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입력된 모든 것이 바로 현재 이 속에 다 있다

여러분이 남의 흉 볼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남을 원망할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나 가기도 바쁜데, 지금 얼마나 남았습니까?

인생을 결정짓는 장본인
질문 스님께서는 ‘내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이 내 탓이니, 모든 것을 내 안의 근본에 맡기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모든 인생의 실마리가 다 내재되어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제 인생을 결정짓는 그 장본인이자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 나올 때에 내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아야 공부하기가 쉽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공부라기보다도 인생관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지수화풍을 근원으로 해서, 또는 우리 미생물로 하여금, 그 인연에 따라서, 인과로 인해서 정자와 난자의 뜻을 받아서 살과 몸과 피와 뼈를 빌려서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거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런 고통 속에서, 고통이라고 하기보다 인간 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면 인간이 돼 가지고도 고통스럽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 왜 그렇게 각본대로 나오는가? 인간은 왜 돈 가지고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가? 왜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왜 마음대로 되질 않는가?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했던 말 되한다고 섭섭하게 생각할는진 모르지만 진리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인연에 따라서, 인과로 인해서 몸을 받았다면 엄마 아빠라는 인연도 여러분 차원에 따라, 여러분과 똑같은 차원으로 인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몸속에 든 중생들도 수십억 마리가 여러분의 인연에 따라서, 인과로 인해서 여러분 몸속에 작은 별들처럼 회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작은 생명들이 회전을 해 주기 때문에 이 몸뚱이가 움죽거리는가 하면, 회전을 하는 그 생명들이 있기 때문에 이 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집이 누구의 집이냐. 바로 그 생명들의 집이죠. 그런데 그 생명들이 한데 모여서 마음을 내고, 마음을 내기 이전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내며 회전을 하는 삼합이 바로 공(空)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그 마음들이 천차만별로 여러분의 머리를 때리고 나옵니다.

그전에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팔만 사천 번뇌가 들락거린다.”라고요. 여러분이 한 생각을 제대로 못하면 악의 인연으로 하여금 바로 팔만 사천 번뇌가 털구멍을 통해서 들락거리고, 여러분의 한 생각이 그 지혜로운 마음으로 이루어져 자유스럽고 여여하다면 바로 그 털구멍을 통해서 팔만 사천의 부처가 들락날락한단 말입니다. 여러분의 그 마음이 얼마나 귀중한지 또 자유스러운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몸뚱이 속에 어째서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모여서 회전을 하고 있는지…. 또는 역력하게 우리 마음으로부터 머리로, 두뇌로부터 사대(四大)로 각각 알려 주는 통신! 그 통신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마음 내는 게 있고 감각, 촉각, 시각 이런 여러 가지가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다 알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우리는 다 같이 미생물에서부터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돼서 이렇게 인간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쫓고 쫓기고, 부모를 잃고 울고, 자식을 잃고 울고, 서로 울며불며 다지고 쫓기며 인간까지 됐으니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그런데 수억겁의 생을 거쳐 오면서 살아나오던 습의 인과가 바로 여러분의 몸뚱이 속에 인연을 따라서 모두 들어 있으니 고(苦)가 있다고 ‘나는 피해야겠다.’ 이럴 생각은 아예 마세요. 왜? 그런 사람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그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어디로 피해서 갑니까? 여러분이 가는 데마다 인연에 따라서, 만약에 악조건의 인연이라면 그 악의 무리의 생각이 떠올라서 그대로 악조건으로 길을 갈 것이고, 선의 조건이 삼분의 이가 된다면 바로 선의 조건으로 여러분의 두뇌를 통해서 갈 것입니다.

