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母列傳- ⑭ 원오(元悟) 스님

17세기 초반 원오 스님이 만든 대표작인 1605년 논산 쌍계사 소조석가여래좌상(사진 왼쪽)과 1605년 익산 관음사 봉안 목조보살입상(사진 오른쪽)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17세기 전반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소실(滅失)된 삼보사찰(三寶寺刹 -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과 왕실의 원찰(願刹, 보은 법주사, 고창 선운사) 등의 중건이 이루어져 전각 건립과 동시에 불상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활동한 대부분의 조각승(彫刻僧)들은 전쟁 이전부터 불상을 제작한 스님으로 추정된다.

왜구의 침략으로 전국 사찰 소실
終戰 이후 불상 조성 불사 ‘활발’
조선후기 불교조각 개척자 역할
생몰 미상… 大禪師로 칭송받아
완주 위봉산 주석, 호남서 활동해

17세기 초반에 불상 제작을 주도한 스님은 대략 십여 명이 밝혀졌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던 조각승은 원오(元悟, 願悟, 圓悟) 스님이다. 스님은 1605년 대선사(大禪師)의 반열에 올랐던 것으로 보아 당시 불교계에서 존경받았던 학승(學僧)이면서 불상을 제작한 스님으로 보인다. 현재 원오 스님이 만든 불상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7건 30여 점이 남아있다.

조각승 원오 스님의 생애와 승려 장인(僧匠)이 된 배경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지만 문헌 기록을 통하여 스님의 활동 시기와 내용, 조각승의 계보 등을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오 스님은 1583년에 주종장(鑄鐘匠) 김자산(金慈山)이 하가산 수암사 범종(안동 광흥사 소장)을 만들 때 화원(畵員)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후, 1599년에 강원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을 석준(釋俊)과 함께 개금하였다. 이 문수동자상은 1466년에 세조의 둘째딸 의숙공주와 남편 정현조가 아버지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만든 불상이다.

원오 스님은 1605년 3월에서 7월까지 충남 논산 쌍계사 소조삼세불좌상을 신현(信玄)·청허(淸虛) 스님 등과 함께 제작하였다. 이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화원(畵員) 상수대선사(上首大禪師) 원오(元悟)”로 밝히고 있어서 원오 스님이 대선사의 지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님은 11월까지 전북 완주 위봉사 북암에 4구의 목조보살입상(익산 관음사와 익산 혜봉원 봉안, 완주 위봉사 2구 도난)을 충신(忠信) 스님, 청허(淸虛) 스님과 조각하였는데, 현재 김해 선지사 목조여래좌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및 조각승이 동일하게 나와 완주 위봉사에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원오 스님은 1610년에 완주 위봉사 진석당(振錫堂)에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남원 선원사 봉안)을 제작하면서 대시주자(大施主者)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원오 스님은 대부분 완주 위봉사 불상을 제작하면서 시주자로도 참여한 것으로 보아 완주 위봉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7세기 초에 원오 스님은 각민(覺敏)스님과 청허(淸虛)스님 등과 불상을 제작했다는 단서가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조성발원문에서 나왔다. 이 발원문에 증명(證明)으로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스님이 맡았는데, 부휴 스님은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고승(高僧)으로 호남을 중심으로 왜구에 대해 항쟁하면서 사찰 보존과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부휴 문도(浮休門徒)에 속하는 의승군들은 전쟁 중에 서산 휴정(西山休靜) 스님의 지휘를 받지 않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의 수군(水軍)으로 활약하였다.

이들 의승군은 좌수영(영취산 흥국사)-조계산 송광사-지리산 화엄사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를 가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순천 송광사를 시작으로 보은 법주사, 김제 금산사, 구례 화엄사, 완주 송광사, 강화 전등사 등에 중창과 중수불사를 주도한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원오스님은 1624년에 경남 합천 해인사 경판고(經板庫, 현 法寶殿) 중수에 벽암 각성(碧巖覺性) 스님 등과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원오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1550년대에 태어나서 1580년대 화원(畵員)으로 범종 제작에 참여하였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의승군으로 활동한 뒤, 1599년부터 1610년대까지는 완주 위봉사에 거주하면서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나 명산대찰을 중심으로 불상의 제작과 개금을 주도하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원오 스님의 활동 시기는 1583년에서 1623년까지이다.

