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불선원장 월호 스님

참불선원 인문학강좌명쾌·호쾌·상쾌 <선가귀감>

()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를 뜬구름 잡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하지만 선은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걸림이 없을까. 불가(佛家)에서는 걸림이 없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걸림없다고 본다. 물론 중생이 이를 간단히 받아들이긴 어렵다. 이와 관련해 행불선원장 월호 스님은 926일 서울 참불선원 인문학강좌서 참선은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모습을 바라보는 관찰자를 관찰한다는 점에서 명상과 차이가 있다화두를 통해 성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견성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월호 스님은…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를 받고, 쌍계사 조실 고산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쌍계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제방선원서 정진했으며, 고산 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전수 받았다. 현재 서울 송파구 행불선원장과 달라이라마방한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저서로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영화로 떠나는 불교여행〉, 천수경 풀이 〈아바로키테슈와라, 당신은 나의 연인〉 〈삶이 값진 것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등이 있다.

바라보는 것이 수행인 불교
서구교육 익힌 이에겐 어려워
모든 존재 이미 걸림 없기에
화두 통해 본래면목 살펴야

오늘은 서산대사(1520~1604)<선가귀감(禪家龜鑑)>을 통해 설명한 ()’이 어떤 것인지 간단하게 얘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보통 선을 이야기하면 중국을 떠올리곤 하죠.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서산대사라는 특별한 선승이 계셨고, 이런 좋은 어록을 남겨주셨다는 게 고귀합니다. 그럼에도 <선가귀감>을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점은 안타깝습니다. 서산대사의 법명은 청허 휴정이고,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조직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아는 사실입니다. 서산은 당시 묘향산이 서북의 명산이라는 뜻에서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의 근기를 파악하기 위해 준비한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보세요. 얼마 전 자동차에 문제가 생겨서 정비소에 갔더니 사무실 옆에 적힌 내용인데요. 차주라면 꼭 해야 할 2가지와 하지 말아야 할 2가지입니다.

A(미리미리 관리)-최소비용(그린존) B(때가 돼서 관리)-기본비용(블루존) C(때가 지나 처방)-추가비용(레드존) D(미루다가 수리)-최대비용(블랙존)

건강하고도 관련 있겠죠. 차에 관한 얘기지만 마음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존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음입니다. 어느 날 행불선원 근처를 지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담벼락 틈을 비집고 핀 꽃 한 송이를 보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걸 보고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꽃의 생명력’ ‘아름다움’ ‘밝고 환하다’ ‘참 애썼구나’ ‘열심히 살고 싶다등등 아주 다양하겠죠. 느낌을 얘기했을 뿐인데 사람마다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눈으로 보는 모습에 대해서 주로 나타나는데요. 이와는 달리 사진을 찍은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이 관찰자의 시각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지금 한 얘기는 참선의 시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던진 서두입니다. , 주와 객의 시각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관찰자의 시각으로 전환하는 겁니다. 불교수행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요. 첫째 몸 보기, 둘째 마음 보기, 셋째 성품 보기입니다. 따라서 불교수행은 보는 것이고, 이를 관찰하는 걸 명상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모습을 바라보는 관찰자와 그 관찰자를 관찰하는 것이 참선이고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명상과 참선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것입니다. 명상은 한 가지를 계속 관찰하는 사마타와 여러 가지를 보는 위빠사나로 구분되죠. 하지만 참선은 관찰자를 관찰합니다.

그렇기에 참선문중에서는 견성도인이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참선은 목표도 견성이고, 방법도 견성입니다. 어찌 보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몸을 보고, 마음을 보는 것까진 이해가 되는데 성품은 도대체 어떻게 볼까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서양식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분별적 사고에 익숙합니다. 관찰자는 분별 이전의 자리이기 때문에 익숙지 않은 것이죠. 그러나 알고 보면 이보다 쉬운 것도 없습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는 관찰자를 일물(一物)이라고 표현합니다. 서산대사의 임종게로 알려진 시에는 이에 대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공수래공수거 시인생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空手來空手去 是人生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이것이 인생이다. 생은 어디서 왔으며, 죽음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그렇습니다. 대제국을 세웠던 알렉산더대왕도 죽을 때 자신의 손을 대중에게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결국 빈손이란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제 출가동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날 젊은 지인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인마저 돌아가셨죠. 그때 죽음이 먼 미래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오늘일 수도, 내일일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어디서 왔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연(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태어난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며,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 사라짐이네.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으니 생사의 오고감 또한 이와 같도다.

