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면앙정 송순
30. 면앙정 송순
  • 박동춘 소장
  • 승인 2016.09.2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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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경지 물 흐르듯 써 내린 詞伯

면앙정 중창 후 가단 형성
조선 시가문학에 큰 기여
불교관 이해도 뛰어나
절 머물며 승려들과 교유

▲ 2012년 호남문화원과 면앙정 송순회방연 재현행사위원회가 개최한 제2회 면앙정 송순회방연 재현행사. 송순회방연은 1579년 면앙정 송순의 과거급제 60년을 맞아 제자들이 면앙정에서 큰 축하잔치를 열고 스승을 태운 가마를 직접 메고 집까지 모셨던 연회다. 사진제공=담양군
조선 중기 호남의 가단(歌壇)을 이끈 송순(宋純, 1493~1582)은 담양 출신으로 거문고를 잘 타는 풍류객일 뿐 아니라 음률에도 밝았던 인물이다. 자는 성지(誠之), 수초(遂初)이며 면앙정(仰亭), 기촌(企村)이라는 호를 썼다. 1552년 면앙정을 중창하여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으니 당시 이곳에 모인 인사로는 기대승(奇大升)과 임제(林悌), 김인후(金麟厚), 임억령(林億齡), 박순(朴淳), 고경명(高敬命) 같은 사대부들이다. 특히 기대승은 면앙정기를 썼고 임제는 부()를 지어 고상한 면앙정의 아취를 세상에 알렸다.

송순이 처음 벼슬길에 오른 것은 1519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다. 그는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제수된 이래 사간원정언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건만 김안로가 득세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면앙정을 지었다. 특히 그가 여기에서 지은 면앙정가(仰亭歌)는 정철의 성산별곡관동별곡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편 그는 김안로가 죽은 후에야 다시 홍문관부응교에 올랐다. 이어 사헌부집의에 제수되고 사간원대사간에 오르는 등 요직을 거쳤으나 1542년경 윤원형으로 인해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한때 중종실록을 편찬했고 1550년에는 대사헌과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서천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해배된다. 1568년 한성부좌윤으로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의정부우참찬에 제수된 후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일(隱逸)하였다.

후일 그가 뜻이 맞는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면앙정가단을 형성한 일은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이나 영남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 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보다 앞선 것이다. 특히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들로 구성되었던 반면 경정산가단이나 노가재가단은 전문 가객들이 중심이 된 가단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아무튼 송순은 자연을 예찬하는 작품을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기여한 공이 컸다. 더구나 호기로운 기상을 지녔던 그는 품 넓은 재상으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하니 다투어 자신의 시축에 제발(題跋)을 받고자 하는 승려들이 없었으랴. 그러므로 교유했던 석희 스님이나 지천 승려, 팔환 상인, 그리고 백암사 쌍계루(白巖寺 雙溪樓)에서 포은 정몽주의 시에 차운한 시를 남겼을 터이다. 먼저 그가 석희 상인의 시축에 쓴 차석희상인시축(次石熙上人詩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번다하지 않은 음식, 몸을 지탱할 뿐(飮食無煩支外形)
제호를 내치니 이미 본성이 가득 차네(
散性已爲瀛)
담박한 마음으로 돌아가니 아름답고 추함도 없으며(心歸淡泊空姸醜)
텅 빔을 배우니 사생도 끝없어라(學向虛無盡死生)
아득한 현의 빗장을 여니 현상에 매이지 않고(玄鍵遙開臨罔象)
신령한 구슬을 닦자 맑고 원만함이 드러나네(靈珠曾拭見圓淸)
공부 끝나자 바야흐로 오묘한 이치와 통하니(工夫了底方通妙)
이 등불, 밝음이 사라졌다 말하지 말라(莫道玆燈有滅明)

석희 상인에게 준 시는 송순이 인식한 불교관을 어느 정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번다하지 않은 음식, 몸을 지탱할 뿐/ 제호를 내치니 이미 본성이 가득 차네라고 한 대목이다. 절제와 검소를 실천하는 수행자는 최소의 음식으로 몸을 지탱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맛 좋은 제호를 멀리하여 절제함으로써 탐욕이 사라진 본성으로 가득한 마음 상태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신령한 구슬을 닦자 맑고 원만함이 드러나네/ 공부 끝나자 바야흐로 오묘한 이치와 통하니라고 하였으니 신령한 구슬은 마니주가 아닌가. 본래 청정한 마음에 낀 오탁을 닦아 맑고 원만함이 드러난다는 말은 바로 불교의 수행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오묘한 이치에 통달한 경지라면 유무의 분별이 이미 사라지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하니 어찌 등불은 늘 밝지 않으랴.

이뿐만이 아니다. 그가 도리사 승려에게 준 제도리사승시축(題桃李寺僧詩軸)에는 속진에 물들지 않은 도리사 승려의 진면목을 그렸는데 2() 중에 첫 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멀리 천봉으로 옮겨 돌 사립문 닫으니(千峯掩石扉)
한 티끌 먼지도 스님에겐 이르지 않네(一塵曾不到禪衣)
새 울자 떨어지는 꽃, 한가한 일에 빠졌으니(鳥啼花落渾閑事)
다리 밖 드문드문 오는 객, 무슨 방해가 되랴(橋外何妨客到稀)

