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범어사 대웅전 닫집

아자형 보궁형 닫집이다. 대들보에 닫집지붕을 얹어 허공에 떠있는 듯이 보인다.
아자형(亞字形) 보궁형 닫집
양 대들보에 닫집 지붕 걸쳐
용, 연꽃, 색구름은 공통소재

닫집, 집 속에 조영한 독립건축
한국사원의 가람구조와 장엄형식은 일반적인 유기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진입체계도 보편적이며 불전을 장엄하는 회화, 조형, 공예양식도 일맥상통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원 자체가 화엄 만다라적 구조를 띈다.

불전 건물에서 불보살 세계의 상단, 호위신중의 중단, 영가를 위령하는 하단의 3단 구성으로 분화하고 재편한 점도 통일적이다. 불보살을 봉안한 상단에는 위계적 중심 특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불교장엄적 요소를 집대성해서 결집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불단, 불상, 닫집, 후불탱화, 단청 등 불교장엄의 핵심요소들이 모든 예술적 역량을 극대화 한 경지로 집중한다. 종교와 예술은 인간의 한계와 모순을 일깨우고 내면의 본성을 정화하고 승화시키는 정신적 작용에서 서로 부합하고, 또 서로를 고양한다.

그런 점에서 상단영역은 종교와 예술이 서로 일체화 된 공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곳에서 예술은 종교적 교리, 혹은 경전의 내용에 영감을 얻어 이상화 한 초월세계를 구현하고, 또 종교적 교리는 예술양식의 창조적인 해석에 자유로움을 부여한다. 그를 통해 종교적 거룩함이 예술의 미적체험으로 현현한다. 불전건물의 상단장엄에서 가장 독특한 형식은 건축 내부에 또 하나의 독립건축을 구현한 양식일 것이다. 프랙탈 도형처럼 자기유사성을 반복한 건축 안의 건축으로, ‘닫집’이라 부르는 공예장엄이다.

익산 숭림사 보광전, 완주 화암사 극락전, 논산 쌍계사 대웅전,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부산 범어사 대웅전의 닫집 등은 닫집미학의 정수로 손꼽힌다. 범어사 대웅전의 닫집은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위상에 놓인다. 심미성, 형식성, 불교교리의 해석능력 등에서 두루 돋보이는 까닭이다.

닫집의 ‘닫’에 관해서 〈명문 국어사전〉에서는 ‘닫’을 부사 ‘따로’의 옛말로 설명하고 있다. 박용수선생의 〈우리말 갈래사전〉에서는 닫집을 “법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단 집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닫집은 그러니까 집 속에 따로 독립한 건축이다. 법당 속의 법당, 집 속의 집이 닫집이다. 자연세계에서부터 닫집에 이르는 중첩적 층위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산지지형의 연화좌 자리에 가람이 들어서고, 가람의 중심부에 대웅전 등 중심불전을 경영하고, 다시 그 가운데에 닫집을 내서 불보살을 모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불보살의 몸 안에 다시 극히 내밀하게 불복장물을 봉안한다. 나선형의 구심점을 지향하는 경이로운 구조다. 태풍의 눈이나 원자핵 같이 내밀한 에너지가 응집한 근원을 연상케 한다. 감싸고 또 감싸는 사리장치의 장엄구조와도 닮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심오하고 거룩하다.

밑에서 올려다 본 닫집.
닫집에 걸린 공통 편액은 적멸궁
물질에서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물의 근원에 이르고, 종교장엄에서는 교의적이며 정신적인 본성에 이른다. 닫집은 불교장엄의 궁극에 이르는 상징주의적 사변의 마지막 관문처럼 보인다. 닫집의 내부는 궁극의 깨달음, 열반적정의 공간이자 적멸의 공간이다.

형식적으로는 꽃 속의 꽃, 집 속의 집의 구조이지만 그 역시 깊이와 본성에 이르는 방편일 따름이다. 불교장엄의 소재와 구성은 경전 속에서 모티프를 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연화장세계라든지, 화엄세계, 극락정토, 연기법 등 불교 세계관의 핵심적 개념들은 그 실재성의 여부를 떠나 대단히 관념적이며 초현실적이며 정신적인 세계다. 문자언어나 조형언어로도 이를 수 없는 언어도단의 절대경지다.

예술가와 장인들은 예술적 창의력으로 필연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소재는 현실과 경험에서 차용한다. 대신 상징과 함축의 형식을 갖춰 시각화, 구체화 한다. 닫집은 집의 형식을 빌렸지만 본질적으로 궁전이다. 몇 몇의 불전 닫집에서는 닫집 처마에 편액을 걸어 부처께서 상주하시는 보궁임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컨대 논산 쌍계사 대웅전, 남양주 흥국사 영산전, 홍천 수타사 대적광전 등에서 편액을 통해 닫집이 부처님이 계신 궁전의 표현임을 실증하고 있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삼존불을 모셨지만, 각 부처님마다 각각의 닫집을 가설한 특이한 경우다. 처마에 단 편액이 각각 ‘적멸궁’, ‘칠보궁’, ‘만월궁’이다. 수타사 대적광전의 닫집 편액도 ‘적멸궁’이다. 흥국사 영산전의 닫집은 이층의 형식을 갖춘 희귀한 중층 닫집이다. 아래는 ‘적멸궁’이고, 위는 ‘내원궁’의 편액을 갖추고 있어 이채롭다. 공통적으로 적멸궁이라는 표상에 이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적멸로 귀일하는 것일까? 불교의 궁극이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지고, 분별의 경계를 넘어선 절대적 공(空)에 있는 까닭이다. 집 속에 집, 우주 속에 우주를 경영한 불이(不二)의 집, 대자유의 집, 적멸의 집이 닫집이다.