어느 날 저는 삼각산에서 참선을 했습니다. 출가 이전에 마음공부 하려고 어지간히 헤맸죠. 책도 읽고, 큰스님들 법문도 들었습니다. 그리곤 산속에서 참선한다고 가부좌를 틀고 죽어라 정진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더군요.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어요. 그래서 산꼭대기에 올랐는데 넓적한 바위가 있더군요. 그 바위에 대자로 누웠습니다. 화두고 뭐고 그냥 힘들어서요.

그렇게 쉬고 있는데 하늘이 정말 파랬습니다. 모처럼 마음이 편해졌죠. 근데 동글동글하고 아주 예쁜 구름 하나가 천천히 흘러오더군요. 그리곤 어느 순간 점점 흩어져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걸 보는데 어찌나 환희심이 나던지 콱 막혀 있던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웃음이 절로 나왔죠. 이 게송이 그때 마음과 참 닮았습니다.

독유일물상독로 담연불수어생사(獨有一物常獨露 湛然不隨於生死).

오직 한 물건만 항상 홀로 드러나 생사에 따르지 않고 맑네.

우리 몸뚱이는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하다고 합니다. 오늘의 여러분과 내일의 여러분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끊임없이 변화할 뿐입니다. 오로지 일물(一物)만 있을 뿐입니다. 조금 더 쉽게 얘기해보겠습니다.

(울림 주발을 치고) 지금 소리가 있나요? , 있습니다. (울림 주발을 잡고) 지금은 어떤가요? 소리가 없습니다. (다시 울림 주발을 치고) 지금 소리를 듣고 있나요? 그렇죠. (울림 주발을 잡고) 소리를 안 듣고 있나요? 그렇지 않죠. 우리는 듣고 있기 때문에 소리가 없다는 걸 압니다. 즉 소리에는 생멸이 있지만 소리를 듣는 성품은 항상 존재합니다.

잘 때 꿈에서 볼 것 보고 들을 것 다 듣죠? 이것도 성품의 작용입니다. 여러분이 잠들어도 성품은 잠들지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품은 관찰자입니다. 그리고 성품을 보는 게 생사를 넘는 것이죠. 몸뚱이는 죽고 살지만 그 성품은 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내는 것도 내가 화를 내는구나가 아니라 월호가 화를 내는구나라고 봐야 합니다.

이제 <선가귀감>의 첫 대목을 보겠습니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 없다.

한 물건이란 뭘까요? 이를 두고 옛 어른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아직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 정답은 아니지만 쉽게 말하면 한 물건을 불성(佛性)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이유는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명명하든 정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어떤 이름이든 붙일 수 있고, 어떤 모양이든 그려낼 수도 있겠죠.

우리는 흔히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고 합니다[一切衆生悉有佛性]. 내 몸이 있고, 그 안에 마음이 있고, 그리고 마음 안에 불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불성은 내 몸보다 클 수 없습니다. 불성이란 건 그렇게 작지 않습니다. 몸보다, 마음보다 큰 것이 불성이지만 이를 지니고 있다고 표현하다보니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겁니다.

몸을 닦지만 성품을 닦을 순 없습니다. 더럽혀지지 않아서 닦을 수 없는 겁니다. <반야심경>의 불구부정입니다. 이건 그냥 보면 되는 겁니다. 512처가 모두 불성입니다. 일체가 나이고, 불성인 셈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나라 최초의 화두집인 <선문염송>의 제1칙이 도솔화두입니다. ‘세존께서 아직 도솔천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왕궁에 강림하셨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도 전에 중생을 다 제도해 마쳤다. 이것이 무슨 소식인가.’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이것이 간화선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묵조선이 좌선을 중시한다면 간화선은 문답을 중시합니다. 그냥 앉아만 있다면 백년이 지나도 똑같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자기 고정관념으로 인해 말이죠. 간화선은 선지식이 답을 가르쳐주진 않지만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도록 합니다. 틀린 건 틀렸다고 알려주죠. ‘이뭣고화두 역시 같습니다.

도솔화두를 잘 살펴보면 부처님이 계시는 도솔천과 카필라성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말합니다. 출생 이전에 중생을 제도한 것은 시간적 걸림이 없다는 것이고요. 더 자세히 설명할 부분이 있지만 일단 선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선가귀감> 두 번째 대목은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이 일어남이다입니다. 역시 쉽게 이해되진 않습니다. 이는 한 물건으로 따졌을 때 사람마다 본래면목이 뚜렷이 이루어져 있기에 부처와 조사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 허망한 생각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감이 좀 오시나요?

다른 대목인 대장부는 부처와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부처와 조사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얽매여 걸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참선은 정해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게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작 단계에서는 무언가 길을 열어줄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있어야 접근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화두는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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