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모든 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무조건 남을 이익 하게 한다면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옵니다.

어떻게 추석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질문 해년마다 지내는 추석이지만 올해 추석에는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것은 없지만, 제가 이렇듯 이 마음도리를 만나서 흔들림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 있음이 감사했고, 저를 이렇게 수승한 공부로 인도해 주신 조상님들께 또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저희들이 어떻게 추석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뜻을 계승해 나가야 할는지요.

답변 여러분께서 8월 추석을 지내셨습니다. 8월 추석을 지내신 뜻을 우리가 한 번쯤은 음미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분이든지 밥 먹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옷 입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물 안 먹고 사는 사람 없고, 불 쓰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땅 딛고 다니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8월 추석이라고 하는 것은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서 첫 곡식으로 밥을 지어 놓든 떡을 해서 놓든 무엇을 해서 놓든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일체 만 중생과 더불어 같이, 이 지수화풍이나 또는 무정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마음들을 한데 둥글려서 그 마음으로 깊이 그 감사함에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이것을 따로따로 얘기하는 거보다도 몰아서 얘기하는 것이 간단하고 쉬울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마음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것입니다. 무한량이라면 무한량일 수 있고 작다면 바늘구멍 하나 안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생각해서 진실하게 감사함을 느낄 줄을 모두 모릅니다. 더군다나 가깝게 있을수록 더 감사함을 모릅니다. 없으면 당장에 생명을 유지 못하는데도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 쓰는 거와 불 쓰는 거와 땅을 딛고 다니는 거와 공기를 쐬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또 일체 만물을 통해서 공부를 할 수 있고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고, 또 상대성 원리로써 개발을 할 수도 있고 창조력을 기를 수도 있고 창조를 해낼 수도 있는 그러한 모든 여건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은혜를 생각할 수가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일체 만물만생 전부가 다 흙이든지 무정물이든지 식물이든지, 지수화풍을 막론하고 더불어 모두가 평화스럽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끔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질 못합니다. 평화스럽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여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들이 물질세계의 50%에만 전전긍긍하니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내가 산다느니 내가 했다느니 내가 말했다느니, 망한 거는 또 타의에 의해서 망했다느니, 저 사람 때문에 우리가 못살게 됐다느니 이러한 문제 등이 모두 여러분의 마음에 사무치기 때문에 밝게 내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천당, 지옥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이 이 마음이 진정코 무서운 도리라는 것을 한번 음미해 보십시오. 일체 만물만생이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로 낳는 거나 알로 낳는 거나, 화해서 낳는 거나 질척한 데서 낳는 거나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정물도 식물도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고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느냐. 전력이 똑같듯이 인간의 불성의 씨는 다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마음들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모습을 지어 가지고 나옵니다. 우리가 박 씨를 심었으면 박이 나죠. 박 싹이 나고 박이 또 열리죠. 그러나 마음의 불씨라는 것은, 마음의 씨라는 것은 박 씨도 아니요 사람 씨도 아니요, 이것 씨도 아니요 저것 씨도 아닌 자체의 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먹는 대로 입력이 돼서 그것이 현실로 모습을 들고 나오고, 바로 현실로 모든 생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을 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순간에 깨달을 수는 없는지요
질문 우리가 한순간에 깨달을 수는 없는지요. 아니면 법력 높으신 스님께서 깨닫게 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답변 우리는 여러 모로 봐서 지극하게 믿고, 믿는 것도 바깥으로 믿지 말고 안으로 진실하게 믿고, 일체 만법이 다 그 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니까 그 속에다 맡겨 놓을 수 있는 그런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진실하게 구하는 법도 나오고 진실하게 깨닫는 도리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주인공을 찾다가도 어떠한 일이 용도에 따라서 부닥치면 안으로 놓기 이전에 바깥으로 끄달리고들 하십니다. 안으로부터인데 말입니다.

안에다 물을 줘야 바깥의 나무들이 잘 자라듯이 벌써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알아들었다고, 주인공에 놓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과 믿음과 구함이 진실해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하고 그렇게 모든 걸 둘로 보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고, 나한테서만이 이끌어 줌이 나온다고 생각할 때, 모든 해결은 그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나를 깨닫게, 증득하게 해 주는 것도 그 속에서만이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실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가짜입니다. 곧 죽어도 옳은 거는 옳게 안으로 놓고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한 철 나왔다가 부닥침이 없다면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한 철 날 때에 부지런히 해서 깨달아야만 요다음 생에…. 아니, 나고 들고 하기 이전에, 생하고 멸하고 하기 이전에 내가 자유스럽게 보고 자유스럽게 듣고 자유스럽게 남을 알고 자유스럽게 어디서 온 걸 알고 자유스럽게 오고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자유스럽게 내가 직접 주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면은 스스로 법신이 되고 스스로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도 될 수 있고요.

