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후불벽화

아미타여래삼존 불상과 후불벽화. 천에 그린 탱화가 아니라 흙벽에 붓질로 봉안한 벽화다.
한 법당에 국보 둘, 보물 셋의 보물창고
민초들의 영령을 극락천도한 수륙사
국내 유일의 아미타여래삼존 후불벽화
고려불화 요소와 조선초기 양식 혼재

우리나라 사찰벽화의 보고(寶庫)
무위사 극락보전은 그 자체가 보물창고이고 성보박물관이다. 국가지정 보물급 문화유산이 중중무진이다. 먼저 극락보전 건물은 국보 제13호다. 법당 내에 봉안한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물 제1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불상의 후불벽에 조성한 아미타여래삼존 후불벽화는 국보 제313호이고, 또 후불벽 뒷면의 수월관음벽화는 보물 제1314호다. 아미타내영도를 비롯한 극락보전 내부 사면벽화 일괄 27점은 보물 제1315호로 지정하였으니 한 법당건물에 국보가 둘이고, 보물이 셋이나 있어 웬만한 박물관 수준을 능가한다. 우리나라 사찰벽화의 보고(寶庫)로서의 위상이 확고하다.

무위사 극락보전 건물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갓 이행한 조선초기 건축이다. 후불벽화 좌우하단에 남아있는 화기(畵記)와 1983년에 발견한 종도리 장혀의 묵서명, 그리고 2011년 단청 모사작업 과정에서 찾은 천개반자 묵서명을 통해 건축과 벽화조영 연도가 밝혀졌다. 즉 극락보전 건립은 1430년, 후불벽화 및 수월관음벽화 제작연도는 1476년, 단청장엄은 1526년으로 편년되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호이징가의 표현에 따르면 쓰라린 삶 속에서 문학이나 종교를 통해 목가적이며 인간본위로의 탈출을 굼꾸던 ‘중세의 가을’ 무렵이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의 싹이 움틀 시기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 후불벽화는 1476년에 제작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 벽화보다 약 20년 앞서고, 미켈란첼로가 시스티나성당 천정에 그린 〈최후의 심판〉 벽화보다 60여년이 앞선 것이다.

후불벽화는 15세기 왜구의 약탈과 살상이 빈번한 시대상황에서 무대의 막이 오른 작품이다. 기근과 왜구의 침탈 속에서 희생된 민초들의 영령에 대한 종교적 위령제는 수륙재(水陸齋)였다. 15세기 무위사는 수륙재를 맡은 수륙사(水陸社)의 지위를 가졌다. 아미타여래의 정토신앙에 의지했다.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설파했다.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삶에 이르는 길은 세 가지라고. 이 세계를 온몸으로 저항하며 거부하든가, 모순의 세계를 변혁하든가, 아니면 환상의 세계를 꿈꾸는 길, 그 셋이라 하였다. 15세기 조선의 민초들은 수륙재와 정토신앙에 의지하는 ‘꿈의 길’을 택했다.

향우측 관음보살께서 착의한 사라 비단결의 세부문양.
다양한 계층 시주, 화원은 대선사 해련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불사참여 계층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고려왕조 때 왕족과 귀족중심의 불사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평민의 십시일반 참여가 저변으로 확대 되었다. 후불벽화 좌우 하단에 붉은 바탕에 묵서로 기록한 화기가 있다. 화기는 거의 강진지역 인명사전에 가까우리만치 인명으로 빼곡하다. 전 아산현감 강질, 강진군부인(郡夫人) 조씨, 김씨, 강씨, 박씨 등 수십 쌍의 일반 평민부부들의 시주 참여로 대선사 해련(海蓮), 선의(善義), 죽림(竹林) 등의 화원들이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 극락천도를 발원하는 수륙사의 불사였던 까닭에 신분의 지위고하를 구애받지 않아 다양한 신분계층의 참여가 이뤄졌다. 발원은 현세적 구복과 함께 극락왕생에 초점이 맞춰졌다. 벽화의 중심에 아미타여래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아미타여래 삼존을 자연스레 봉안했다. 대세지보살의 자리에 지장보살을 모시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시대적 난세, 살상, 참혹한 죽음의 행렬 속에서 지장보살께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내민 것이다.

벽화 속 향좌측의 지장보살은 실존하지 않은 초역사적인 보살이시다. 스스로의 본원력으로 나투신 분이다. 오직 고통받는 중생구제를 위해 가장 험난한 지옥에 스스로 찾아 가셨다. 지옥에 있는 가장 악행의 중생도 구제하는 까닭에 대원본존이시다. 벽화에서 지장보살은 천 조각을 깁은 것 같은 분조가사의 옷차림을 하고 계신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지장보살도에서처럼 오른손엔 육환장 지팡이를 들고 있고, 왼손엔 투명한 보주를 쥐었다. 육환장은 누구도 열 수 없는 지옥의 문을 여는 지팡이이고, 보주는 지옥의 어둠에 광명의 빛을 놓는 지물이다. 황금빛 연화를 딛고 서있고, 민머리에 두건을 둘렀는데 두건엔 물방울 문양을 촘촘히 입혔다. 분조가사에도 세밀한 문양을 베풀었다. 섬세한 고려불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목이다. 지장보살을 따로 떼놓으면 영락없는 고려불화 지장보살도다. 구도나 밝은 색의 색채운영, 세밀한 의습문양 등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단지 벽화라는 재질특성에 의해 의습문양을 다소 간결히 처리한 차이 뿐이다.