그러니 천차만별 인연의 소치가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살아나가는 데에 각본대로 솔솔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각본대로 짊어지고 나온 이 몸뚱이가 인연의 소치라면 어떻게 해야만이 그것을 벗어날 수가 있는가.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수많은 인연의 소치는 자동적인 컴퓨터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생각하고 행한 그 자체가 각본대로 바로 자동적인 컴퓨터에 감겨서 현실에 자꾸자꾸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행동하고 가는 것은 미래에 나올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데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고, 미래도 오지 않았으니 없고, 현실도 공해서 없다.” 이렇게 항상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몸속에 수없는 자연인으로서 갖가지로 저지른 그 인연의 소치가 지금 생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그 마음들이 바로 여러분이 마음 쓴 대로 인연에 따라서 나한테 온 것이니까 그 마음밖에 더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것을 다 녹여라. 거기에 끄달리지 말아라.” 이러는 겁니다. 여러분이 거기에 끄달린다면 그 인과 속에서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몸뚱이 속에 다 가지각색으로, 각본대로, 자기 한 대로, 저지른 대로, 그 의식대로 감추어진 것이 그대로 그냥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바른쪽 발은 이만하고 (양 팔을 벌려 보이시며) 왼발은 요만하다면 어떻게 걸음을 걷고 다니시렵니까? 우리가 똑같으니까 이렇게 걸어 다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한쪽 다리는 길고 한쪽 다리는 아주 짧은 그런 형국이요, 눈도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긴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귀도 한쪽 귀만 있지 다른 한쪽 귀는 없으니 여러분이 얼마나 살기가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것은, 선과 악이 모조리 내 몸 안에 들어 있어서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나온 데다가 되놓으면, 맡겨 놓으면 바로 그것은 카세트에 앞서 감긴 것이 다 지워지고 현재에 넣는 것만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연방 고정된 관념이 없고 고정된 행이 없고 생각도 고정된 게 없으니, 생각나는 대로 거기 놓게 되면 담겼다 없어졌다 담겼다 없어졌다 하니 항상 그릇은 비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방편입니다. 모든 게 ‘공했다’고 말을 하지마는 우리는 실지다, 실지가 아니다 이걸 떠나서 우리 사는 자체가 그대로 실지입니다.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려도 이해가 안 가실지 모르겠지만, 이해가 가야만이 기계를 돌려도 그렇고, 맷돌질을 해도 그렇고, 의정을 내도 그렇고 헛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단지를 모시고 있는데
질문 스님, 제가 얼마 전에 고모님 댁에 갔습니다. 처음으로 찾아뵙는 건데 집이 굉장히 초라하고 그랬는데 집 안 귀퉁이에 조그만 단지가 있었습니다. 옆에 쌀도 있고요. 그래서 저게 뭔가 싶어서 고모님한테 여쭈었더니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갖다가 모시고 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저는 섬뜩했는데 알고 보니 그 고모님은 오랫동안 불자로서 부처님을 믿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데 싶어서 고모님한테 말씀을 드렸더니 고모님은 그냥 제 이야기를 흘려듣는 것 같았어요. 이와 같은 경우에 저는 어떻게 고모님을 위해서 마음을 내 드려야 되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답변 이런 예가 있었어요. 어느 집 시어머니가 상자에다 옷을 해서 놓고 항아리를 해 놓고 쌀을 놓고 그렇게 해서 시어머니 대대로 내려오면서 그거를 믿는다 하는 집으로 어떤 색시가 시집을 갔더래요. 그 색시는 이 공부를 하는 색시예요. 그래서 하루는 나한테 와서 그런 말을 하길래, “그러면 모든 걸 주인공에다 맡겨 놔라. 그것은 그냥 물건일 뿐이다. 마음에 맡기면 물건일 뿐이니, 시어머니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거를 치우지 말고, 또 며느리로서 시어머니의 마음에 어깃장을 내고 그러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고 너만 알고 한마음으로 모든 거를 넣어라. 모든 걸 넣게 되면 천도가 되니까 그렇게 해라.” 그랬거든요.