그런데 바빠서 절에 못 온다, 뭐, 주인공 찾는 거니까 집에서 해도 된다 이렇게 해 가지고 잘못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왜 교수 노릇을 하면서도 자기네 아들딸들을 학교로 보냅니까? 내 집 아이가 수술을 꼭 받아야 하는데 왜 남의 의사한테 맡깁니까? 내 집 아이는 내가 수술을 하기에는 너무 그 마음이 그게…, 남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거를 알면은 해도 괜찮건만 내 자식이라는 그 착에 의해서 수술하는 칼을 못 대죠. 그래서 여러분이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무조건 남을 이익 하게 한다면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옵니다. 그 점을 자비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통일이 될까요
질문 저에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면 통일이 될까 하고 통일에 대한 소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통일이 될 수 있을까요. 저에게 그 해결 방법을 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이 통일을 하는 자가 사람이라고 보지마는, 우주 삼라만상에서 다 통례가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회의를 해서 적합하다 할 때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느 사람이 주어져서 그 사람이 움죽거리게 돼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아주 많이 팽창이 됐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생각을 하니까 3차 대전이 벌어질 게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에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아, 그러면 이쪽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리는 없으니까 저쪽을 이렇게 좀 나누면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몇십 년 전 얘깁니다. 그렇게 하고 인제 우리 애들더러도 “어이, 그렇게 했으면 어떻겠느냐?” 이렇게만 얘기하고 말았죠. 그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게 잘못 생각을 하면 또 안 됩니다. 잘 생각을 한 뜻이라면 우주간하고도 통신이 돼야 된단 말입니다. 이게 통신이 돼서 이 만물하고도 통과가 돼야 되는 겁니다. 이게 소소한 거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어느 사람을 잡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뭐, 누구를 어떻게 잡는다 이러면, 즉 말하자면 모든 하는 일에 대한 법 줄기를 갖다가 거기로 대죠, 모자라는 거를 채우면서. 그래서 성립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거를 말로 이렇게 하려니까 어떻게 잘못하면 미친 사람으로 됩니다, 이게. 잘못 말을 하게 되면 미친 사람, 돈 사람으로 생각되게끔 되죠.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공부를 빨리 서둘러서 꼭 해야 된다는 결론도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위태합니다. 어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위태한데 그 위태한 이유는 여러 가집니다. 모두 공해로 인해서 생긴다고도 하고, 아니 1/3은 공해로 인해서 생기죠. 그렇다면 이 모두가 지금 원기 그 자체라고 할까, 너무 이렇게 압축이 돼요, 지금. 오존층이라고 할까 이게 자꾸 압축이 되니까, 얼음이 만약에 다 녹는다고 해 봅시다. 땅덩어리는 파산이 되지. 심각한 문제죠.

그러니까 잘들 생각해 보세요. 이 마음공부를 해서 그 모든 거를 타파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이 마음 이 자리밖에는 우주로 통과할 수가 없다는 거. 거기밖에는…. 나는 여러분처럼 잘 배우지 못해서 용어를 잘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딴 사람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나는 내 나름대로 이름을 지을 수도 없고 또 부르려니 입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그러거든요. 금방 나는 이름을 불렀다가도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또. 어저껜 금방 그 말을 “야, 자꾸 가라앉는다.” 하는 소리를, 뭐가 가라앉는다 하는 소리를 금방 했는데도 그냥 또 까만 거예요. 그렇게 까매요. 그런데 뜻은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을 하면 지금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는 것은 새 발의 피다. 이것이 앞뒤로 다가오는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을 하겠는가. 이건 보이지 않는 무의 법에서만이 할 수 있다는 얘기죠. 이해가 가십니까?

모든 것이 영의 소행이라 하는데
질문 제 몸은 종합병원입니다. 마음공부를 해 나가면서 한동안 설사가 멎었는데 다시 예전처럼 설사가 계속돼서 수시로 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병의 원인이 영의 소행이라는 소리를 어느 분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빚을 내서라도 천도재를 지내야 하는 것인지요.

