 여러분의 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법인가? 여러분이 마음 쓰고 행하는 것이 그대로 법인 겁니다.

왜 자기를 자기가 못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용광로에 넣듯이 작업을 그렇게 하라고 하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안 되는 것도 찰나, 되는 것도 찰나라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죠.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가고 오는 것 모두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만남도 그렇고 모두가 말입니다. 그러니 공했단 얘기죠. 그것을 현실로써 널리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나와 상대, 이 모두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지구 안에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으로 뭉쳐서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볼 기회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지혜가 생기죠.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 몸이 집 안에 있다고 해서 안 보인다든가 이런 게 아닙니다. 가깝고 멀고가 없습니다. 저 우주 전체를 한 찰나에 탐험할 수도 있는 심안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느냐. 내가 용광로에 넣듯이 과거의 업을, 얽히고설킨 인과를, 악업 선업 지은 거를 다 오는 대로 놓아야 합니다. 지금 현실입니다. 전자에 한 것이 현실에 나타나서 여러분이 지금 현실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악업을 지었으면 악업, 선업을 지었으면 선업이 번갈아 가면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겁니다. 안에서 솟아나오고 바깥에서 들어오고 이러는 거죠.

여러분이 이 도리를 배우지 않는다면, 기복으로만 자꾸 나간다면 공덕도 없거니와 이익도 없고 또 세세생생에 나를 건질 수 없기 때문에 일체를 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말씀드린 악업 선업을 다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가정에서 살림을 하거나 사회에 나가서 일하고 그럴 때, 용도에 따라서 내 앞에 큰 문제가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고 외로움이 생기고 또 ‘아, 살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도 모두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게 인과로 인해서 나오는 겁니다. 자기는 의식만 없으면 송장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니고 이 속에서 수십억 마리가 돌아가면서 그렇게 선업 악업 지은 데서 자꾸 발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대뇌를 통해서 바로 소뇌를 통하고 이렇게 해서 중추 또는 척수 이런 데로, 양쪽에 마이크 세워 놓았듯이 세워 놓은 데서, 척수 자체에서 중추를 끼고 도는 그런, 가장자리 양쪽에 붙은 것이 바로 전체를 통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일이 말로 할 게 아니라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놓아야 합니다. 잘돼서 좋은 생각이 들어가면 ‘아유, 참 감사하구나!’ 이러는 게 그냥 놓는 겁니다. ‘내 주인공, 참 감사하구나!’ 하는 게 놓는 겁니다. 또 안됐으면 ‘아! 내 주인공밖에 해결할 수 없구나.’ 이게 놓는 겁니다, 또. 그런데 뭐가 어렵습니까? 왜 놓을 수가 없다고 합니까? 여러분이 지금 놓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마음으로 자꾸 창살 없는 감옥에다 자기를 넣고 옹쳐매니까 나는 되풀이하는 겁니다. 마음이 체가 없어서 우주 전체를 탐험할 수 있다고 해도 믿지 않는 겁니다. 또 “당신 마음으로 옹쳐매고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둬 놓는 게 고(苦)고 그게 바로 지옥이다.” 이래도 믿지 않는 겁니다. 왜들 그렇게 믿지 못합니까? 자기를 자기가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습니까? 이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어요. 혼자 왔다 혼자 가요. 내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죠? 다섯 가지는 대신 못해 준다고요. 똥 누는 거, 먹는 거, 자는 거, 죽는 거, 아픈 거 이런 거는 대신 못해 줘요.

여러분한테 자꾸 되풀이해서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의 그릇이 요만하다면 나도 요만큼밖에 얘기 못해요. 여러분 마음이 드럼통만 하다면 드럼통에 담길 말을 하게 되죠. 바다 같다면 더 말할 거 없이 함이 없이 서로 대화할 수 있고 또 가고 옴이 없이 “허허, 물이 없는데 배가 어디 있을꼬? 배가 없는데 탈 게 어디 있으며 건너갈 곳이 없는데 건너갈 게 어디 있나, 내가 공했는데.” 아, 이런 말들로 쭉 법문이 돌아가죠? 그런데 수차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가정에서 마음 한 번 잘못 쓰고 행 한 번 잘못해 가지고 백 번을 고생을 하고 백 마디를 해야 하고, 이렇게 화목하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착을 둘 걸 둬야지 이 몸뚱이도 내 집이란 말입니다. 내 집에도 착을 두지 말라고 그랬어요. “저런 것에 착을 두지 마라. 내 집까지도 착을 두지 마라.” 왜? 평생 살다가 내 집을 떠날 때 어떻게 이걸 두고 떠나느냐 이거죠. 착을 두면 이 집을 떠나지 못해서 3년이고 4년이고 콩깍지 안 떨어져서 억지로 떼듯이 그렇게 아픔을 당한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착을 두지 않는다면 내일 가든지 모레 가든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갈 거 아닙니까? 콩이 다 익었으면 훌떡 까지듯이 건드리기만 해도 까지죠. 그런데 다른 데 착을 둔다면 평생 살던 이 몸뚱이의 착은 어찌 떼시렵니까?

