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대왕 일화에 대한 소고

방향없이 가르침 접하면 해로워
‘비인부전’ 말 나오는 이유 설명
구도심의 방향 중요함을 강조

전 시간에 신앙의 격을 말했지요? 그리고 격이 낮은 신, 마치 거래를 하듯이 인간들에게 무엇인가 베풀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는 신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아니 그 정도 되면 신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그저 조금 신통력 가진 요괴라고 봐야 되는 거지요. 지금 손오공 일행이 당도한 곳, 통천하를 앞둔 마을이 그런 요괴급 신의 지배를 받고 있네요. 그 마을 사람들은 그 신의 가피를 받아야 살 수 있기에 할 수 없이 해마다 동남동녀를 바쳐야 되는 상황이구요. 어떤 이익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치는 신앙의 형태야 가장 낮은 형태의 신앙이고, 그런 신앙을 요구하는 신은 낮고도 낮은 격을 가진 신이라고 말했지요? 그러니까 그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의 격을 낮추고 있고, 그렇게 그 마을 사람들을 격 낮은 믿음으로 끌고 가면서 제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요괴급의 격을 가진 통천하의 신이겠습니다.

스스로의 격을 높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믿음의 격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어찌 이상만을 추구하고 살겠습니까? 정말 이상을 말한다면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온 마을이 망하면 망했지, 나의 아들 딸, 마을의 아들 딸을 내놓을 수 없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된다는 논리가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이상을 쉽게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로 타락하게 됩니다.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식이 실종되면, 오히려 존재하는 것이 불행 아닐까요?

애궁…. 이렇게 심각하게 나가면 끝이 없겠지요? 그러지 않아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 잘못된 업의 순환을 끊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 계기가 이르렀습니다. 손오공 일행이 방문한 것이지요. 영감대왕의 악업이 쌓이고 쌓여 이제 심판을 받게 된 대목이라 할까요? 아니면 마을 사람들의 슬픈 염원이 불보살님께 통하게 된 것일까요? 손오공과 저팔계가 이 마을의 슬픈 운명을 바꾸는 용사가 되어 나섭니다. 손오공은 남자 아이로, 저팔계는 여자 아이로 변신하여 영감대왕 사당에 제물이 되어 가는 거지요. 그리고 앞에 줄거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손오공의 여의봉 한방에 영감대왕 기겁을 해서 도망을 치고요. 비늘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영감대왕의 정체를 어느 정도 드러내주는 것이었지만, 그 밖에는 알 길이 없게 되었지요.

손오공과 저팔계의 활약에 현장법사 일행 전부가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을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환대만 받으면서 거기 머물러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지요. 인도까지 불경을 가지러 가야되는 머나먼 길, 아직 그 여정이 아득하게 남아 있지요. 그런 아득한 여정인데 통천하를 건널 길은 여전히 없고…. 손오공 일행이 애가 탈 수 밖에 없는 상황! 바로 그 상황을 이용한 영감대왕의 복수극이 시작됩니다.

영감대왕의 부하인 쏘가리 요괴할멈의 계책이 절묘하지요. 영감대왕의 신통력으로 통천하를 두껍게 얼리고, 급한 마음에 그 위를 건너는 일행이 지나는 곳을 얼음을 갈라지게 해서 현장법사를 잡아내는 겁니다. 어쨌든 갈 수밖에 없는 길목에 함정을 설치한 것이라 용빼는 재주가 없어요. 그대로 함정에 빠져버렸죠. 그러고 나니 이제 정말 무슨 뾰족한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이전에도 만났던 몇 몇 요괴들 가운데도 근거지가 확실하고, 그 근거지가 지리적 이점을 가진 곳일 경우는 참으로 퇴치가 힘들었었지요? 특히 물속이 근거지였던 요괴들은 그런 어려움이 더 심해요. 물속에서 그래도 잘 싸울 수 있는 것은 사오정과 저팔계지요. 사오정은 원래 출신이 물귀신이고, 저팔계는 천상계에 있을 때 은하수를 다스리던 관리였기에 물질에 능숙합니다. 문제는 손오공이에요. 변신술로 물속에 들어가 웬만큼 버틸 수는 있지만 있는 능력의 반도 다 발휘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제일 센 손오공이 힘을 못 쓰게 되니 싸움이 힘들어질 수밖에요.

결국 급하면 보살님! 손오공이 남해로 관세음보살님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가보니 전에 왔을 때하고는 영 달라요. 보통은 보살님이 거처에 조용히 앉아 계신 경우가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뒷산 대밭에 가 계신 거예요. 거기서 뭘 하시느냐…. 대나무 껍질을 벗겨 바구니를 짜고 계시더란 말이죠. 갑자기 웬 대바구니? 그래서 연유를 여쭤보니, 참 김빠지는 사연이 있네요. 통천하 요괴는 관세음보살님 거처의 연못에 있던 금붕어였다는 것이었네요. 이 녀석이 아침저녁 염불소리, 설법하는 소리를 듣다가 신통력이 생긴 것! 큰비에 못물이 넘쳤을 때 밖으로 달아났던 것! 그리하여 통천하까지 달아나 거기서 수신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

애고…. 결국 보살님의 권속이 요괴로 변한 것이었네요. 보살님도 좀 켕기는 게 있으셨겠지요. 갑자기 보이던 금붕어가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되어 신통력을 살펴보시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통천하게 가서 현장법사 일행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아신 거죠. 그래서 손오공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뒷산 대밭으로 가서 물고기 잡을 바구니를 만드신 거죠. 그리고 손오공이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앞장을 서서 통천하로 달려오시네요. 그리곤 손오공이 그토록 애를 먹었던 요괴를 단숨에 잡아내시죠. 바구니 물속에 던져 넣고 “죽은 것은 가고 산 것은 남아라…라…라…” 이상한 주문? 그 주문 한참 외우시다 대바구니 건져내니 그 속에 잡혀 나오는 금붕어! 그게 바로 그토록 골치 썩이던 영감대왕의 정체였네요.