답변 간단한 걸 가지고 왜 그러십니까. 간단한 걸 가지고 이날까지 그렇게 애쓰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공생이에요, 공생. 공생으로 살아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공심이자 공체에요.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죠. 꼭 명심해서 ‘공생, 공심, 공체, 공용을 하고 사는구나. 이 몸에서 세포 하나의 생명체가 떨어져 있는 게 없구나. 다 더불어서 같이, 내 마음이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그냥 되는구나.’ 하는 걸 믿으세요.

그리고 조상들도 산 사람이나 둘이 아니게 똑같이 섬기세요, 마음으로. 잘못했든지 잘했든지 간에 지금부터 모두가 공생으로서의 공심으로 하세요. 그럼 움죽거리는 게 죽은 영가들도 공용으로 움죽거릴 거고 집의 마음이 공용으로 움죽거린다면, 그렇게 한다고 믿는다면 그냥 공용으로 다 움죽거려서 어떤 거든지 요만한 거 하나 걸림이 없어요. 새로 바꿔지면서 재생이 되는 거죠. 재생이 되고 또 좋은 데로도 갈 수 있고요. 사람들 살아나온 그 차원 때문에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댁이 공법을 쓰니까 그냥 공법대로 하나로 거기 붙어서 돌아가는 게 없이 그냥 걸림이 없어요. 그러면 당신은 살아요.

보림에 대해서
질문 돈오돈수의 입장에서는 보림이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돈오점수의 입장에서는 돈오 이후에 보림을 꼭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큰스님께서는 놓는 것도 보림이라고 하셨는데 보림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내 몸속의 중생들을 둘 아니게 조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고 형성돼서 인간까지 왔으니만큼, 이 인간 중에서도 진짜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모든 것을 벗어나야 한다.” 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죠. 그러니까 이 마음의 주장자의 자리를 완벽하게 해 놔야 된다는 건데, 이게 결국은 보림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수억겁을 통해서 겪어 온 관습이나 욕심이나 아상, 아만 이런 모든 거, 딴 사람은 죽어도 내가 살아야겠다 하고 잡아먹는 거, 딴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 하고 정신을 뺏어먹는 것, 이런 행위를 함이 없이…. 둘 아니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둘 아닌 도리를 이렇게 배우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싹이 나서 너풀거려야 바람이 부는 소리도 듣고 흙냄새도 맡고 거름 주는 것도 알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바람이 분다 하면 뿌리를 좀 널따랗게 잡는다거나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알고 이런 식물이라고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압니다. 그러니만큼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둘 아닌 도리를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부터 알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의식과 그 모두가 내 주인공으로 통일돼야 됩니다. 그래서 찾으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진짜 믿어라. 진짜 믿는다면 한군데서 그 선장이 중생들을 이끌고 다 조복을 받는다 이런 겁니다.

그리고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을 다 둘 아니게 조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셨는데, 이 모두가 항상 그렇게 한군데서 들고 나는 거지 여러 군데서 들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군데가 아니고 내 이 한마음에서 들고 나죠. 예를 들어 말하자면, 반가워서 악수를 할 때 마음이 먼저 갑니까, 손이 먼저 갑니까? 마음이 먼저 가고 안 가고 간에 마음이 일어나니까 손이 가는 겁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반가운 사람이라면 반갑게 마음이 내어지고, 또 그냥 인사를 해야겠다 하더라도 인사하기 위해서 손이 갑니다. 그거 뭐 정확합니다. 또 마음이 안 가는 사람한테는 손이 안 내밀어지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차원이 주어지고 삶이 주어지고 모습이 주어집니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여러분은 많이 해 보셨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주어지고 삶이 주어지고 또는 차원이 주어집니다. 차원이 주어지기 때문에 모습과 삶도 주어지는 거죠.