그러니 여러분의 생활이 생활선이며 그냥 행선입니다. 화두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몸뚱이를 화두로 생각하십시오. 화두는 따로 없는 것입니다. 남한테서 받는 것이 화두가 아니라 나에게서 그냥 저절로 생겨요. 이 몸뚱이가 난 것이 태초요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 집도 되고 화두도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인과응보, 악업 선업이 한데 뭉쳐서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고덩어리다 했으니 여러분이 그 고덩어리를 녹여서 벗어나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부부지간에 살든지 자식과 부모와 형제들과 살든지 또는 회사의 직원으로 살든지 사장으로 살든지, 선생님으로 살든지 학생으로 살든지 어떻게 살든지 막론하고 각자 여러분의 탓이지 남의 탓이 아닙니다. 모든 잘못을 남한테 전가를 하고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그놈이 잘못해 가지고 집안이 그냥 어수선하고 이렇게 되었다.” 그러거든요. 자식이 학교에서 잘못해서 부모가 성가시면 “아이구! 저놈의 자식으로 인해서 그렇다.” 이러거든요. 자식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일체가 다 남으로 인해서 잘못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저 상점에 가 보십시오. 깡통은 깡통전에 깡통끼리 모여 있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자기가 지은 대로 차원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자식도 인연이 바로 그런 것이고 부부지간도 인연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깡통끼리 만나니까 그렇게 얼그렁덜그렁 하죠? 소리가 납니다. ‘넝마는 넝마전에 모여 있고’ 하는 그 차원이라면 그것끼리 또 모입니다. 그러니 서로 고생을 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증오하고 서로 그냥 욕하고 때리고 온통 “이년 저년, 이놈 저놈, 이놈의 새끼 저놈의 새끼” 하고 온통 야단입니다. 왜 그런가. 그게 아수라장이거든요.

이거 보세요. 세상에 이 몸뚱이로 태어나 가지고 철모를 때 빼고 잘 때 빼고 늙었을 때 빼면 몇 푼어치나 산다고 그렇게 얼그렁덜그렁 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즐겁고 패기 있고 자유스럽게, 좋으면 껄껄 웃어도 보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조그만 거 가지고 보잘것없는 것 가지고도 싸우거든요. 참 이상해요. 내가 가만히 보면요, 조그맣고 아무것도 아닌데 오만상을 찌푸리고 말입니다. 그걸 보면 그냥 난 우스워 죽겠어요. 정말입니다. 어떤 때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요, 어떤 때는 그냥 웃음이 납니다.

오늘도 차 타고 오는데 차마다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요. 그게 바로 부처님의 소리가 그렇게 퍼져 나오지 않느냐, 울려 나오지 않느냐 이거예요. 부처님의 소리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부처님의 도량이 아닌 데가 하나도 없고 도인 없는 데가 하나도 없고요. 오면서 보니까 네 살 먹은 애가 차에 치여 죽지 않으려고 빨리 뛰어가더라고요. 고것도 도인이더라고요, 하하하…. 여러분! 글쎄, 생각해 보세요. 개도 불성이 있는 겁니다. 없다고 해도 있는 거고 있다고 해도 없는 거고 사람에 따라, 차원에 따라 그거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겠죠. 왜 그러냐. 여러분이 부처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개도 차가 오는가 안 오는가 이리저리 둘러보고선 차가 오니까 딱 서는 거예요. 그러곤 차가 딱 지나가니까 쏜살같이 건너가요. 그렇게 하고 있으니 개도 도인이 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처가 아니라고요?

