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도 공생체
언론사간 유대는
언론 후발주자로서
필수 불가결 요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늘 억울하다. 항상 달에 치이는 것 같아서다. 모든 진리는 달에 있다고 말할 양으로 행인1 혹은 포졸2로 손가락을 조연시킬 뿐이다. 그 억울함을 해소시켜 줘 보자. 손가락 없이는 아예 달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가리키는 손가락의 모양새에 따라 눈길의 빈도나 심도가 바뀌기도 할 것이다. 도무지 달을 곰곰이 쳐다보지 않고선 안 될 것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손가락질도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사정을 다 감안하자면 달과 손가락은 주종 관계가 아닌 운명적 공생체로 파악해야 마땅하다(指月不分).

, 손가락 비유는 미디어 판에서도 통용된다. 미디어를 단지 수단으로만 사고하는 이들이 있다. 텔레비전이든 신문이든 정보와 오락을 내놓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유하는 측이다. 이들이야말로 미디어를 손가락 신세로 만든다. 같은 정보나 오락이라 할지라도 실리는 미디어에 따라 그 효능은 달라진다. 종이 만화도 재밌지만 웹툰이 더 재밌는 이유는 손으로 밀어 올리며 느끼는 스마트 폰과의 촉감 쾌락 탓이다. 정보 전달에서 신문보다 페이스북이 수월성을 갖는 것은 댓글을 달 공간을 지녔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달의 동반자이듯 미디어 또한 정보, 오락의 공생체다.

손가락과 달을 분리시킨 후 달에다 강한 방점을 찍는 전통이 셌던 탓일까.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종교 언론의 관심은 참으로 적고 더디다. 가끔 실험을 해보자는 제안이 없지는 아니나 제안 수준을 넘지 못한다. 소통 과정이 없이는 종교가 느껴지거나 만져질 수 없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문턱을 좀체 넘지 못한 대중에겐 더욱 그렇다. 달로 이어지기 위해선 멋지고 적절하며 때론 카리스마 있는 손가락이 절실하다. 종교적 가르침이 더욱 필요해진 지금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종교 언론에 미디어 혁신에 대한 관심이 과소함은 그래서 안타깝다.

바보에서 스마트로 별칭이 바뀔 정도의 미디어 판 움직임에 종교 언론의 대응은 늦었음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좋은 내용만 있으면 어떤 미디어에 담기든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이 더 힘을 쓰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고집 탓에 이젠 대중에 접근할 기회마저 차단되는 곤혹스러움도 겪는다. 대중이 애용하는 미디어의 문턱을 넘지 못하니 과거보다 더 나은 내용이 나올 리 만무하다. 악순환의 반복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문턱을 넘어 그 반복을 깨는 지혜를 도모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새로운 미디어 판에 맞는 맞춤형 내용을 생산할 능력을 키워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후발 주자가 꾀할 일은 늦은 자들끼리의 연대다. 각자 도생으론 해결해내지 못한 부분을 연대로 풀어내야 한다. 새로운 미디어의 힘은 연결, 네트워크에서 발생한다. 우선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되 개별적으로 기존 네트워크에 줄을 댈 일은 아니다. 유대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어 기존 네트워크와 협상하는 지혜가 후발 주자로선 필수적이다. 불교 언론 네트워크로 만든 포털, 공동운영 블로그, SNS가 그 시작의 예가 될 수 있다. 연대로 만든 작은 손가락이 오롯이 달로 이어진다면 새로운 미디어 시대로 종교 언론에 그리 가시밭길만은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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