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현각 스님이 한국불교를 떠나겠다고 했다. 그 이유로 유교적 관습, 남녀 국적 차별, 형식주의, 스님과 신도의 차별 등을 들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이 외국 스님들은 장식품(데커레이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한국 불교의 기복신앙의 맹점, 금전과의 고리사슬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지난 818일자 문화일보에 이에 대한 견해를 밝힌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 스님께서 10년 내에 한국불교가 존립할 수 없는 상황이 올수도 있다는 뜻으로 위에서 언급한 눈 푸른 납자의 뜻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홍 스님은 승가는 부처님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각오를, 신자들에 대해선 불교의 최대 강점인 수행 종교로의 변화를 제기했다. 사실 한국불교의 문제점이 거론된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독일 쾰른 숲의 페트노이야르는 독일 지식인들로부터 거지 성자로 존경받는 불교수행자다. 그는 2003년 어느 기고문서 이렇게 적었다.

교단이 비대해감에 따라 허례허식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 나라서 불교 성직자들은 전통을 중요시하는 평신도들의 믿음과 무지를 이용해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식을 집전케 함으로써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여섯 감각의 호사를 누리고, 계율을 지키지 않고, 기만을 일삼으면서도 그 잘못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의 과보는 살아생전에 안 받더라도 적어도 죽은 다음에 삼계 육도의 어느 곳에서든지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초기불교서 삼보(三寶, ··: , , )가운데 승보는 사문들의 집단 공동체인 승가(僧伽)를 말하며, 사문이란 사쌍팔배(四雙八輩;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와 과()를 성취해 성현의 계위에 오른 성자들을 지칭한다. 그래서 미린다팡하(미란타 왕문경)라는 기원전 150년경에 쓰인 초기불교 담론서(미얀마에서는 이를 소부경전에 포함)의 귀경게(歸敬偈)에서는 승보에 대한 예를 이렇게 올리고 있다. ‘계율행의 공덕을 갖추고 네 가지 과위(果位)에 이르며 무상의 복전(福田)이 되는 성스러운 승가(僧伽)에 귀의 합니다라고 말이다.

불교의 최고 목표는 깨달음이고 열반이다. 무지(無知)와 갈애(渴愛)로부터의 해탈이고, 재생(再生)의 연속인 윤회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의 완성을 열반 또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신심(信心)’은 무엇이며 이를 성취하기 위한 용맹정진은 무엇이며, 다시 말해 교학체계(·····)와 실참수행 체계(37보리분법)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교학 체계와 실참수행 체계의 토대가 될 때 깨달음이라는 피안의 목적지를 향해 점점 가까이 갈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방법 외에 또 다른 열반과 깨달음을 향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고오타마 붓다의 불교는 아니다.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이제 우리는 2600여 년 전의 고오타마 불교로 돌아가야 한다.

고오타마 불교는 21세기 과학이 지향하는 과학의 불교다. 분명한 교학체계와 그 교학체계를 바탕으로 한 실참 수행을 어떻게 하라고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오타마 붓다가 가르쳐준 그 길을 걸어가면 걸어가는 만큼 자신에게 옛날에 경험하지 못한 행복과 자유가 찾아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주제별로 설하신 내용을 모아놓은 상윳따니까야17.2 낚싯바늘경의 내용서 수행승이 이익과 존경과 명성에 집착하면 그 수행승은 마라가 던진 낚싯바늘을 삼켰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익과 존경과 명성은 두렵고 혹독하고 고약한 것이다. 그것은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얻는데 장애물이 된다고 했다. 결국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갖 폐단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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