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조계종 교육원에서 주최한 중국선종사찰 순례를 다녀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가져다 놓은 신문에 모 일간지에서 신라왕경 복원이 부실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기획기사를 접했다. 다음날까지 이어진 기사는 충격적인 부분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경주시 산하 전문기관과 민간 발굴업체가 신라왕경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업 총괄 전문 컨트롤타워가 없어 장기 연구·복원계획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됐다.
더욱 문제가 되는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발굴사업들이다. 수십년이 걸리는 고분 발굴을 5년 안에 해치우겠다는 내부 계획이 잡혀있는 것으로 언론을 통해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한 얘기”라고 비판을 쏟아냈다.

비판이 확산되자 문화재청은 반박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발굴과 복원은 모두 충분한 검증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틀에 박힌 대답을 내놨다. 

신라왕경 복원 사업 논란을 보며 20세기 한국 고고학계의 최대 발굴 성과이면서 최악의 사고인 ‘무령왕릉 발굴’이 떠올랐다. 1971년 7월 5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 6호분 배수로 공사중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에 퍼진다. 7월 7일 발굴단이 파견되고 7월 8일 발굴이 시작됐지만, 몰려든 기자들과 구경꾼으로 발굴장은 아수라장을 이뤘다. 기자들은 빨리 입구를 공개하라고 독촉했고, 결국 발굴단은 이례적으로 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이후 17시간 만에 ‘개봉’에서 ‘유물 수습’까지를 서둘러 해치웠다. 큰 유물만 대충 챙기고 나머지는 자루에 쓸어 담아 나올 정도였다.

발굴보다는 그저 쓸어 담았고. 후유증은 컸다. 예컨대 무덤에서 나온 3천여 개의 구슬은 마구 섞인 채 수습돼 본래 형태나 용도를 알 길이 없는 채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최대의 발굴 성과가 최악의 발굴 참사로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발굴을 담당했던 김원룡 발굴단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이 더 밀려오기 전 발굴을 끝내기로 작정해 밤을 세우며 발굴작업을 진행시켰고, 이에 고분이 갖고 있던 많은 정보들을 내 실수로 영원히 모르게 하고 말았다. 이는 나라와 국민에 대한 큰 죄가 됐다.”

이번 중국 선종사찰 순례에서 개인적인 성과는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직접 봤다는 것이다. 병마용갱과 진시황릉은 지금도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1974년 병마용갱 발견 당시 소식 접한 일본과 독일은 발굴과 복원을 도와줄테니 유적의 수익을 30년동안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발굴에 대한 자금과 기술이 부족하다면 100년 뒤를 기약하자”는 게 이유였다.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되는 병마용갱은 발굴된 것보다 발굴되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그럼에도 중국 문화재 당국은 함부로 발굴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 대만 왕보(旺報)는 9월 5일 “문화재 발굴·보존 기술이 충분히 발전할 때까지 중국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진시황릉을 발굴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왕보에 따르면 중국 국가문물국과 과학기술부 등은 최근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진시황릉에 대한 공동 탐사 결과, 향후 30~50년간 진시황릉을 발굴하지 않는 것이 문화재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로는 발굴이 훼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문화재 발굴에는 적지 않는 재원과 첨단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문화재 발굴은 어떠한가. 황룡사를 포함한 신라왕경 복원은 졸속 논란이 불거지며 잡음을 내고 있다. 더 나은 발굴을 위해 당장의 성과를 내지 않는 진시황릉의 사례를 반면교사 해야한다.
<신성민 취재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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