지금 텔레비전 많이들 보시죠. 거기에서 연기하는 것을 보면 아주 진짜처럼 하죠. 진짜로 잘하죠. 역을 맡아 가지고 그렇게 잘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진짜처럼 잘하는데, 우리도 진짜처럼 살고 있단 얘깁니다. 탤런트들처럼 그렇게 자기의 차원에 따라서 삶도 주어졌고 모습도 주어졌으니까, 그렇게 주어진 대로 그대로 살아야지 거기서 빼고 끼우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팔자 운명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 자유자재권을 갖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이왕 사람이 되었다면 그런 계단 없는 계단을 밟아서 차원의 급수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돈오는 갑자기 어린애를 낳아서 “으앙” 하고 우는 거를 말하는 것이고, 자라기 위해서 바깥에 나와서 세상을 살면서 배우는 것을 바로 점수라고 이름할 수 있겠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탤런트처럼 사는데, 가만히 생각들 해 보십시오. 우리가 탤런트라면 그냥 아무 역이나 자기에게 주어지는 대로 맡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데 여러분한테 진짜로 죽는 역, 또는 아주 하(下)의 사람의 역, 강도 역, 사기 역 그런 역을 맡아서 나가라면 아마 안 나갈 겁니다, 죽는 역은 더군다나. 그렇죠? 진짜로 죽는다면요. 그런데 그 탤런트들이 진짜로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역을 맡아 가지고 나간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진짜로 사는 게 아니니까 모든 것을 다 거기 놔라. 선장이 있는데 선장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그 선장한테 맡기고 놔라.”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들고 나고 들고 나고 하는 것을 다 거기 놨을 때 그것이 일차적인 보림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완벽하게 보림이 돼야…,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오륙도 같은 데 뭐, 깊은 산속 같은 데 걸어가다가 큰 돌이 서 있으면 ‘아 참, 저 돌 잘생겼다.’ 하고 쳐다볼 수도 있죠? 또 그런 곳이 아니라도 이렇게 지나가다 보면 뭐든지, 작든지 크든지 말입니다. 비실비실하고 비틀어지고 뿌리를 박지 못한 나무 한 그루도 그렇고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나무들이나 돌이 손을 내밀면서 내 손을 잡아 달라고 한 그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공부의 단계니까.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엄연히 손 없는 손이 내민 겁니다. 손 없는 손이 나에게 손 없는 손으로 ‘잡아 다오’ 한 겁니다. 그러면 잡아 주는 순간 둘이 아니게 그냥 하나가 돼 버리고, 하나가 되었다가 또 둘이 되고, 이렇게 자유자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없는 손을 건져 줄 때는 없는 손에다 넣으면 손이 둘이 아니게 되고 형체가 없으니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이죠. 그래서 둘 아닌 공부의 실천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나를,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진화시키고 형성시킨 자기 자신과 통했단 얘깁니다. 통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그 나무로 통해 가지고, 돌로 통하든지 해 가지고 자기를 가르치기 위해서 ‘손 좀 잡아 다오’ 하는 겁니다. 둘 아닌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이것을 이론으로만 알아서는 도저히 무(無)의 세계의 법도를 모르고, 무의 세계의 공법을 모르고, 무의 세계의 가고 옴이 없는 도리를 모른단 얘깁니다. 그리고 실천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분들이 있다면 여기서 벌써 싹이 트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싹이 트여서 그 싹은, 예를 들어서 거기까지, 그 나무까지 목신하고 둘 아니게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내 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은 다 합일이 됐다는 얘기죠. 조복을 받았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거기서 무의 도리로, 이것을 손 없는 도리로, 손이 있든 없든 그대로 둘 아니게 건질 수 있다는 얘기고 또, 배우는 도리입니다. 그게 두번째 보림할 수 있는 도리를 배우고 가는, 즉 말하자면 무의 공법입니다.

그러니까 예전 같으면 “너 귀신 방귀씨 얻었느냐? 얻었다면 내놔 봐라.” 이렇게 말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는 살아 있을 때, 생전에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린 바쁩니다, 지금. ‘지금 살아 있을 때 하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이게 아닙니다. 이어 갑니다. 그래 자꾸 그것을, 은산철벽을 정으로 쪼는 것처럼 자문자답하면서 자꾸 놔야 하겠죠. 그리고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잖아.’ 하고, 저녁에 자기 전에라도 15분이고 20분이고 그렇게 앉아서 단련을 하게끔 하는 것도 아주 필요합니다. 울지 않는 어린애 젖 주는 법 없죠. 여러 애들 중에도 그냥 막 악을 쓰고 우는 어린애를 얼른 안아서 젖을 주게 돼 있거든요.

배 속에 어린애가 들었을 때에 태가 있고 젖줄이 있습니다. 그 애는 자랄 때 젖줄을 잡고 자랍니다. 여러분도 그 주장자가 바로 젖줄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 젖줄을 잡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거죠.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도 죽을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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