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⑮ 사이 톰블리(Cy Twombly)

▲ 톰블리의 작품 〈Ohne titel, Wandfarbe und Bleistift auf Leinwand, 1968〉는 그의 자유로운 정신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일상의 삶에서 누군가를 새롭게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특히 예술가들에게 당대의 좋은 예술가를 만나 교류한다는 것은 자신의 예술을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과 가르침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보면 좋은 예술가들이 나오는 시대와 장소에 공통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는 개인의 특성과 더불어 시대의 정신성이 공유되며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는 경우이다.

라우센버그·케이지와 교류하며
그들의 실험 예술작품에 영향
놀이하듯 무수하게 그은 선들
선 긋기로 작가와 선은 하나돼
톰블리, 禪통해 작품세계 확장
“禪, 작품 표현의 안내자” 찬탄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 미국)는 젊은 시절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와 친하게 지내며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또한 당대의 실험예술로 찬사를 받던 존 케이지(John Cage)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케이지의 실험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회화작품을 만들어 가게 된다.

예술의 영역에 우연성, 즉흥성, 직관성, 반복성 등을 도입한 케이지의 실험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회화에서 톰블리의 우연성과 즉흥성, 반복성은 새로운 조형적, 미학적 개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가의 예술행위는 어떠한 목적성을 내포하고 있다. 표현의 방법에 차이는 있지만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인식의 관점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때문에 우연성에 예술성이 있는가하는 논쟁은 계속되었다.

요즈음 인공지능의 발달로 많은 영역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예술도 예외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의 정신이 들어 있지 않은 로봇의 표현에서 예술성을 찾을 수 있을까?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예술성의 가치를 찾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술이 예술이기 위한 조건에서 시대정신, 창의성, 예술성 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판단하는데 로봇이 하는 표현행위는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서 표현이 되기 때문에 그 작품에서 위에서 거론한 세 가지의 가치를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대미술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작가의 정신성이다.

정신성은 개인적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시대정신을 또한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시대정신이 포함되지 않은 작가의 작품들은 표현성만으로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표현기법과 비교가 가능할 수도 있다. 아마도 표현성만으로 보면 작가의 표현보다 로봇의 표현이 더욱 뛰어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연성에서 작가의 정신성의 발현이 내포될 때 예술성이 인정이 되며 나아가서 창의적인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무심히 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고도의 정신성이 내포되며 독창적인 표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선사께서 깨달음을 묻는 사람에게 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인사를 하고 가는 행동을 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와서 깨달음을 묻자 똑같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행위와 같다. 여기에서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행위는 동일하나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뜻은 전혀 다른 것처럼 우연성에 의해서 나타나는 행위도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톰블리의 작품 〈Ohne Titel, Oel Buntstift und Bleistft auf Leinwand, 1962〉는 그의 정신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케이지의 영향으로 선에 많은 관심을 가진 톰블리는 선의 정신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가 이해한 선의 세계는 가장 원초적일 때 가장 정신적이라는 것이었다.

작가가 화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는 선긋기, 흘러내리기, 다시 지우기, 공간을 남겨두기 등으로 계산되지 않은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잘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번 수정을 하는 것 같은 행위를 하지 않고 마치 놀이를 하듯이 무심히 하는 행위들이 하나의 흔적을 남기며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의도된 행위를 하지 않는다. 선을 긋는 순간 작가는 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선은 자유롭다. 즉, 작가가 자유로워야 표현된 선도 자유롭고 관객도 관념으로 보지 않아야 그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원초적 자유로움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유로움이 스스로를 구속하는 현상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학습에 의해서, 경험에 의해서, 자유로움은 점점 사라지고 자신의 굴레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수행자 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관념으로 굴레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자유를 갈망한다.

▲ 〈Ohne titel, Oel Bunstift und Bleistift auf Leinwand, 1962〉는 계산되지 않은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Ohne Titel, Wandfarbe und Bleistift auf Leinwand, 1968〉는 톰블리의 원초적 자유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반복되는 듯 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한다. 즉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선을 긋기 위하여 그는 많은 시간 명상을 하며 자신과 선이 하나가 되기를 염원한다. 이렇게 시작된 선긋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때문에 표현되는 선은 결코 어떠한 형상이나 의미로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다. 내면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감각들이 나타나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에게 선은 수행이며 깨달음이다. 자신이 선을 긋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행위는 스스로의 정신성을 발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선은 어느 정도의 흐름을 유지하며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드러나는 선의 모습에서 작가의 정신성을 인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톰블리가 이러한 작품을 하던 시대적 상황을 보면 마치 우연성을 가장한 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린아이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데 아이는 무엇을 그릴지 몰라 그저 선을 반복적으로 하는 행위와 유사해 보인다. 그러면 어린아이가 그린 선과 톰블리가 그린 선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어린아이들에게 이 작품을 보여주고 그려보라고 하면 어린아이가 더욱 잘 그릴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아무런 관념적 사고가 없기 때문이다. 원초적 자유로움이 남아있는 아이들은 쉽게 이러한 행위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표현된 형식의 특성을 통하여 작가의 정신성을 알 수 있는데 그 깊이를 가늠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린이와 작가의 표현적 유사성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정신성의 유사성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의 종지 중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한 문자를 사용하여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성의 깊이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을 전하던 선사들처럼 예술가 표현도 결국은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선사들의 깨달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자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 깊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깊이를 알아볼 수 있는 인식의 깊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톰블리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불립문자, 이심전심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정신성을 예술성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명상을 하며, 관객은 작가의 예술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명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톰블리의 이러한 자유로운 선에 대한 해석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히피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한 부분이 있다. 히피문화는 전쟁에 반대하는 관점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나아가서 삶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그들은 자유로움의 유혹을 마치 무질서로 혼동한 측면이 있으며 나아가서 허무주의를 표방하여 순간의 즐거움,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현상이 일어나는데 예술가들 역시 기존의 표현방식에서 벗어나서 부드럽고, 자유로운 표현방식을 추구하였다.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길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과정에서의 힘든 역경은 극복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톰블리 역시 새로운 길을 가고자한 예술가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예술성을 인정받기까지 그는 많은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자신의 정신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적인 평가를 받으며 그는 결코 현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기 시작하며 정신적 깊이를 추구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시대의 흐름을 변화시키는데 커다란 일조를 하였다.

미국의 현대미술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그는 특히 추상미술의 정신적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하나이다. 톰블리가 시대성, 정신성, 예술성을 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선(禪)이었다. 그에게 선은 자신의 예술을 드러내는데 가장 중요한 안내자였으며 삶의 과정에서 존재가치를 찾아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예술은 더 이상 표현적 기법이나 재료의 특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며 정신적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을 톰블리는 보여주고 있다. 최근 한국의 단색화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도 이러한 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관객의 수준을 향상시켜놓은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즉 훌륭한 작품도 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사라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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