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숙 고전문학 연구자

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조선 백수에게 길 묻다

그 어느 때보다 취업난이 극심한 요즘, ‘백수라는 말은 어느덧 일상용어가 돼 버렸다. 오죽하면 취업준비생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직업을 갖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백수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편견을 갖곤 한다. 길진숙 고전문학 연구자는 719일 대한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서 ‘18세기 조선 최고의 지성, 백수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백수 시절 가장 빛나는 지성을 발휘한 이들을 볼 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 길진숙 연구자는… 이화여자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남산강학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삶의 현장이 되는 공부, 실전이 되는 공부를 통해 새로운 인생역전을 꿈꾸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전기 시가예술론의 형성과 전개〉 〈고전 톡톡〉(공저) 등이 있다.

당쟁 피해 시골서 칩거한 선비들
공부에 몰입해 독창적 성과 이뤄
백수는 자유로운 사고의 근원,
부처님 깨달음도 백수시절 완성

원조 백수는 부처님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입니다. 이 둘은 각각 당시 정치 세력이었던 노론과 남인 소속 여러 문인들과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연암의 선배였던 농암 김창협과 친구 담헌 홍대용, 다산의 스승 성호 이익과 이익의 조카 혜환 이용휴가 있습니다. 이들은 18세기 학문의 르네상스를 이끈 분들입니다. 이들의 업적을 곰곰이 되짚어보다가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백수시절 가장 빛나는 지성을 발휘했던 겁니다. 18세기 독창적 학문의 길을 개척할 수 있게 한 이들의 백수 시절을 연구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분들을 백수라고 부른다면 누군가에겐 불경스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백수가 주는 어감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수의 원류를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백수의 원조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왕위를 박차고 나온 분입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가정도, 국가도 기꺼이 버렸습니다.

가정과 국가에 속해 있으면 집착을 놓을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탁발과 무소유를 방편으로 길에서 유랑하며 깨달음을 설파했습니다. 그러면서 승가 공동체가 형성됐습니다. 소유로 인해 집착의 업을 지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한 승가는 무소유를 실천한 혁명적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가장 혁명적인 백수는 부처님입니다. 관직의 길을 벗어나 기꺼이 자유로움을 선택한 부처님과 승가 공동체가 먼 훗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산림 속 군자들의 삶
앞서 언급한 문인들이 관직의 길을 벗어난 이유의 중심에는 당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농암 김창협은 대단한 정치세력가의 자제였습니다. 40여 년간 중앙정계에 몸담은 서인의 영수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학맥의 정통파입니다. 따라서 농암도 관직에 오르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농암은 아버지의 유언을 이유로 숙종이 13년 동안 38여 차례 가까이 내린 벼슬을 마다했습니다. 왕에게 제출한 사직서에 농암은 아버지 김수항이 자신에게 절대로 청요직에 나서지 마라. 반드시 위태로우니 가문을 보존하려면 호신(護身)하라던 유언을 지켜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김수항은 서인이 정권을 잡은 1659년 기해예송 논쟁부터 남인이 재집권해 결국 자신이 사사(賜死)1689년 기사환국 때까지 서인과 남인이 벌인 여러 차례 세력 싸움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농암은 시골에서 은거하며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현실정치가 너무 혼탁했기에 간신들과 타협하지 않으려 정치에 나서지 않은 겁니다. 산림군자로 남아 순수한 학문의 뜻을 지키려는 의지가 충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인 집안도 혼탁한 현실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 인사들이 대거 유배를 갔을 때 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도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익의 둘째 형 이잠은 큰 충격을 받고 유랑객으로 떠돌다가 1706년 숙종에게 올린 상소로 인해 국문을 받다가 죽게 됩니다. 이 때 이익은 과거 준비를 중단하고 첨성리에 칩거해 한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현실 개혁에 몰두한 경세학자가 된 배경입니다.

혜환 이용휴도 마찬가지로 작은 아버지 이잠이 상소문으로 죽음을 맞게 되자 일찌감치 정계진출의 뜻을 접고 백수 생활을 했습니다. 혜환의 친구들도 지방 외직을 전전했는데 혜환이 써준 전별의 편지에 그의 정치관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목민관(고을의 원이나 수령 등의 외직 문관)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그는 목민관은 왕의 대리자이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격려합니다. 목민관의 의무는 백성들이 가장 필요한 것을 알아주는 것이며, 백성들은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니 괜히 어지럽게 명령을 많이 하지 말라고도 말합니다. 마치 노자나 장자의 말처럼 억지로 다스리려 하지 말고, 현장에서 그 지역 백성 처지에 맞게 정치를 펼치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지방관들은 모두 한양으로 다시 올라올 생각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억지로 많이 걷곤 했는데 그러지 말고 애민(愛民)을 실천하길 강조했던 겁니다. 남인들이 오직 지방외직만 맡을 수밖에 없었던 불합리한 정치 상황 속에서 불평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야 함을 알려준 사람이 혜환입니다.