관음벽화, 붓질로 구현한 마이크로 세계
무위사 극락보전의 상단불화는 아미타여래 삼존도다. 그런데 비단이나 삼베에 그려 봉안한 탱화가 아니라, 마감한 흙벽에 올린 벽화다. 그래서 후불탱화가 아니라 후불벽화다. 아미타여래삼존 후불벽화는 국내 유일의 사례다. 후불벽의 앞면에 벽화로 현존하는 곳은 세 곳 정도다. 무위사 극락보전, 선운사 대웅보전, 불국사 대웅전 좌우 협칸, 그 세 곳이다. 무위사 후불벽화는 조선초기의 벽화임에도 고려불화의 탱화처럼 치밀하게 시문하고, 온화한 중간색채를 운영하고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관음보살의 표현에서 고려불화가 가진 세밀함의 특징이 뚜렷이 나타난다. 관음보살은 오른손에 초록잎의 버드나무 가지를 쥐었고, 왼손엔 짙은 초록의 정병을 지물로 들고 계신다. 생명력과 감로의 자비력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다.

관음보살의 머리 위에서부터 발 끝에 이르기까지 부드러운 하얀 천의가 쉬폰처럼 흘러 내린다. 천의는 투명에 가까운 하얀 실크 사라(紗羅)다. 사라의 비단결은 현미경으로 살펴야할 정도로 한 올 한 올 극도의 섬세한 붓질로 표현했다. 삼각형, 마름모, 원의 기하학적 패턴이프랙탈 구조를 이루며 중중무진으로 중첩하고 무한히 연속한다. 연기법계의 그물망이자, 붓질로 구현한 미시의 마이크로 세계다. 벽화에 성스러움의 영성이 충만하다. 사람 능력의 한계를 초월한 종교장엄의 성스러움으로 내밀화해서 진신(眞身)의 생명력을 갖췄다. 문양은 곧 신성을 부여하는 장엄윤리이자 힘임을 일깨운다.

아미타여래 법의에 베푼 고려불화적 문양과 경영색채.
고려불화적 섬세한 선묘와 깊은 색감
여기서 신성의 설화가 탄생하여 서사적 플롯을 갖춘다. 벽화가 그려지는 작업이 신비화하여 유통된다. 화기에는 분명히 대선사 해련 등이 그렸다고 밝히고 있지만, 사람의 능력 밖의 지극정성으로 섬세히 그린 까닭에 관음보살의 분신인 파랑새를 등장시킨다.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붓질로 그린 그림으로 승화되었다. 유려하고 섬세한 붓질을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더욱이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미처 그리지 못하고 파랑새가 날아가 버려 미완성 작품의 깊은 여운과 울림을 갖게 했다. 신묘한 회화에 극적인 긴장구조까지 부여한 서사를 갖춰 벽화에 성스러움을 극대화 했다. 그런데 벽화에 전해지는 전설은 허구적인 플롯이 아니라 실증적 조형을 갖추고 있어 일정한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다. 벽화 앞의 목조 관음보살상은 양 손으로 정병을 받쳐 들고 있다. 정병엔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 있고, 가지 끝엔 파랑새가 앉아 있다. 후불벽 뒷면 수월관음벽화에서도 선재동자 자리에 한 노스님을 그렸다. 비구승의 어깨 위에 파랑새를 또 표현하고 있다. 그런 표현들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상이다. 우리나라 법당 내부의 불화 주체와 관련하여 여러 곳에서 파랑새 설화가 통용되고 있어 재미있다. 제작 시기나 회화 수준, 서사의 근거 등을 두루 살펴볼 때 파랑새 설화의 원형은 무위사 극락보전 벽화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벽화에서 거역할 수 없는 시대 흐름도 드러난다. 고려불화 양식에서 조선초기 시대흐름을 반영한 양식적 이행이 포착된다. 변화의 흐름은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의 표현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려불화의 완전한 원형 광배는 신체의 흐름 따라 광배의 폭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표현해서 올록볼록한 광배로 바꿨다. 머리에는 육계가 볼록하고 붉은 보주가 태양처럼 솟구치고 있다. 여래의 붉은 대의에 세밀히 시문하던 원형 연화문도 형태의 유사한 외형만 추구하고 간결히 처리했다. 그럼에도 화면은 중세의 신성함과 우아함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 따스한 질감의 황토색 바탕에 은은한 붉은색과 초록색이 배채법의 채색처럼 깊은 색감을 자아낸다. 고려불화적 섬세한 선묘(線描)는 서예의 획처럼 힘차고 변화무쌍한 고저장단으로 율동감과 입체감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벽화에 36.5도의 살아있는 체온이 흐른다. 중세의 가을 빛이 바람벽에 내려앉았다. 500여년 시간의 층위에도 파랑새의 붓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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