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묘소 있는
부산 선암사 인근 선산
이제는 아파트 촌으로
가족의 부산시대 막내려

젊은 아버지는 추석 성묘에 나서셨다. 아버지께는 형님이 두 분 계셨지만 큰 형님은 일찍 타계하시고 둘째 형님은 고향인 삼천포에 계셨다. 그래서 부산의 친척 가운데는 아버지가 가장 어른이셨다.

할아버지 차례는 셋째 아들인 아버지가 모셨다. 우리 집에 숙부와 장손인 사촌형이 와서 차례를 지내고 성묫길에 올랐다. 할아버지의 산소는 당감동 선암사 근처에 있었다. 어린 내게 성묘는 하나의 여행이었다.

차에서 내려 시골길을 한참 걸어갔는데 다리 위에 놓인 철교를 건너야했다. 나는 무서워 철교를 건너지 못했다. 아버지가 나를 업고 철교를 건넜다. 그래도 무서워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살며시 눈을 떠 아래를 내려다보니 침목 사이로 개울물이 까마득히 보였다. 나는 무서워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등은 넓고 편안했다. 그 등에 업혀서라면 철교가 아니라 그 어떤 위험한 곳이라도 안전하게 갈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는 정말 무섭지 않았을까? 아직도 겁이 많은 내가 가끔 해보는 생각이다.

부산은 할아버지께는 외지였다. 운조루 5대 종손의 4남이셨던 할아버지는 처와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구례를 떠나 삼천포로 갔다. 삼천포에서 자란 내 아버지는 10대 때 가출하셨고 큰돈을 모아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고아가 된 조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옮겼다.

내 최초의 기억은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어른들의 울음소리에 잠깨어 보니 큰 방 위쪽에 누가 흰 이불을 쓴 채 누워 계시고 남자 어른들이 엎드려 곡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독실한 불자였다고 한다. 집에 불단을 모셔두고 불공을 드렸고 부산 선암사를 자주 찾으셨다고 한다. 그런 할아버지를 위해 아버지가 선암사 근처의 산지를 사드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부산 지역 자손들의 선산을 조성할 요량이셨다. 산을 산지 몇 년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타계하셨고, 아버지의 소망대로 할아버지는 밤낮으로 선암사 범종 소리를 들으며 영면하실 수 있게 되었다.

성묘가 끝나면 아버지는 선암사를 찾았다. 아버지가 절에 들어서자 웬 스님이 쫓아나와 반기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와 스님은 절간 툇마루에 앉아 긴 이야기를 하셨다. 그동안에 나는 숙부와 사촌형에 끌려 선암사 앞 개울에서 가재를 잡았다. 깨끗한 개울물에 아른아른 비치는 투명한 가재를 잡는 것이었다. 참으로 청정했던 시절이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시간과 함께 사라져갔다. 아버지는 쉰 여섯 살 때 뇌일혈로 쓰러지신 후 건강을 잃으셨는데, 사촌형수가 형님과 이혼하면서 산을 팔아버렸다. 그때 서울서 나와 함께 살던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부실하신 몸으로 산을 찾겠다고 동분서주 다니셨으나 헛일이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몇 년 전에 할아버지 산소를 찾았더니 산소 바로 앞까지 아파트가 들어와 있었다. 산소에서 보면 멀리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던 화장터도 아파트 촌으로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골은 진주의 사촌동생이 고성에 가족 묘지를 조성한다며 이장해 아버지에서 비롯된 부산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부산 선암사는 가을이면 생각나는 내 유년의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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