천봉은 수많은 산봉우리가 있는 곳, 깊은 산중을 말한다. 바로 도리사가 그런 절이다. 바로 이곳은 수행에 부지런한 승려가 사는 곳, 세속의 먼지 하나도 이르지 않는 암자다. 더구나 도리사에서 공부하는 스님은 도가 높아 수행의 열락에 흠뻑 빠져 있으니 그의 이런 경지를 방해할 이 누구인가. 그러므로 다리 밖 드문드문 오는 객, 무슨 방해가 되랴라고 한 것이다. 제도리사승시축(題桃李寺僧詩軸)2수에는 수행자의 걸림 없는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가을 달, 봄꽃 피는 세월을 기억하지 못하고(秋月春花不記年)
다만 원숭이, 학을 따라 깊은 산 속에서 늙네(只隨猿鶴老巖前)
한적한 마음, 날마다 상재하는 구름과 함께하니(閒心日與雲相在)
다른 산에 신선 있다는 게 미덥지 않네(未信他山更有仙)

도리사 승려는 공의 이치를 터득한 수행자인 듯하다. 그러므로 가을 달, 봄꽃 피는 세월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원숭이 학을 따라 깊은 산 속에서 늙네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탈한 경지, 바로 도리사 승려의 모습이다. 송순은 강호의 사백(詞伯)이었으니 절로 이런 경지를 물 흐르듯 그려냈다. 따라서 그의 높은 시격, 이름이 높았으니 이 향내 따라 그를 찾은 승려가 많았던 것이다.

그가 영통사에 머물 때에 벽에 남아 있던 권근(權近, 1353~1409)의 시를 읽었던가보다. 홀연히 일어나는 시흥(詩興)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영통사에 머물며 양촌 권근이 벽에 쓴 시를 차운하다(宿靈通寺 次權陽村壁上韻)라는 시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너의 한가함을 훔치려 가을 숲을 찾았더니(偸閒偶爾訪秋林)
곧은 회나무와 이리저리 굽은 덩굴, 서로 그늘을 드리웠네(脩檜盤蘿互結陰)
계곡을 감싼 듯 중첩된 바위, 돌아도 끊이지 않고(護谷重巖回不斷)
감아 도는 계곡을 건너 들어가자 더욱 깊어라
(溪一逕入猶深)
다리 주변 옛일, 찾아도 흔적조차 없지만(橋邊舊事尋無處)
벽 위에 아름다운 시는 지금까지 전해지네(壁上佳詩傳至今)
승방의 창가에서 밤 달을 보려하니(擬借僧窓看夜月)
실없이 일어나는 벗 생각, 홀연히 가라앉네(無端雲樹忽平沈)

그의 영통사에 머물며 양촌 권근이 벽에 쓴 시를 차운하다에는 절 앞에는 흙다리의 옛 흔적이 있다(寺前有土橋舊跡)라는 부제가 있다. 개성 부근에 위치했던 이 사찰에는 흙다리가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송순이 영통사에 머물 당시에는 이미 다리는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겐 권근의 시에서 느끼는 감동이 컸을 터이다. 또한 기묘사화의 언저리를 경험했던 그가 정변에 희생된 벗들의 시를 보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해를 가린 부운, 거두었다 다시 흩어지지만(蔽日浮雲卷復敷)
향기로운 난초를 일시에 시들게 할 수 있네(能敎蘭蕙一時枯)
인간 세상에선 여향을 찾기 어려웠네(難從人世尋餘臭)
우연히 선가에 떨어진 구슬을 줍누나(偶向禪家拾落珠)
봄풀은 몇 번이나 푸른 네 무덤을 지났던가(春草幾回靑四塚)
머물 곳 없는 벗의 마음, 외로운 몸에 의탁했네(舊懷無處托孤軀)
손 때 묻은 글씨 펴 보니 줄줄 눈물이 흘러(奉披手澤
然淚)
()에 의지한 고승, 한동안 나를 기이하다 여기리(空取高僧久怪吾)

송순은 기묘사화에 희생된 유학자들의 슬픈 내력을 이웃에 승려 지천이 시축을 옷소매에서 꺼내서 보여주었다. 서계 남수가 첫머리에 일률을 지었고 눌재 박사씨와 경앙 최산두가 그 다음에 시를 썼으며, 형중 윤구가 서문을 지었는데 네 공은 모두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지금 그 글씨를 보니 완연하여 어제와 같았다. 얼마간 펴 보다가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 운()으로써 슬픔을 드러냈다. 최공 산두는 사인 벼슬을 하였고 호는 신재이며 광양에 살았다. 윤공구는 벼슬이 교리였고 호는 율정이며 해남에 살았는데 모두 기묘사류들이다.(隣僧智泉袖一軸開示 南西溪 首題一律 朴訥齋師氏與崔景仰山斗 次其韻 尹亨仲衢 作序文 四公皆不遇而逝 今見手跡 宛然如昨 披展良久 不勝愴懷 用其韻以敍悲 崔公山斗 官舍人 號新齋 居光陽 尹公衢 官校理 號橘亭 居海南 皆己卯士流)”라고 하였다.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화로 송순이 별시문과에 급제한 해에 일어났다. 당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신진사류인 조광조 등을 등용,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정치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훈구파인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간교를 피할 수 없었다. 바로 지천 승려의 시축에 이름을 올렸던 이들의 자취를 보곤 왈칵 눈물을 쏟은 송순이었다. 난세의 격랑을 지켜 본 그가 면앙정에서 음풍월로 세월을 낚은 건 어찌할 수 없는 시절의 선택이었으며, 그가 남긴 가사에는 고초로 얼룩진 역사의 그늘이 배어있었던 것이다. 그가 면앙정에서 남긴 수많은 시문은 면앙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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