범어사 대웅전의 닫집형식은 아자형(亞字形) 보궁이다. 내림기둥이 모두 12개이지만 닫집 무게를 받치는 역학적인 기능의 기둥은 앞쪽 두 활주뿐이다. 나머지 10개 내림기둥은 공중에 떠있는 경이로운 구조다. 내림기둥은 힘을 분산하는 역학적인 부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한 공간임을 암시하는 장식소재로 활용된다. 하늘에 떠있는 보궁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양 대들보에 닫집 지붕을 걸쳐둔 까닭에 있다. 중력을 거슬러 떠있는 닫집을 통해 장인예술가는 닫집이 하늘에 경영한 부처님의 적멸보궁임을 강조한다. 그 보궁에는 닫집장식의 보편적인 요소인 용, 봉황(극락조), 비천, 오색구름, 연화문, 넝쿨문들을 들쑥날쑥 배치해서 공간의 조화로움을 꾀했다.

닫집 좌우 모서리에 조영한 비천 네 분.
여의보주는 깨달음의 마음
닫집장식의 지배적인 소재는 용이다. 삼존 불보살 자리에 맞춰 닫집도 세 칸으로 구획해서 각 칸에 용을 배치했다. 불보살의 위계에 따라 상응하는 용의 크기와 위세도 다르다. 하지만 세 용 모두 몸통을 한 바퀴 감아 똬리를 틀었고, 꼬리 부분에서는 배배 꼬아 역동성을 강화했다.

저마다 응시하는 시선도 자신이 맡은 방위로 분담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용의 조형이 호법과 결계의 힘을 상징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붉은 보주의 기운을 여섯 곳이나 퍼트려 두었고, 세 용은 여의보주를 다섯 발가락으로 움켜쥐거나, 입에 물기도 하고, 다양한 오색구름을 움켜쥐었다. 여의보주나 오색구름은 득의의 깨달음이고, 본질적으로는 깨달음의 마음이다. 종교장엄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현상학적인 외형의 경계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종교장엄에서 언어의 길이 막힌 곳에 조형의 상징을 통해 방편반야를 구현하는 것이 다반사인 까닭이다. 붉은 여의보주는 초현실적이며 절대적인 자유자재의 깨달음의 상징임을 직시해야 한다. 진리의 공간에서 물질적인 보배를 취하는 수준으로 종교장엄이 전락할 까닭이 없다. 이 닫집공간은 적멸의 공간임을 재차 환기해둘 필요가 있다. 특히 그 깨달음은 성문, 연각의 삼승이나 이승법의 깨달음이 아니라 일승법의 무상정등각이다. 보주가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보주는 여래의 본성으로 곧바로 대치될 수 있을 것이다. 지혜의 변재(辯才)이자 진리의 광명 그 자체다.

범어사 닫집장엄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조형은 비천(飛天)이다. 좌우 각각 2분씩, 네 분의 비천이 등장한다. 여타의 조형들처럼 따로 조영해서 모빌(mobile)처럼 철물로 이어 내렸다. 여성적인 세 분은 구름을 타고 해금, 당비파, 박을 각각 연주하고, 선학(仙鶴)을 타고 하강하는 남성적인 한 분은 춤을 펼친다. 비천은 인간의 신체적인 특성을 사실주의적으로 빌려 표현하고 있다. 유연한 곡선이 우아하고 표정엔 따스한 표정이 흐른다. 동시에 하늘을 나는 표대(飄帶)의 긴 천으로 관념적인 형식으로 이상화 했다.

닫집이라는 적멸의 공간에서 형상은 초자연적이며 초경험적인 상징적 위력으로 발현되는 법이다. 오색구름, 넝쿨문 등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현상적인 소재들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부처께서 설법을 위해 사자빈신삼매에 들었을 때 서다림의 허공계에 나타난 불사의한 대장엄누각, 마니보주, 오색구름, 미묘한 꽃, 갖가지 음악 등의 장엄은 여래께서 신통력으로 한 몸으로 자재하게 변화하여 한 티끌 속에 모든 법계의 영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셨다.

곧 닫집의 허공장엄은 부처님의 선근과 위신력으로 장엄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화엄세계의 구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닫집장엄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용, 연꽃, 구름, 봉황, 학, 비천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께서 광명을 놓아 두루 비치는 모든 청정 불국토의 장엄을 두루 관하는 극적인 모티프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닫집에 조영한 현상적인 형상의 미추(美醜)와 물성의 차원을 넘어선 불교장엄의 본질이라 할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고요한 적멸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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