그러고 나선 자기는 알고 있으니까 그냥 어떻게 하다 보면 먼지를 털기 위해서 거기까지도 막 치고 털고 이러니까 시어머니는 껌벅 죽는 거죠. 그거 모셔 놓은 데다가 함부로 그렇게 먼지를 털고 그러느냐고요. 그러니깐 그 며느리가 있다 하는 소리가 “어머님, 이것도 먼지가 앉으면은 아니 되니깐 먼지를 깨끗하게 털어드려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이 상자도 먼지가 있으면 상자가 더럽다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니까 그냥 말도 안 하시고 쓱 삐져서 들어가시더니 그날 저녁에 꿈을 꾸어 가지고는 그 이튿날 “야, 참 이상스러운 꿈을 꿨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꿈을 꾸셨는데요?” 하니까 “아, 그 상자 속에서 글쎄, 전부 그냥 나가더라.” 하하하. “상자 속에서 전부 나가서 구름을 타고 가는데 아이, 그 상자는 그냥 비었지 않던.”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아휴, 정말이십니까?” 그러니까 정말이라고 “아유, 그런 꿈을 꿨는데 정말 저 상자는 비었더라.”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아휴, 그러면 어머님 꿈이 그냥 맞겠네요, 그러니깐 그거는 그냥 태워 버리는 게 좋겠지요.” 하니깐 “그래라. 비었더라.”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 보세요.

예언에 대해서
질문 불교를 공부하지 않은 서양의 유명한 사람이 수백 년 전에 미래에 대해서 예언을 했었는데요, 그것이 80, 90%가 맞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미래가 아예 짜여 있는 것인지 그것이 좀 궁금합니다. 또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다 그러셨는데, 어떻게 미래를 80, 90%까지 미리 맞출 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아이 참 내!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시는데요, 내가 항상 그러죠.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다고요. 그런데 살아오면서 입력된 모든 것이 바로 현재 이 속에 다 들어 있다는 얘깁니다. 다 들어 있어서 거기서 그대로 차곡차곡 입력됐던 게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없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해서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고 예언을 하느냐 이거죠?

그런데 “지금 모든 것이 공(空) 안에서 나오는 것이니 삼세심(三世心)을 일심(一心)으로 뭉쳐서 공 안에다 넣어라.” 이러는 거는 일체 삼세가 다 공했으니까, 그 공 안의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한마음 속에다 모두 놓으라는 겁니다. “한마음” 이러면 거기 벌써 과거·현재·미래가 다 들어갑니다, 이게.

그런데 미래를 예언하는 자는 소인이다 그랬습니다. 왜냐? 그거는 자유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예언이 없습니다. 왜냐? 오늘 이랬다가 내일 저럴 수도 있고, 내일 이랬다가 모레 저럴 수도 있고, 허허허…. 아니, 바꿔 놓기도 하고 뒤집어 놓기도 하는데 어떻게 예언을 합니까? 예를 들어서 고정되게 딱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언을 못 한다는 얘기죠. 예언자는 아예 소인이면서도 도둑이다 이럴 수도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예언자는 소인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컵을 여기에 갖다 놨는데 이거를 “여기 있다” 하고 예언을 한다 해도 잠시 후에 이 컵을 또 들고 가게 됩니다. 그러면 예언한 게 무효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예언자가 정말 있어서 예언을 했다 하더라도 그 예언한 것이 자유자재할 수 있는 부처님께 걸린다면 예언은 무효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언하는 거는 소인의 행동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거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 번 본 것이 그대로 있습니까? 한 번 들은 게 그대로 있습니까? 종소리 나는 거를 들고 올 수가 있습니까? 먹고 갈 수가 있습니까? 귀에다 넣고 올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예언을 못 합니다. 종소리가 금방 났다 금방 멎었다 하는데, 어떻게 종소리가 난다고 예언을 합니까? 그리고 종소리가 안 난다고 할 수도 없고 종소리가 난다고 할 수도 없죠. 그러니까 예언자는 소인이다 하는 겁니다.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양자역학과 한마음과의 상관관계
질문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큰 줄기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상대성 이론과 그의 내실을 밝힌 양자역학을 들 수 있는데, 우리가 예를 들어서 한 물체를 분석해 보더라도 자꾸만 쪼개 나가면 분자, 원자, 나중엔 소립자, 즉 극미립자의 세계까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극미립자의 세계는 입자의 나타남과 없어짐 즉, 생멸의 세계가 아주 무상합니다. 현대의 물리학에서 양자역학의 결론은 그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입자의 나타남과 없어짐의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 장이라고 불리어지는데, 반야심경에서 나온 내용과 같이 공생·공심·공용·공체·공식 하고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한마음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나 그래서 질문드려 봅니다.

