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 고타르 그라우브너

그라우브너의 작품 〈Hommage a Tintoretto(1982)〉은 ‘틴토레토에 존경’으로 번역된다.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를 존경하는 마음을 단순하게 색채만을 이용해 표현했다.
거대한 자연은 시간의 흐름을 색으로 보여준다. 자연을 산책하며 마주하게 되는 각각의 색들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무심히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하여 색을 발산하는 자연의 모든 생물들은 색을 통하여 생존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친화적 삶서 禪을 만나
호흡하며 느낀 감정들 표현
中道·不二사상, 작품에 담아
개인주의적 모순들 비판키도


고타르 그라우브너(Gotthard Graubner, 1930~2013, 독일)는 자연을 산책하며 많은 색들과 친숙하게 된다. 자연 속에 나타나는 색들은 자신의 존재방식에 따라서 다양한 색으로 나타난다. 색은 곧 생존이며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모든 가치들이 혼란을 겪는 시기에 젊은 그라우브너는 자연을 가까이하며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찾아가게 된다. 자신의 삶의 공간과 자연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예술의 의미에 대하여 고뇌하기 시작하며 색에 대한 많은 관심과 연구를 하게 된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며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에서 벗어나서 그는 자연의 변화를 관조하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현대미술의 커다란 변혁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독립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며 스스로의 예술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전통적인 철학, 종교, 예술 등의 가치들이 무너지고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개념을 찾아가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라우브너에게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선사상이었다. 처음 접하는 선사상은 그에게 많은 번뇌를 가져다 줬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과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하게 된다. 정신과 신체는 공유돼야하며 신체의 행위를 통하여 정신의 깊이와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

정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공간이다. 일상의 공간속에서 정신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공간속에 존재하는 표현된 색과 입체적 공간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간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품은 입체적 관계성과 그 색에 의하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색을 칠하게 되는 캔버스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의 색에는 따뜻함, 차가운, 밝음과 어두움 등이 공존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정신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호흡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호흡이다. 그가 선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호흡이다. 그의 작품에는 호흡이 표현되어 있다. 자신이 호흡을 하며 느끼는 파장과 긴장감, 평온함, 고요함, 적막함 등을 화면에 그대로 표현한다.

또한 자신의 호흡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색을 칠하기 전에 캔버스에 스폰지나, 솜 등을 넣어 부드러우면서 입체감이 느껴질 정도로 두툼하게 만든다. 화면의 상태가 최대한 부드러운 상태가 되면 그 위에 자신이 호흡을 하며 느낀 감정이나 특성을 색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작품 〈Hommage a Tintoretto(1982)〉는 ‘틴토레토에 존경’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틴토레토는 이탈리아 화가(1519~1594)이다. 그는 종종 과거의 위대한 화가들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그들을 위한 존경의 마음을 작품제목으로 명명하여 그 뜻을 이어 받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색과 입체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때에 제작되었던 작품이다. 캔버스에 솜과 같은 부드러운 소재를 넣은 입체적 화면에 빨강 계열의 색을 칠하여 밝은 느낌과 함께 따뜻함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예술가를 존경하는 마음을 그는 이처럼 단순하게 색채만을 이용하여 시간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 변화하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가치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라우브너는 이처럼 시간이 흐른 시간성에 공간성을 도입하여 자신만의 존재 가치들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드러움은 깊은 호흡을 통하여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나온다. 평온하다는 것은 강한 것도 아니고 약한 것도 아니며 또한 어두운 것도 아니고 밝은 것도 아니다. 즉, 어느 하나의 관점에 치우친 것이 아닌 중도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성들이 바로 중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색채의 사용에서 극단적인 화려함이나 강함을 드러내지 않고 색을 계속해서 겹칠하면서 본래의 강함을 중화시키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때에 중요한 것이 호흡이다. 자신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화면에 나타나는 것도 거칠게 느껴진다. 이러한 원리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작품을 하기 전에 자신의 호흡부터 조절한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작가의 의도와 특성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필자가 이 작품을 독일 쾰른에 있는 현대미술관(Museum Ludwig)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평면회화 작품인데 공간성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회화작품들이 그 두께가 5~8cm인데 이 작품의 두께는 20cm정도였다. 작품을 보는 관점 즉, 앞면과 측면에서 보았을 때의 느낌에서 많은 차이가 느껴졌다.

앞면에서는 색의 특성들이 강하게 느껴졌다면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 입체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또한 강한 색채 임에도 거칠거나 강한 느낌이 아니라 부드러운 솜사탕에 색을 입혀놓은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던 기억이 새삼 생각이 난다.

작품 〈Farbraumkoerper-Diptychon(1977)〉은 ‘둘이 하나인 작품’으로 번역된다. 이는 불이(不二)사상을 작가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Farbraumkoerper-Diptychon(1977)〉은 ‘둘이 하나인 작품’으로 번역할 수 있다. 두 개의 같은 크기의 화면에 약간의 색의 차이를 두고 일정한 간격으로 작품을 설치하였을 때 느껴지는 동일성과 차이성을 보여주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는 불이(不二)사상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분법적, 논리적, 합리적 사고가 지배적인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관점에서 살아온 그에게 불이사상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식은 그에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성역이었다. 자연의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사색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이 불이사상은 자신의 관념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인식의 범주 속에서 그가 택한 것은 둘이 하나가 되는 방식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자신의 작품에 이러한 생각들을 접목하기 위하여 그는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작품들을 제작하게 되는 것이다. 둘이 비슷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하지만 둘이라고 구분하기에는 모호함이 있다. 그가 이해한 불이사상의 관점이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유럽인들에게는 이해불가 한 인식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슷한 논쟁을 필자가 독일 작가인 우도 클라센(Udo Claassen)과 한 것이 생각이 난다. ‘음과 양이 둘’이라고 주장하는 우도에게 나는 “원래는 음과 양이 하나이다. 그것이 나누어져서 둘로 표현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1유로 동전을 꺼내 보여주며 “앞면과 뒷면의 모습이 다른데 왜 2유로라고 하지 않고 1유로라고 하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더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분법적 논리가 지배적인 인식의 틀에서 불이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관객들에게 그라우브너는 이 작품을 통하여 비논리적 사고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 비논리적이라고 구분하는 것 자체가 관념적 사고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떠한 것도 관념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라우브너의 작품도 처음에는 이러한 인식의 범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에 의하여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인식의 변화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모든 것은 변화하며 변화하는 것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그는 관조를 통하여 이미 간파한 것으로 보여 진다.

화면에 보여지는 단순한 색을 통하여 자연 속에 드러나는 변화의 이치를 드러내고자 하였던 그의 노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질서를 만들어 갔다. 선의 정신성을 그는 단순성, 공간성, 동일성 등으로 설정하고 이러한 개념들을 화면 속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다.

아방가르드와 표현주의적 표현들이 범람하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본래적 존재가치를 찾아가는 수행자적 길을 선택한 그라우브너의 예술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인식의 범주를 새롭게 확장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즉, 불이사상을 통하여 타자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적 모순에 인간의 본성을 통한 동질성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시대적 흐름을 통찰하여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는 수행자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명예, 권력, 부 등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가의 가치가 높아지면 많은 명예와 부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예술가의 길을 가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왜 예술가의 길을 가는가? 왜 수행자의 길을 가는가?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닐까?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