원오 스님의 선배로 추정되는 석준(釋俊) 스님은 1599년에 상원사 문수동자상을 수화승으로 중수하고, 1600년 초에 전북 김제 금산사 중건을 수문(守文)스님과 주도한 것으로 보아 전북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으로 추정된다.

원오스님에게 조각을 가르쳐 준 스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석준(釋俊, -1599-1606-), 원오(元悟, -1583-1623-), 각민(覺敏, -1605-1614-) → 행사(幸思, -1606-1648-), 청허(淸虛, -1605-1645-) → 무염(無染, -1633-1656-) 등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오 스님은 완주 위봉사에 거주한 스님으로, 부휴문도(浮休門徒)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원오 스님이 만든 대표적인 불상은 논산 쌍계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봉안된 삼세불좌상이다. 본존인 소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 190㎝의 중대형불상이다.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여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앞으로 숙인 머리에는 나발이 촘촘하고, 육계의 표현이 명확하지 않으며, 정수리 부분에 원통형의 정상계주와 이마 위에 은행(杏)모양의 중앙계주를 가지고 있다. 살이 찐 얼굴에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원통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표현하였다. 특히, 눈두덩이가 넓고 작은 입을 가지고 있다.

두꺼운 대의는 변형통견으로, 대의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덮은 가장 끝단이 가슴에서 V자형으로 짧게 늘어지고, 나머지 대의자락은 팔꿈치까지 늘어진 후 팔꿈치를 지나 복부에서 넓게 펼쳐져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반대쪽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자연스럽게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펼쳐져 있다. 왼쪽 어깨에서 한 가닥의 옷자락이 길게 늘어져 끝부분이 꽃잎 모양으로 마무리되고, 왼쪽 발바닥 위에 짧게 소매 자락이 늘어져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 손가락을 편 상태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무릎 위에 들고 있다. 이와 같은 항마촉지인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석가불의 수인(手印)이다.

원오 스님이 1605년에 완주 위봉사 북암에 만든 4구의 목조보살입상 가운데 1구는 전북 익산 갈산동에 위치한 익산 관음사에 봉안되어 있다. 이 사찰은 1912년에 정토진종(淨土眞宗) 오오타니하[大谷派]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로 개창(開創)되었다가 해방 후 현재 사찰 이름으로 바뀌었다. 원오가 만든 목조보살입상(木造菩薩立像)은 높이가 153㎝로 조선후기 중대형 보살상이다. 보살상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크고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보관 안쪽에 높은 상투를 묶어 조선전기 보살상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방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원통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가지고 있다. 특히, 1605년에 제작된 김해 선지사 목조여래좌상과 같이 두꺼운 눈두덩이를 가져 편하고 순한 인상을 준다.

두꺼운 대의는 변형우견편단(變形右肩偏袒)으로, 대의 자락은 오른쪽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완만하게 늘어져 팔꿈치와 복부(腹部)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완만하게 내려와 배 부분에서 아래로 늘어져 있다. 왼쪽 팔뚝 위에 옷자락이 뾰족하게 삐쳐 ㅅ자형을 이루고 있고, 왼쪽 어깨 뒤에 길게 앞에서 넘어온 옷자락이 늘어져 있다. 상반신에는 X자형으로 목걸이를 걸치고, 대의 안쪽에 승각기를 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연화 줄기를 들고 있지만, 1980년에 그려져 사찰 내에 소장된 유화(油畵)에 여의(如意)를 들고 있어 문수보살임을 알 수 있다. 

989년 9월 25일 도난당한 위봉사 대웅전 관음입상과 지장입상 사진제공=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또한 같이 제작된 목조보살입상 1구가 익산 혜봉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완주 위봉사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관음상(觀音像)과 지장상(地藏像)은 1989년 9월 25일 도난당하였다. 이들 보살상이 조성된 완주 위봉사는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30본말사로 구획할 때 전북 일원의 50여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本寺)로 선정될 정도로 조선 후기에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사찰이다.

이 사찰은 고려 초기에 전주의 최용갑(崔龍甲)이 암자로 건립한 후, 고려후기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머물면서 가람을 정비하였으며, 조선시대 국난(國難)이 일어났을 때 왕실의 진영(影幀)을 보관하기 위하여 사찰 주위에 위봉산성(威鳳山城)을 축조하였다.

현재 군산 상주사 대웅전, 김제 문수사 대웅전, 익산 문수사 명부전, 완주 화암사 명부전, 논산 월은사 인법당, 남원 용담사 법당(현 서울 강남 법수선원 봉안) 등에 봉안된 불상은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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