답변 네, 그것이 상관이 있고말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물리학이나 과학적으로 그런 입자, 소립자까지…, 지금 살림하는 데도 조그마한 데까지도 우리는 지금 하고 가고 있죠. 그렇듯이 그러한 것이 나타나는 것은 지금 근본적인 지수화풍으로 일체가 다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그런 맨 끄트머리의 소립자까지도 있을 리가 없죠.

그래서 핵이 있으면 바로 전자가 있고 전자가 있으면 전자가 바로 핵이 되고, 핵을 보호하고 있고 이런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러나 물질하고는 정반대로 우리가 그런 거를 연구하려면, 한마디로 말해서 망원경으로 본다 하더라도 어떤 한계를 두고 봅니다. 그러나 심안이라는 것은 어디가 멀다, 수천, 수만억 광년이다 할지라도 내가 요기 보는 거와 같은 겁니다. 이것이 둘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둘이 아니게 보는 거죠. 그러면 그것을 가서 보느냐? 그게 아니죠. 자기의 마음의 그 밝은, 면경과 같은 밝은 마음으로 본다면 앉아서 그 모든 것을, 천체를 볼 수 있고, 반을 볼 수가 있고, 어떤 부분적인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불가에선 천안통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천체망원경이라고 비유를 했습니다.

그러면 심성이 아니고는 절대로 다 볼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이게 그래서 무위심, 즉 말하자면 무심과 유심이 같이 혼합이 돼서 행을 할 수 있는 그 봉을 본다면 과학자들도, 천문학자들도 진짜 그 이름 없는 천문학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보죠. 이름만 천문학이 돼서 되는 게 아니라, 정말이지 천 가지의 그 뜻이 다, 내가 보는 눈이 그대로 문이 돼서 벽도 없고 걸림 없이 내가 볼 수 있다면 연구를 하면서도 자기가 자재할 수 있는 문제죠. 그래서 “보기만 해도 도가 아니니라” 이랬거든요. 본다고만 해서 무슨 이익이 있어야지. 또 듣는다고만 해서도 이익이 없고, 남의 속을 안다고만 해서도 이익이 없고, 또 남이 어디서 어떻게 왔다는 걸 안다고 해도 이익이 없단 말입니다. 그건 왜? 잘 들으세요, 이걸. 그게 왜 이익이 없느냐? 무꾸리를 하러 가니까 “새 달에 너는 죽을 운수다.” 하고 이걸 무꾸리장이가 안다고 합시다. 족집게처럼 안다고 합시다. 그러면 죽을 운수만 알았지, 남의 속만 알았지 그것을 자유스럽게, 죽을 거를 이렇게 갖다 놓고 저렇게 갖다 놓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러한 자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도가 아니라는 얘기죠.