담헌 홍대용은 당시의 사고방식에선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담헌은 매우 조숙해 12살에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닌 공부 자체를 위한 학문에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과거시험을 보지 않은 채 자발적 백수 생활을 지키며 천체과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담헌은 직접 천문관측소를 짓고, 홍천의를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픈 마음에 열심히 중국어를 연마했습니다. 당시 소중화(小中華)란 자부심이 있었던 조선에선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해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나 홍대용은 우주를 관측했던 사람으로 세상에 절대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화와 오랑캐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허물고 상대적으로 세상을 파악했습니다. 가장 문명적인 나라가 중심국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나라의 습속을 야만으로 함부로 폄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청나라를 유람하며 절강성 선비들과 밤새 필담을 나누고 항전척독을 집필했습니다. 그 책엔 청나라 선비들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내용이 많습니다. 주자학 외에도 당시 조선에서 금지했던 불교, 양명학 등에 종횡무진하는 지식을 가진 청나라 선비들을 알려 조선에 북학의 길을 열었습니다.

성호 이익은 선비가 누구인지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며 학문에 접근했습니다. 선비와 농사꾼의 차이를 들며, 농사꾼은 노동해서 먹고 사는 건전한 존재지만 나는 노는 밥버러지라며 냉정히 자신의 위치를 분석했습니다.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은 오직 적게 먹고, 나머지 곡식을 아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쓸모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평소에 콩죽을 먹고 일가친척이 모여서 잔치를 해도 콩죽, 된장찌개, 콩나물무침만 내놨습니다. 본인은 글을 알기에 농민에 도움이 되기 위해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글로 옮기는 데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벼의 계보를 자세히 쓴 책을 남겼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아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습니다. 이익은 정치에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애민 정책에 대한 욕구는 컸습니다. 유가의 도는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 스스로 연구할 수 있는 분야는 다 연구했습니다. 음서제를 없애고 추천제를 주장하고, 토지소유 불균형 해소를 위해 균전제를 제안한 저서 성호사설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백수는 자유로운 개척자
우리가 직장에 다니며 일을 할 땐 존재를 탐구할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나를 밝힐 때 어디서 무슨 일을 맡고 있는 누구입니다라고 소개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명할 만한 직책이 없을 땐 고민이 됩니다. 위의 문인들은 고향으로 물러가 백수 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고, 정체성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자신이 뭐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표현해 세상과 소통할지 생각했던 겁니다.

농암은 제자들을 기르면서 그들이 너무 과거 시험에만 매달려 공부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펙에 매달려 나를 알아볼 시간 없이, 내가 왜 이 공부를 하고 있는가 생각할 틈도 없이 공부합니다. 농암은 낙방해도 비관할 일이 아니며, 과거를 위한 규격화된 공부에 매몰돼 진짜 본인의 의견을 제대로 내놓을 수 없는 현실을 통탄했습니다. 주자를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의도를 파악하고, 문장에 본인의 목소리를 넣어 생기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의 글을 모방하고 뜻을 표방하는 것은 죽은 글쓰기이며 내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독창성을 발휘하는 것이란 주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백수는 노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새로운 직종을 개발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발굴하는 사람이 바로 백수인거죠. 기득권에 속했지만 기꺼이 특권의식을 버리고 지성 탐사에 몰두한 이들의 길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회 틀에 맞춘 삶만 추구하면 언제나 불편한 노동자 처지가 돼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사회적 규범이 정한 길로부터 여러분들의 길을 개척하는 지성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조선 말기 백수 생활을 한 선비는 굉장히 많았지만, 자기 길을 간 사람은 이 넷 밖에 없습니다. 충만한 백수 시절을 보냈죠. 가끔 우리는 시간을 죽이며 산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 처지를 비관해 남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삶을 살진 않나요? 우리 안의 불필요한 욕망을 덜어내면 삶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문인들처럼, 부처님처럼 창발적으로 내 길을 개척할 수 있다면 100세 인생에서 은퇴 후 50년이 짧게 느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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