그러니 부처 노릇을 하시려면 오늘부터라도 그 하치않은 거 가지고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성내지 말고 좋게 사세요. 부부지간에 살면서도 “여보! 당신 오늘 얼마나 노고가 많았소.” 하면서 웃고 들어오면 그냥 미안하고 그래서 “여보 당신! 참 얼마나 일하시느라고 애썼소.” 하고 이렇게 말이 좋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당신, 하루 종일 뭐 했어?” 이러고 들어오면 “아니?” 이렇게 나오지요. “아니, 뭐?” 이렇게, 하하하…. 그러니까 우리가 조그마한 거 가지고 실랑이하다 보면 이렇게 좋은 법을 못 배워요. 그리고 자유스럽게 못 살아요. 자유스럽게 살아야, 먹을 것에도 착을 두지 않아야 들어와요. 돈도 착을 두고 가지려고 애를 쓰면 자꾸 달아나가요. 병고도 탁 놓고 ‘네가 업보로 인해서, 인과응보로 인해서 모두 뭉치게 한 거니까,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너 알아서 해라.’ 아, 이러고 탁 놓으니까 이게 심심하거든요. 그러니까 ‘아이구! 난 내 그릇이나 가지고 가야 되겠다.’ 그러고 달아나가거든요.

그전에 이런 얘기 한 예가 있었죠. 어떤 사람이 감기를 앓았는데 너무 오래 앓았어요. 인제 죽을병이 되어서 의사들도 다 괴질이라나 그러면서 고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외아들인데 그냥 하도 병이 안 떨어지고 애를 쓰니까 스님이 오시자 여쭤 봤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이 스님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당신네 나무 패는 모탕 있죠? 도끼하고.” 그거 가져오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갖다 놓으니까 도끼를 들고 그놈 좀 이리로 내오라고 그러거든요. 허허허.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얼마나 놀랐겠소? 아, 그놈 내오라고 그러니. “어서 나오너라. 스님이 나오라고 하신다.” 해서 나오니까 그놈 모가지를 그냥 모탕에다 턱 놓고 “이놈, 감히 어디라고 네가 부처님 앞에 붙어서 이러느냐!” 이러면서 그 모탕에다가 목을 올려놓고 그냥 치려고 그러는 거예요. 아, 이게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말입니다, 자기가 여기 와서 그걸로 인해서 얻어먹고 살려고 했는데 뚝배기가 깨지겠거든요. 그래서 그냥 뚝배기를 들고 얼른 도망을 갔습니다. 그 아들한테 뚝배기를 씌워 놨거든요. 뚝배기를 씌워 놔야 병을 앓아서 내가 얻어먹거든요. 그래 뚝배기를 벗겨 가지고 얼른 도망을 가니까 그 병이 바로 낫더라는 거지요.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좀 내버리세요. 네? 죽고 사는 게 뭐가 그렇게 원통합니까? ‘내일 죽은들 어떻고 모레 죽은들 어떠리. 좀 더 살면 어떻고 덜 살면 어떠리.’ 아, 이렇게 좀 하면 어때요? 뭐가 그렇게 그렇다고…. 그렇게 내버리고 산다면 그냥 좋은 밥에 좋은 옷에 화목한 가정에, 참스러운 마음에서 이리로 가도 좋고 저리로 가도 좋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덩실덩실 춤을 춰도 다 못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여러분이 “저 중 미쳤어.” 이럴까 봐 춤을 못 추지, 허허허…. 아니, 모르는 사람들은 “저 중 미쳤어.” 그럴 거예요. 춤 좀 추고 좀 웃기나 하면 “갓 미쳤어.” 그러고, 껄껄껄껄 웃으면서 아주 그냥 옷도 다 벗고 이러면 “아주 정말 미쳤군.” 이럴 거예요.

그런데 이 공부 하는 데 미쳤다는 소리 한마디 듣지 않고는 공부 못합니다. 넘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진심으로 자기한테 자기가 미쳐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물론 길잡이한테는 지혜를 구하고자 따르는 거고, 자기를 발견하려면 자기를 믿어야만 됩니다. 만날 여러분이 기복으로 끄달리고 귀신 짓을 하기 때문에 귀신이 되는 거지 여러분이 귀신 짓을 하지 않는데 어찌 귀신이 있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이 진짜로 아주 중심에다 활을 꽂을 수 있다면 진짜로 아니 되는 게 없는 겁니다. 아니 되는 거 없죠. 여러분, 인제 질문 좀 안 하시렵니까?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89년 10월 1일 부산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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