보살님의 권속이라고까지는 못하겠지만, 보살님 계시던 곳의 금붕어가 요괴가 된다! 이건 앞에서 여러 번 나왔던 이야기, 요괴가 보살님 권속으로 되는 이야기가 거꾸로 된 것이네요. 흑풍요괴, 홍해아의 경우가 바로 요괴가 보살님 권속이 된 예였지요. 흑풍요괴는 보살님 집 지키는 권속이 되었고, 홍해아는 보살님 제자가 되었는데…. 이번엔 거꾸로지요? 이상한가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요괴가 보살님 권속이 될 수 있다면, 그 반대가 가능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삼쾌선생이 계속 강조하지 않았던가요?

요괴는 요괴가 아니라 그 이름이 요괴이니라! 보살 권속은 보살 권속이 아니라 그 이름이 보살 권속이니라! 보살은 보살이 아니라 그 이름이 보살이니라! 엥? 이렇게 말하다 보니 금강경을 좀 표절한 것 같군요. 히히…. 그렇지만 이런 표절은 괜찮아요. 금강경에 불보살님이 저작권을 요구하실 리도 없고, 아난존자가 표절 시비를 하실 일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잘 써먹기만 하면 기뻐해주실 겁니다. 그리고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삼쾌선생이 써먹은 방식도 꽤 괜찮은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떤 존재가 꼭 본래적인 자성(自性)이 있고, 그것이 선과 악으로 고정되어 있을까요?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 불교의 연기적 사고방식이고, 또 관계론적 시각이라는 말씀, 앞에서 여러 번 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은 단지 모습일 뿐입니다. 어떤 관계성 속에서, 어떤 연기관계 속에서 그러한 모습을 띄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것이 본래적으로, 영원불변하게 그런 존재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이겠지요. 어떤 존재의 모습, 그것은 정말 모습일 뿐입니다.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모습에 얽매어서 그것에 집착하고 매달리고…. 결국 그것이 괴로움의 윤회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이제 금강경 말씀을 열심히 표절해 봅시다. 그래서 모습에 매달리는 그 병에서 벗어나 봅시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 그 모습이 부처일 뿐이니라.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 그 이름이 남자일 뿐이니라! 요괴는 요괴가 아니라 그 이름이 요괴일 뿐이니라! 삼쾌선생은 삼쾌선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삼쾌선생일 뿐이니라! 나칠계님은 나칠계님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칠계님일 뿐이니라! 그래서 삼쾌선생이 나칠계고 나칠계가 삼쾌선생…. 이크! 스톱! 삼쾌선생과 나칠계님을 혼동하는 것은 절대 안됩니다. 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모습을 혼동하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잘생긴 삼쾌선생과 그저 그렇게 생긴 나칠계님을 같이 보시는 것은! 절대 안됩니다!

잠깐 이야기가 딴 길로 들어갔음을 깊이 사과드리면서…. 제자리 찾기 하겠습니다. 보살님 거처에서 누릴 수 있는 복연, 설법 듣고 염불 듣고 하는 복연도 자칫 삿된 길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나쁜 결과를 낳을 수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아니 오히려 뛰어난 가르침이야말로 그것이 자칫 방향을 잘못 틀게 되면 그 뛰어남 때문에 나쁜 쪽으로도 엄청나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인부전(非人不傳), 즉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이지요. 올바른 지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뛰어난 가르침을 접하게 되면 오히려 큰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지향을 갖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도 말할 수가 있지요. 궁극적인 깨달음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길, 그것이 바로 대승보살의 길이지요. 그래서 어떤 선지식께서는 “대승의 범부가 될지언정 소승의 성과(聖果)를 탐하지 말라”고 경계를 하시기도 했구요.

영감대왕노릇하던 금붕어가 참으로 올바른 구도심을 가지고 설법을 꾸준히 들었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조금 힘을 얻었을 때 보살님의 거처를 벗어나게 된 업연의 한계로 그런 요괴놀음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고 관세음보살님의 책임이 아주 없는 게 아니지요. 그래서 그리도 자발적으로, 급히 통천하까지 달려와서 잘못된 업연을 수습하셨네요. 그리고 그 덕분으로 참혹한 괴로움 속에 놓여있던 통천하 주변 마을들도 질곡을 벗게 되고, 보살님의 거룩한 모습을 친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구요. 그때 현신하셔서 금붕어 잡아들이던 보살님 모습이 그려져서 어람관음(魚籃觀音)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역시 서유기 저자 오승은의 기발한 가탁입니다요. 그렇지만 그런 가탁을 탓할 것도 없습니다. 보살님은 언제 어디서고 우리 주변에 모습을 드러내고 계실 것이니까요. 우리가 깨인 눈이 있다면 그 수많은 보살님의 모습을 여기 저기서 뵐 수도 있을 것이니까요. 어람관음만이겠어요. 삼쾌관음 나칠계관음…하하! 여러분도 다 관음! 주변 모든 분들 다 관음! 삽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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