그러니 그 다섯 가지로 인해서, 누진을 통해서 지리학이나 이러한 것도 그냥 자유자재죠. 이 지역이 좋다, 여기가 좋다 이러한 문제도 자유스럽죠. 이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언짢은 것도 아니니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는 그런 문제도 있는 거죠. 그러면 그건 내가 정하는 대로 그냥 법이에요. 힘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오히려 흉내가 되지만, 이 마음의 도리를 길러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그게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경을 만약에 흉내를 낸다면 자기 몸이 해쳐지고, 즉 말하자면 “야호!” 하면 안으로 들듯이 흉내 내는 그 말이 자기한테 그냥 반영이 돼서 자기가 좋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중생의 흉내 내는 그런 모순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그러한 것을 진짜로 아시려면 잘 공부하세요. 젊은이니까 앞으로 창창하지 않소? 그러니 잘 공부를 하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아는 것도 참, 모두를 알아도 그것을 누가 안다고 하지 않고, 말없이 그대로 길을 지나가다가도 건질 수 있고, 길을 가다가도 오다가도 건질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은.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무 한 동 가지고 은혜를 갚을 수 있겠냐?” 하는 그 소리를 듣고 그분이 ‘아이고! 알았다.’ 하고서 그때 나무를 동댕이치고선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은사 스님한테 절을 삼배를 올리고 “감사합니다.” 했거든. 그래서 “뭐가 감사하냐?” 하니까 그냥 가만히 합장을 하고 싱긋이 웃고 앉아 있거든요. “아하! 그러면 부처님의 골수를 얻어서 너는 오늘 그 집의 물 한 그릇의 그 이치를 알겠구나!” 하고선 비켜나셨대요. 그래서 그분은 그렇게 어려운 집을 그 해에 마름을 받게 하고 자연히 보리쌀 뜨물을 안 먹고 쌀밥을 먹게 하더랍니다. 그러더니 그 동네 일판에서 둘째 가라면 섧게 먹고살기가 훌륭하게 됐더랍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해마다 공양을 잘 올리고 그 집의 자손들이 불가에 또 인연을 맺고 그래서 크게 부처님의 뜻을 이루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듯이 여러분이 남의 흉 볼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남을 원망할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나 가기도 바쁜데, 지금 얼마나 남았습니까? 가을이 돌아 닥치면 어떡합니까? 그러니 내 마음에 봄이 오도록 해야겠습니다.

옛날에도 이런 말이 있었죠. 요거 한마디만 하고 끝내죠. 어떤 스님이 아주 영하다고, 정말 제일이라고 하는 스님이 계셨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마적, 도둑이 많았죠. 그러한 산도둑이 떼로 몰려서 얘기를 했습니다. “저 스님이 그렇게 유명하다니 내가 한번 만나 보리라.” 그래서 칼을 들고서 그 스님이 오시는 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이 오시니까 하는 소립니다. 자기 속말로 ‘흥, 저렇게 묘하다는 스님이 내가 여기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모르고 그냥 와, 저렇게.’ 하고 아주 방탕한 웃음을 웃었죠.

그런데 스님이 오시니까 도둑은 거기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유명해 봤던들 당신 가슴에는 뭐, 철판을 깔았기에 칼이 안 들어가겠느냐? 당신이 아무리 유명하다 할지라도 이 칼은 사정없이 당신의 가슴을 찌를 수 있고, 가슴을 찔러서 뭐가 그렇게 유명한 게 있나 한번 째 보고 싶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그 스님이 있다 하는 소리예요. 껄껄 웃으면서 “추운 겨울에 고목을 자른들 꽃이 나오겠나? 봄이 오면 스스로 이 고목에서도 꽃이 피고 스스로 열매가 열릴 것을 말이야. 그러니 그 뜻을 알게.” 하시더랍니다. 그래도 수십 년을 마적으로 다녔으니 경험도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만 그 소릴 듣고 칼을 뚝 떨어뜨리면서 거기서 그냥 삼배를 올리고 그 도둑들, 꼬마 도둑들도 다 그 스님의 제자가 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물론 나한도 다 그렇게 해서 제자가 된 그런 이치도 있지만 이러한 일로 인해서 제자가 된 분들도 여러 분이 그 당시에 있었다 합니다.

내 마음의 봄은 항상 봄이지 사계절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속에 봄이 와서 물이 흐르고 그 물맛이 좋고, 열매가 열려서 수많은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열매를 무르익히신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 만 가지 열매의 만 가지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의 마음 가짐가짐을 가지시고 봄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